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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의 후 15년이 지난 오늘날, 여전히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지 않았다. 그 사이 차별과 혐오선동을 이용하거나 방치해 온 정치는 한국사회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국회 앞 평등텐트촌 농성과 미류(인권운동사랑방), 종걸(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두 인권활동가의 단식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은 차별금지법을 당론을 채택하지 않고, 여러 핑계를 앞세워 평등을 미루고 있다.

차별금지법의 4월 제정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세력의 폭언을 제일 앞에서 맞아야만 하는 성소수자들이 더불어민주당의 책임과 역할을 요구하기 위해 4월 21일부터 법안 공포가 가능한 5월 2일까지 매일 한명씩 공개적으로 편지를 적어 보낸다.[기자말]
나영정
 나영정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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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 박광온 법제사법위원장, 그리고 우리 지역구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의원께.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백련시장 근처에 사는 45세 나영정이라고 합니다. 우리 국회의원님들, '퀴어'라는 말 아시려나요. 저는 레즈비언이나 동성애자라는 말보다 퀴어라는 좀더 포괄적인 말이 제 마음에 더 편해서 이렇게 소개해볼게요.

사실 저는 전업 인권활동가라서 제 정체성은 성정체성보다 활동가 정체성이 더 강렬하고 중요합니다. 저는 고유성을 가진 개인이고, 제 나름의 방식으로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싶은 사람이라서 평소에는 성정체성의 언어가 저를 많이 설명해주지는 못해요. 45세쯤 되니까 제가 그동안 무엇을 하며, 누구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지향하는지가 저를 이미 설명해주는 것 같고요. 사실 대부분 비성소수자들도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오늘은 성소수자의 한 사람으로서 제 이름으로 이렇게 공개 편지를 씁니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 성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저의 평온한 일상을 파괴하거든요. 그래서 그저 저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름 안에 크나큰 슬픔과 분노가 담겨있거든요. 이건 참 부당한 일이라서, 누구도 자신을 그저 진실하게 설명하는 이름 때문에 모욕을 받거나 차별을 받는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성소수자들은 수십 년간 이런 부당한 일에 맞서서 싸워왔어요. 이 싸움은 누군가의 권리를 빼앗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못살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일이 아니에요. 

성소수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과,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이에요.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펴보고,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계속 가늠해 나가면서 가능한한 인정받고 지지받는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죠. 물론 가족과 친구들 중에는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 이름이 자랑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걱정하고, 받아들이길 거부하기도 해요. 대개는 서로의 노력과 시간이 해결해주지만, 종교와 정치가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을 때 정말 갈등과 불행이 시작되죠.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인지 아세요? 성소수자가 여러가지 이유로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는 점입니다. 혈연 가족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그의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세상을 떠날 때조차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성소수자가 맺어온 파트너 관계가 혈연가족들이, 제도가 인정하지 않아서 장례절차와 그 이후의 관계에서 배제되고요. 존재가 지워지거나 왜곡되는 것, 남겨진 사람들은 한 사람이 그렇게 차별받으며 떠난 빈자리를 보면서 자신이 차별받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각인합니다. 이름이, 신분이 차별받는 다는 건 이런 거예요. 어떤 존재를 떠나보낼 때 드러나는 모습은 정확히 그 사람의 생애를 반영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2022. 3. 25. 성소수자 추모의 공간에서
 2022. 3. 25. 성소수자 추모의 공간에서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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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님들은 어떤 정치를 하고 싶으세요? 서민(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을 위한 정치, 상생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시는데 이런 문제를 내버려두는 건 부당한 일입니다. 모두가 동등한 시민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일에 고통을 받도록 내버려두거나 심지어 조장하는 일이,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이 고통을 방치하고 조장했다는 저의 주장이 과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차별금지법은 무너진 공론장을 다시 세우는 역할

저는 2007년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대로 논의하지도 못한 채 '동성애를 조장하는 법'이라는 일부 권세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주장에 정부는 화급하게 공론장을 닫아버렸죠. 그때 많은 성소수자들은 상처입었고 차별적인 한국사회를 온몸으로 체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후로 꾸준히 사회를 일구고 서로를 돌보면서 살아왔고, 왜 차별금지법이 있는 나라에서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좀더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지를 체감해왔습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동성애 반대를 표현하지 못한다, 동성애를 조장한다'와 같이 2007년 이후로 나아진 바가 없는데,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미 여론조사에서도 증명되었죠. 

한편으로는 개신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한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는 듯합니다. 전통적인 소수자 집단에 속하지 않는데도 자신이 차별을 받는다고 느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살아가는 것이 팍팍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일 텐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짚어지지 않고 집단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어서 걱정이 큽니다.

숫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이런 심정에 대해서 우리 국회의원님들이 신경을 쓰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차별문제에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사람으로써 감히 제가 한말씀 드려도 될까요?

개신교인들에게, 남성들에게 보상을 주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차별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해요. 구조적인 차별과 불평등을 그대로 두고 갈등을 조장할 뿐이죠. 성소수자들이 존중과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특권이나 보상을 달라는게 아니에요. 그저 동등한 시민으로 공론장에서 각자가 처한 차별이 무엇인지 꺼내놓고 해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세요. 차별금지법이 하려는 것이 정확히 그런 것입니다. 

나이, 성별, 장애, 국적, 인종,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등을 이유로 직장, 학교, 공공기관 등에서 배제되어버리면 공론장에 나올 수가 없잖습니까. 누구도 어떤 이유로 불합리한 차별을 받지 않는다, 누구도 부당한 모욕과 혐오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된 이후에 한국사회가 헤쳐나가야 하는 기후위기 문제, 일자리 문제, 부동산 문제, 가족 생활의 문제 등에 대해서 함께 해결해나가자는 것입니다. 있는 존재를 없다고 하지 말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함께 머리를 맞대자는 것입니다. 

저는 시민들이 정치인들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갈등을 조장하지 않고, 표계산에 몰두하며 누군가를 희생양 삼지 않고, 절박한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부정의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귀기울이고,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는 노력을 하길 바라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 더 공평한 무언가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신다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는 요구가 가장 당장 할 수 있는,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제가 이렇게 네 분에게 고심을 거듭하며 편지를 쓰면서도 답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참 기운 빠지는 일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구체적인 얼굴로 편지를 쓰는데 답장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편지를 잘 받고 있다, 편지에 당부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 응답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마지막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답장하시리라 기대합니다. 답장을 기다립니다.  

2022. 4. 25. 나영정 드림
 
나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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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차별금지법 4월 제정을 요구하며, 매일 성소수자들이 공개 편지를 보냅니다.


태그:#차별금지법, #평등법, #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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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차별의 예방과 시정에 관한 내용을 담은 법입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 행동하는 연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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