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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22일 <동아일보>는 김승훈 당시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축소·은폐했다'고 밝힌 내용을 보도했다.
 1987년 5월 22일 <동아일보>는 김승훈 당시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축소·은폐했다"고 밝힌 내용을 보도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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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서 성고문사건이 군부독재의 '위기경보'였다면 1987년 초에 발생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최고장'이었다. 집권 7년 째가 되는 전두환 일당은 갈수록 포악성이 더해가고 저항하는 민주세력의 응징력도 이에 비례하였다. 이 해의 주요 사건을 보자.  

1월 14일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3월 3일 -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평화대행진'이 경찰 저지로 무산되자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가두시위
4월 13일 - 전두환, 특별담화 통해 개헌논의 유보, 현행 헌법으로 정부 이양 발표
5월  6일 - 서울 지역 23개 대학 대표들이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결성
5월 18일 -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성명서 발표
5월 27일 -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 
6월 10일 - 국민운동본부, 전국 24개 도시에서 6.10 국민대회 동시 개최
6월 18일 - 국민운동본부, 전국에서 최루탄 추방대회 개최
6월 26일 - 국민운동본부,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개최 
6월 29일 - 민정당 대표 노태우, 6.29선언
7월  9일 - 이한열 군 영결식
8월 17일 - 현대그룹 6개 노조 노동자 3만여 명이 회사 측의 휴업조치에 반발해 가두시위
8월 22일 -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 파편에 맞아 사망
9월 17일 -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10월 12일 - 국회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통과
12월 16일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당선
12월 18일 - 경찰, 부재자 투표에 부정이 있었다며 서울 구로구청에 농성 중인 시민ㆍ학생 1000여 명 강제 해산

1987년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악의 세력과 정의를 가치로 삼는 양심세력이 정면으로  맞붙는 해가 되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이 시기 양심 세력의 구심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힘이 없고 의지할 데가 없고, 진실을 제대로 밝혀줄 곳으로 사제단을 찾게 되었다. 그만큼 할 일이 많아졌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실에서 조사받던 박종철 군이 물고문 등으로 숨졌다. 치안본부 박처원 대공담당 5차장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망언을 진상이라고 발표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월 24일 '고문살인의 종식을 위한 우리의 선언'이란 〈성명서〉에서 '살인정권'의 만행을 고발했다.

"1.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2. 고문 사건의 책임자는 엄단되고 고문수사기관은 해체되어야 합니다. 3. 전두환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마음을 비우고 퇴진해야 합니다. 4. 이 땅은 제2의 아르헨티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군부는 철권통치로 민중을 억압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군사정권의 붕괴는 힘이 아닌 양심과 진실에 의해서였다. (박군 고문치사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는 정의구현사제단)
▲ 신군부는 철권통치로 민중을 억압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군사정권의 붕괴는 힘이 아닌 양심과 진실에 의해서였다. (박군 고문치사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는 정의구현사제단) 신군부는 철권통치로 민중을 억압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군사정권의 붕괴는 힘이 아닌 양심과 진실에 의해서였다. (박군 고문치사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는 정의구현사제단)
ⓒ 정의구현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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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전두환 퇴진' 까지 제기한 이 〈성명서〉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스물한 살의 꽃다운 나이에 한줌 재가 되어 강에 뿌려진 박종철 군의 죽음은, 어느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이 어두운 시대를 외면한 우리 모두의 양심의 죽음이었습니다. 모두 가정에서, 일터에서, 거리에서 바쁘게 일상의 삶을 누리던 대낮에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밀폐된 취조실에서 두 팔이 뒤틀린 채 욕조에 머리를 처박혀 몸부림치며 죽어간 박종철군의 죽음은 진실을 증언하기를 외면한 우리 모두의 비겁함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박종철군의 죽음을 두고 잔인하고 비열한 살인자들의 더러운 손을 단죄하기에 앞서 우리들의 비겁함과 무기력함이 박종철군의 죽음을 방조하였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흐르는 강물에 한 줌의 재로 날려보내며 "철아, 잘 가그레이…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데이" 하던 어버이의 쓰라린 마지막 고별사처럼, 이 시대의 의로운 한 젊은이의 죽음 앞에 우리는 오직 회한에 찬 눈물밖에 바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의 제단 위에 바쳐진 의로운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들끓는 분노와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무거운 마음으로 고문이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을 밝히고자 합니다. (주석 1)

사제단은 2월 7일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국민추도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당국의 방해로 무산되자 이날 명동성당을 비롯한 각 교구 산하 10여 개 성당에서 박군의 나이인 스물한 번의 타종과 함께 1분여 동안 추모 묵념을 올린 후 추모미사로 봉헌하고 교구 별로 추도 미사를 올렸다.

각 교구에서는 경찰의 봉쇄 속에서도 추모미사가 진행되고, 박군의 고향인 부산 교구에서는 당초 계획인 중구 신창동 대각사의 진입이 차단되면서 남포동 국제시장 입구와 부산극장 앞 등에서 노상추도회로 개최되었다. 대학생을 고문으로 죽이고 추도식마저 경찰력으로 봉쇄하는 야만성이 공공연하게 저질러지고 있었다. 


주석
1> <암흑 속의 횃불(8)>, 112~11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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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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