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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에서 국토간척사업을 명분으로 자행된 민간인 강제동원 피해를 입은 고 윤기숙씨가 지난 25일 사망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국토간척사업을 명분으로 자행된 민간인 강제동원 피해를 입은 고 윤기숙씨가 지난 25일 사망했다.
ⓒ 조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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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6일 오후, 충남 서산의 한 장례식장. 8명 남짓한 문상객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수어였다. 손과 손이 부딪히는 소리가 한산한 빈소를 채웠다. 고 윤기숙씨(88)의 유일한 혈육인 신인환(56)씨의 손님들이었다. 윤씨는 박정희 정권의 국토 간척사업 강제동원 피해자로,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문을 발급받기 하루 전 사망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맞는 것을 봤다. 나는 8살이었고, 무서웠다. 집이 소란스러웠다. 아버지 발이 비틀려 있었고 배에 큰 멍이 들어 있었다."

'맞는 것을 봤다'고 말하는 신씨의 손뼉이 빠르게 부딪혔다. 눈엔 눈물이 고였다. 그는 50여년 전 아버지 고 신광철씨가 개척단 간부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던 날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맞은 이유는 '말대꾸' 때문이었다. "간부 집에 구들을 놓다가 좀 실수가 있으셨는데, 문책을 하니 말대꾸 했다고..." 폭행당한 날로부터 얼마 안 가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서산개척단. 신씨의 부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보건사회부(보건복지부)를 통해 1961년 만든 '강제 노역 마을'에서 만났다. 폐염전을 간척해 국토로 만들겠다는 계획에 동원된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이다.

역전에 홀로 앉아 있는 어린 아이, 고아원에 있던 어린이들, 주먹을 다투다가 파출소로 잡혀 온 동네 청년... 단원 대부분이 자의와 상관없이 끌려오거나 납치됐다. 남성은 바다를 메우는 일을 했고, 여성은 남성 단원과 강제 결혼해 가정을 일구도록 강요받았다.

신씨의 어머니 고 윤기숙씨는 1963년 9월, 125쌍 합동결혼식에서 처음 본 개척단 남성과 강제 결혼했다. 서울역에서 '수예 학원에 보내주겠다'는 사람들의 꼬임에 납치된 마을이 이 곳 서산시 인지면 모월3리, 개척단 마을이었다. 개척단 간부들은 윤씨에게 결혼만 하면 "집에 보내주마" 했다. 거짓말이었다. 국가는 언론을 동원해 윤씨처럼 강제결혼에 동원된 여성을 '재생 여성'으로 낙인찍었다.

어머니
 
서산개척단 윤기숙씨
 서산개척단 윤기숙씨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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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은 평생 부끄러움이 됐다. 윤씨는 생전 "부끄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5년 전 <오마이뉴스> 취재에 응했을 때도 "마을에서 제일 낡은 집"이라며 자신의 집을 부끄러워했고, 10평 남짓한 집에 함께 살던 개척단원 12명 네 가구의 밥을 지어내야 했음에도 자기 자식은 제대로 못 먹여 키운 일을 부끄러워했다. 아들이 경기도 수원에서 농아학교를 다닐 적, 서산을 잠시 떠나 아들의 학교 기숙사에서 밥을 지으며 9년간 뒷바라지했던 그였다.

"다른 데 가서 말하지 마라. 창피하다."

윤기숙씨와 그의 아들을 오랜 시간 지켜 본 수어통역사 김동미씨도 같은 기억을 상기했다. 김씨는 "집이 낡아 수리 지원 때문에 방문을 시작했는데, 할머니는 살아온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아니었다"면서 "당신이 피해자임에도 늘 부끄럽게 생각하셨다"고 말했다.

윤씨는 지난 5월 25일 사망할 때까지 1년 가까이 요양원에 누워 있었다. 요양원에 들어가기 직전, 그는 이웃 간 시비로 벌어진 갈등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주변 도움을 받아 경찰도 불렀지만 이내 포기했다. 소용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든 일이 다 높은 사람들 편이다. 아무리 말해봤자 억울하기만 하다." 김동미 통역사는 당시 윤 할머니가 쏟아낸 말들을 그대로 전해줬다. 스트레스는 대상포진으로 이어졌고, 집에 있겠다며 입원을 미루다 병을 키웠다. 결국 숨을 거두는 날까지 걷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아들
 
고 윤기숙씨의 아들 신인환씨.
 고 윤기숙씨의 아들 신인환씨.
ⓒ 조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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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의 외아들인 신인환씨는 개척단 마을에서 첫 번째로 태어난 아기였다. "내가 돈이 없응게 (아들이) 배가 아프다고 해싸서 마을에 침놓는 데 갔더니, 침을 잘못 맞았다 하대유. 내가 (내 발로) 갔으니 뭐라고 할 수가 없잖아유." 윤씨는 5년 전 인터뷰에서 아들이 언어장애를 갖게 된 것도 자신의 탓이라 말했다. 

신씨와 같은 개척단 2세들은 국가의 '재생마을' 낙인으로 인해 학교와 다른 마을에선 '개척단 사는 애들'로 2차 낙인, 왕따와 소외를 당해온 또 다른 피해자들이었다. 언론에선 이들을 정부의 재생 사업 성공 결과물로 홍보했다. 

"새로 태어난 어린이 32명 가운데는 사내아이가 29명이나 되어 '개척촌의 물이 좋다' '앞날의 좋은 징조'라는 등 좋아서 야단들이다." - <동아일보> 1964년 6월 15일 '피땀흘려 살쪄간다 보람찬 갱생' 중

신씨는 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도 수원에서 공장 일을 하다 어머니가 있는 서산으로 돌아왔다. 개척단원들이 우글거리던 고향집은 창문살 하나 수리된 곳 없이 그대로였다. 인터뷰 이후 5년 만에 다시 찾은 윤 할머니의 집도 '너무 초라해서 부끄럽다'고 했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지자체와 복지관 등에서 창문 수리나 낡은 전기선 정리 등의 지원들은 받았지만, 할머니가 바랐던 '제대로 된 집'은 생전에 얻지 못했다. 신씨는 "어머니가 20대에 이 마을에 오셔서 88세에 돌아가셨다. 일궈 오신 것을 (얻지 못했다는) 한이 조금이라도 인정된다면 좋겠다"고 바랐다.

가해자 대한민국

그러나 국가는 여전히 윤씨와 같은 피해자들에게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서산개척단 사건 공론화에 앞장서 온 정영철 진상규명위원장은 "300만 평 넘는 땅을 개간해놨지만, 정부는 삽 한 자루 대준 일이 없다"면서 "그렇게 일한 걸 홀랑 빼앗아 국가땅이라고 했고, 그걸 이제 정부가 알았다. 정부가 '잘못했다'는 사과 한 마디를 하고, 보상을 해야 10대 청춘 다 내버린 한이 풀릴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국가가 사죄하라'는 권고가 지난 5월 11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통해 발표됐다. 피해 발생 꼬박 60년 만이다. 윤씨 부부와 같은 피해자들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을 인정하고, 국가가 직접 사과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당시 국가가 단원들에게 '무상분배'를 약속했다가 이마저도 폐기한 강제노역 토지에 대한 배상도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방식은 국회나 정부 입법을 통한 특별법 제정이나, 정부 차원의 보상이다.

국가기관의 약속은 망자에게 닿지 않았다.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 결정통지문을 개척단 피해자들에게 발송하기 하루 전에, 윤씨는 서산의 한 요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갇힌 공간에서 투병 중이던 윤씨는 규명 결정 소식마저도 전해 듣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보상이 나오면 집을 지을라고유. 엄청 오래됐어유. 겨울에는 춥고. 너무 옛날 집이라... 그렇게 고생했는데 제대로 된 집 하나 없는 게 한스러워유. 깨끗하게 몸 뉠 곳. 그 거유."
 

강제 결혼으로 만난 남편을 폭력으로 여의고 수십 명의 개척단원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밥을 해온 윤씨는 생전 지난한 세월을 살아온 집터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보상을 받으면 그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짓고 싶다고 했다. 그 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고 윤기숙씨가 살던 집. 개척단 네가구와 함께 살던 낡은 집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고 윤기숙씨가 살던 집. 개척단 네가구와 함께 살던 낡은 집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 조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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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서산개척단, #진실화해위, #인권, #공권력,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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