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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6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러시아에 체류했습니다. 이 기사는 당시 보고 느낀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기자말]
 상트페테르부르크 풍경
  상트페테르부르크 풍경
ⓒ 이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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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원한다! 우리는 변화를 기다린다...!"

전시에 방문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길거리 곳곳에서는 키노의 노래 '변화를 원한다'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변화를 원한다'는 가사의 노래는 부를 수 있지만 명시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사실상 금지된 것이나 다름 없는 모순적인 국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이들이 저항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을까? 변화를 원한다'고 외치며 러시아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키노는 구소련 국가들에서 매우 잘 알려진 밴드로, '변화를 원한다'는 구소련 국가들의 비공식 국가라고 불릴 만큼 유명한 노래이다. 길거리 공연이 발달한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변화를 원한다'는 공연자들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쩌면 상당수 러시아인에게 그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그저 하나의 관습 같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변화를 원한다'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가사가 아닌, 습관적으로 부르는 유명한 노래의 한 소절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러시아인들, 그리고 구소련 국가 국민들에게 키노는 단순히 유명한 밴드를 넘어 시대의 상징이기도 했다. 키노의 리더 빅토르 최는 한국인들에게는 '한국계 러시아인 락스타' 정도로만 알려졌지만, 러시아인들에게는 레닌만큼이나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 인물이다. 그의 노래는 체제의 모순과 아프간 전쟁의 여파로 얼룩진 소련에서 변화를 갈망하던 소련인의 갈망이 투영된 노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변화를 원한다'는 누구도 그 끝을 가늠하지 못했던 '변화'와 격동의 시대, 소련 후기의 상징이다.

또 한 번 격동의 시대를 맞은 러시아인들에게, 이 노래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시간이 지나면서 관습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의미들은 퇴색하지만, 때로는 관습이 탄생할 때 가지고 있었던 의미들을 필연적으로 상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방문객이 없어 전시의 여름은 오히려 더 평화로웠고, 대부분의 러시아인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빅토르 최를 추모하는 지하 록 클럽 '캄차카'에서 "전쟁"이 불렸을 때를 아직 기억한다. "특별 군사작전"이라는 말 대신 "전쟁"이라는 말을 쓰면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나라에서, 지하에 모인 사람들은 "네가 어디에 있든/네가 무엇을 하든/하늘과 땅 사이엔 전쟁이 있다!"는 가사를 목청 높여 불렀다. 반전 성향으로 가득한 키노의 음악 중에서도 더 노골적으로 전쟁을 암시하는 그 노래가 끝난 뒤, 이어진 잠시간의 침묵은 아무리 "특별군사작전"이라는 말을 쓴들 러시아인들 역시 지금이 전시상황임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음을 시사했다. 

다시 한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러시아인들에게, '변화를 원한다' 또한 결코 이전과 완전히 같은 의미를 가질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관습이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하는 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관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몫이다. 이들은 어떤 바람과 열망을 '변화를 원한다'에 투영하고 있었을까? 이들에게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소련 붕괴 이후 맞이한 것 
 
상트페테르부르크 캄차카 클럽의 "전쟁" 공연 모습
 상트페테르부르크 캄차카 클럽의 "전쟁" 공연 모습
ⓒ 이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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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를 부르며 각자 생각한 바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 한 가지 공통된 과제가 있다면, 앞으로 가기 위해, '변화'하기 위해 뒤를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앞으로 가기 위해 여전히 1989년의 노래를 부른다. 변화를 원한다는 노래는 부를 수 있지만 정말로 변화를 요구할 수는 없는 모순처럼, 앞으로 가기 위해 뒤를 다시 보아야 하는 모순은 러시아라는 국가가 가진 모순적 역사의 결과물이다. 

러시아인들은 빅토르 최를 그리워하는 것만큼이나 소련 자체를 그리워한다. 키노가 노래를 부르던 80년대 후반 소련은 변화를 향한 기대로 일렁였고, 85년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언론 자유화) 선언 이후 이러한 기대는 정점을 찍었다. 특히 스탈린 시절에 이루어졌던 대숙청과 탄압, 30년대 이후 여성 정책, 민족 정책 등 소수자 정책의 극적인 퇴보를 비롯해, 소련의 과거사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가능해졌다. 이와 함께 현 체제의 모순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도 가능해졌으며, 개혁을 요구하는 다양한 대안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로의 "변화"가 목전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인들을 맞이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충격요법의 처참한 결과였다. 90년대 러시아인들은 끔찍한 빈곤 속에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사회정치적 혼란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급속한 민영화, 가격자유화와 함께 러시아의 경제는 수렁에 빠졌고, 이와 함께 정치적 혼란도 가중되었다. 

사회주의적 사회안전망이 갑자기 작동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대다수 러시아인은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라 힘겹게 약육강식의 자유주의 질서에 적응해 나가야 했다. 실제로 무한한 '자유'를 누린 것은 사회적 혼란을 틈타 부를 축적한 재벌 세력인 올리가르히들뿐이었다. 결국 러시아인들에게 '변화'는 두려운 이름이 되었고, 자유에 대한 약속은 미심쩍은 것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소련 시절부터 살아온 많은 이들이 억압적이지만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소련 시절'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소련 시절이 안정적이었던 이유는 국가가 단순히 주거, 교육, 근로, 의료 등을 제공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삶의 방향성과 자부심까지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소련이라는 국가의 실상과는 별개로, 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고 있다는 믿음은 소련인들의 자부심이 되었고, 그 자부심은 소련인들을 규합하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이 극적으로 붕괴한 이후, 러시아인들은 방향성을 잃고 좌초하고 있었다. 

기차에서 만난 한 노인은 일, 가족, 사랑 등 삶의 전반에 있어서 소련 시절이 뭐든지 더 나았다면서도, '젊은이들에게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방식이 있을 것이다'고 말하며 젊은 세대가 만들어갈 러시아를 존중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도 그 '새로운 방식'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혁명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을 어떻게 평가하건,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전제군주제를 전복하고 계급, 성별, 인종의 장벽이 없는 평등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보통의 러시아인들과 소련인들의 혁명 정신만은 무엇보다 숭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이후의 소련은 평등 사회에 대한 약속을 처참히 배반했고, 소련이 붕괴한 이후 과거의 열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순진한 꿈이라는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 체제의 모순을 비판하며 자유를 약속했던 90년대의 개혁개방 또한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변화'의 끝에는 자유가 아니라 새로운 계급에 의해 지배되는 또 다른 권위주의 사회가 있었다. 

평등에 대한 약속도 자유에 대한 약속도 이제는 잊어버려야만 하는 무엇이라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어느 책의 제목처럼 "낡은 것은 가고,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인들의 마음속에 생긴 가치와 방향성의 공백을 비집고 솟아난 것은 가장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무언가였다. 

러시아에서 당신은 혁명을 얼마든지 기억해도 된다. 러시아에서 당신은 소련을 얼마든지 추억해도 된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반동적이고 교묘한 형태로, 현재의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형태로만 가능할 것이다.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태그:#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 , #빅토르 최,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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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이름으로 읽고 씁니다. 남성적 추상화가 아닌 여성의 뼈와 살에서 나온 지식을 추구합니다. 사회학, 심리학 전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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