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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의 방 근처까지 놀러온 아주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의 아름다운 자태
 무소유의 방 근처까지 놀러온 아주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의 아름다운 자태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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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촉촉하게 내린다. 따-닥 따다-닥 탁, 탁! 부드럽지만 강렬하다. 비의 농도와 채도와 밀도가 깊다. 도심 속 공기를 휘젓는 어수선한 찰랑거림이 절대 아니다. 깊고 충만하다. 아마도 가을을 성큼 재촉하는 것일지도.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열대야로 잠을 설치고 온몸에 열꽃이 피고 불이 붙는 줄 알았는데.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꿈결 같은 세상에 온 것만 같다. 비가 오는 날의 오지마을 시골 풍경은 그야말로 천국 그 자체이다.

메말랐던 온 대지가 수줍은 포효로 울부짖는다. 어린 청개구리들은 어느새 논과 밭을 지나 황토로 뒤덮인 작은 나의 오두막 데크 정원까지 올라왔다. 뒷산 풀잎들은 남몰래 사랑을 나누고 환희의 눈물을 흘린다.

소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대추나무는 담쟁이 넝쿨로 뒤엉켜 비의 향연 속으로 빠져든다. 부엌 창문 사이로 살포시 얼굴을 내민 여름 코스모스는 바람에 나풀거리며 사랑의 손짓을 건넨다.

아직 열매를 채 맺지 못한 가을 토마토와 포도 줄기는 시원한 빗줄기 사이로 열심히 새싹들을 길어 올린다. 고즈넉한 산사의 황혼의 물안개만이 홀로 적막을 즐기고 짝 잃은 백로가 고독을 다독인다. 아무 흔적도 없는 고요한 오솔길은 나와 비가 하나 되어, 나-비의 오붓한 데이트를 즐긴다.

거실 창문을 활짝 열어 저 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북녘땅에서 피어오르는 서늘한 애틋함의 기운을 맞이한다. 아 저기도 나의 형제들이 이 아름다운 비와 외로움을 품고 있겠구나. 아릿한 비의 침묵! 
강화도 교동도 평화의 섬에 마련한 무소유의 방, 낭만 하우스
 강화도 교동도 평화의 섬에 마련한 무소유의 방, 낭만 하우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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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강화도 교동도 평화의 섬 봉소리 오지마을, 야트막한 산을 끼고 아담한 황토방을 지어 아무도 찾지 않는 무소유 아지트를 만들었다. 일명 '무소유의 방'. 아무도 올 수 없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오직 나만의 은신처이다. 하늘도 대지도 자연도 반겨주는 오직 나만의 사랑 샘이다.

15년 전이었을까.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연봉이 많았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무작정 길거리에 나앉았다. 무작정 시인이 되고 싶었다. 가난과 열정적으로 싸우고 고독과 치열하게 다투는 바보 시인. 이미 속세에 찌들어 버린 나는 사람도 싫고 돈도 싫고 세상도 싫었다.

부모님도 이미 따듯한 남쪽 하늘로 회향하셨기에 딱히 걸릴 것도 없었다. 딱 세상에 홀로 남아 거친 파도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한 시인의 오롯한 외길인생이었다.

책을 미친 듯이 씹어 먹었다. 한 권 두 권 백 권 그리고 천 권에 이르는 양까지. 그 시간만 약 2년이 걸린 듯. 물론 그동안 모아놓은 퇴직금은 모두 탕진했다. 자유로운 영혼의 걸뱅이가 되었다.

스스로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한 후 산속으로 유배 아닌 유배형을 내렸다. 아기가 된 모습으로 처음부터 나를 찾고 싶었다. 아무 할 일 없이 그저 산책을 하고 명상을 하고 책을 읽고 기도를 하고 묵언수행에 입문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스스로 시인의 품새를 갖추었다 싶을 때 본격적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필로 시작해 단편소설, 동화, 정치평론 그리고 드디어 시의 세계로 영접했다. 그렇게 홀로 끄적거린 책만 벌써 아홉권에 이르렀으니.

글을 쓰는 작가가 되기 위해 심연의 강을 몇 번 건넜는지 모를 일이다. 수없이 비판의 강물에 휩쓸리고 오만과 편견의 늪에 빠졌다. 그럴수록 한 번 들어간 아집의 수렁은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척, 체, 꼴로 쓰러지고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난타를 당했다.

그제야 시인이 된다는 꿈은 단지 꿈에 불과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자의 반 타의 반 다시 사회로 복귀했다. 대한민국 국회 정책보좌진으로, 인천광역시의회 정책보좌관으로, 그리고 지금은 운 좋게 소박한 업을 일구며 다시 지긋지긋한 도시 촌놈의 삶을 연명하고 있다. 
도심의 거친 월세집은 열대야로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나만의 시골 오지마을은 벌써 가을의 옷매무새를 만지작 만지작....
 도심의 거친 월세집은 열대야로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나만의 시골 오지마을은 벌써 가을의 옷매무새를 만지작 만지작....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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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0년 만에 사고를 쳤다. 제대로 시원하게 한 방을 갈겼다. 그동안 온몸을 짓이기며 쌓아온 전 재산 1억 원을 탕진하여 시골 황토집을 계약했다. 물론 전세 더부살이다. 이미 잃어버렸던 시인의 세포들이 뇌혈관을 다시 비집고 들어왔다. 꼰대의 비참함으로 나이가 들고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온전히 무소유의 삶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근 50여년, 삭막하고 황폐한 도시에 살면서 시골살이는 영원한 로망이었다. 그간 아프기도 많이 아팠고 최근엔 죽을 고비도 넘겼다. 더이상 이렇게 살다간 제 명에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운명이었을까.

친구들은 항상 나보고 논밭 한 가운에 집을 짓고 살라는 훈계를 일삼았다. 이유인즉 도시 소음과 사람 소음에 매번 시달렸기 때문이다. 집을 옮긴 것만 해도 벌써 10번이 넘는다. 많은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청력도 예민했고 신경도 예민했다. 공황장애, 분노조절장애, 섭식장애 등 제대로 된 신체 기관이 한 개도 없었다. 대장도 30센티 잘라냈다. 식욕도 애욕도 없어졌다.

그렇게 거친 세상을 돌고 돌아 강화도 교동 산속 오지마을에 정착한 자연과의 더부살이는 이제 막 시작의 단추를 풀었다. 정말 꿈속에서 마냥 그리워하던 아름다움 그 자체의 낭만 하우스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나에게 이런 꿈 같은 선물이 주어진다는 것이 정말 실감 나지 않는다. 물론 이제 또 다시 무소유의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황토방을 둘러싼 야트막한 산주변으로 새들의 사랑소리가 가득가득
 황토방을 둘러싼 야트막한 산주변으로 새들의 사랑소리가 가득가득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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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주와 이번 주 벌써 두 번 씩 무소유의 집을 오갔다. 적응기다. 이제 매 주말 강화대교를 지나 교동대교를 건너 해병대 군인 아저씨 검문을 받으며 이곳 고독의 성지로 평화롭게 입성할 것이다. 주위엔 온통 산과 강, 논과 밭만 있을 뿐. 사람의 흔적은 나밖에 없는 아련한 그곳.

다시 시인을 꿈꾸는 순수한 삶의 세상을 노래해야겠다. 황토의 기운으로, 자연의 기운으로, 고독의 기운으로 다시 새로운 평화의 삶을 노래해야겠다.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비가 다시 추적추적 내린다. 보슬보슬 봄비처럼 말이다. 거실 창문을 열어 놓아 비도 들이치고 얼굴을 툭툭 때리는 비의 다독임에 지긋이 미소를 지어본다. 아 정말 이게 얼마 만에 누리는 행복의 시그널인가. 정말 행복이란 단어는 다시는 내 심장에 들어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어린 개구리들의 징징거리는 소리가 정겹다. 들꽃을 뛰어노는 풀벌레들의 아장아장 발걸음도 경쾌하다. 단지 자꾸 낸 손 등과 온몸을 간지럽히는 작은 거미들이 무섭고 성가실 뿐이다. 
집 안에서 어슴푸레 보이는 안개자욱한 북녁 땅의 그리움 그리움 그리움
 집 안에서 어슴푸레 보이는 안개자욱한 북녁 땅의 그리움 그리움 그리움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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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나도 어엿한 시골 사람으로 반듯한 교동 주민으로 제대로 자연과 열애할 것이다. 잡초도 뽑고 가시에 찔리고 벌레와의 전쟁도 선포하고 모기와 제대로 한 판 붙을 각오가 되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시골에 오니까 잠시 쉴 틈도 없고 잘 틈도 주지 않는다. 시간날 때마다 청소하고 주변 정원과 야산을 돌보느라 피, 땀, 눈물까지 혈액을 타고 쏟아져 내린다. 아 시골에 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비를 맞으러 다시 논두렁 밭두렁 사이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다. 첨벙첨벙 운동화가 다 젖고 흙탕물이 튀어도 좋다. 비릿한 비의 향기도 참 좋다. 인근 산책로를 걸으며 새들이 남기고 간 사랑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찾아 헤멘다. 이제 비로소 잃어버렸던 나만의 파랑새를 찾은 듯 하다. 더 느리게 더 불편하게 더 고독하게 시골살이의 삶의 향기에 푹 젖으려 한다.

태그:#강화도, #교동도, #시골살이, #평화의 섬, #대룡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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