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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에는 시민들의 삶에서 묻어나오는 희로애락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2021년 신축년을 맞아 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기자말]
1978년 2월, 국가무형문화재 제61호로 은율탈춤이 지정 받았다. 은율탈춤은 이때부터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전승됐다. 사진은 은율탈춤중 ?과장 중 원숭이새맥시 장면 (사진 은율탈춤보존회 제공)
 1978년 2월, 국가무형문화재 제61호로 은율탈춤이 지정 받았다. 은율탈춤은 이때부터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전승됐다. 사진은 은율탈춤중 ?과장 중 원숭이새맥시 장면 (사진 은율탈춤보존회 제공)
ⓒ 윤중강 은율탈춤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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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인천은 가뭄이 극심했다. 인천의 모든 승려들은 단합하여, 수봉산에 올라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로 했다. 1940년 6월 21일, 스님들이 순번을 정해 번갈아가며 밤낮으로 기우제를 올렸다.

주안정(朱安町) 수봉산(水峰山)에 인천사람이 거의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천공립상업학교(훗날 인천고등학교) 150명과 인천상업전수학교(훗날 동산고등학교) 260명 등 전교생이 전원 참가했다. 인천의 모든 관공서 사람들도 빠지지 않았고, 인천지역의 유지들도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탰다. 수봉산이 생긴 이래, 이토록 많은 인천사람이 모인 건 전무후무한 일이다.

1940년 6월 24일, 인천 전역에 이른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다. 꼬박 사흘간 밤낮이 지난 후, 나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 단비가 내렸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인천사람들은 천금감우(千金甘雨)라고 하며 억만금같이 귀한 단비라고 좋아했고, 강구연월(康衢煙月)의 인천이라 했다. 이는 '거리마다 아름다운 연기가 피어나는 평화로운 곳'이란 뜻의 복받은 도시라는 뜻이다.

서울에 남산이 있다면, 인천엔 수봉산이 있다. 지금의 '미추홀구 수봉공원'은 인천사람에겐 영험한 산이었다. 1938년엔 수봉산에 경보대(警報臺)가 생겼다. 인천이 개항 후, 인천 용봉산(만국공원)에서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가 인근의 일본인에게 특히 도움을 주었다면, 이제 수봉산의 '오정사이렌'은 주안(미추홀구)에 사는 조선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미추홀구 수봉공원'은 인천사람에겐 영험한 산이었다. 1975년부터 공원화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해, 1977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런 수봉공원에 '은율탈춤 전수관'이 생긴 건 1983년이다.
 "미추홀구 수봉공원"은 인천사람에겐 영험한 산이었다. 1975년부터 공원화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해, 1977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런 수봉공원에 "은율탈춤 전수관"이 생긴 건 1983년이다.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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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봉산은 언제 공원이 된 건걸까? 주안 네거리에 시민회관이 준공(1974년)되면서, 수봉산의 공원화 얘기가 오갔다. 1975년부터 공원화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해, 1977년부터 본격화됐다. 이런 수봉공원에 '은율탈춤 전수관'이 생긴 건 1983년이다.

1978년 2월, 국가무형문화재 제61호로 은율탈춤이 지정 받았다. 은율탈춤은 이때부터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전승됐다. 봉산탈춤(1967년 지정), 강령탈춤(1970년 지정)보다 뒤늦게 지정을 받았지만, 해서(海西) 가면극의 삼두마차의 하나로서, 은율탈춤은 점차 위상을 높여갔다.

은율탈춤의 최초의 인간문화재는 장용수(1903~1997, 영감, 가면제작)와 김춘신(상좌, 의상제작)이다. '장용수가 없었다면, 은율탈춤은 없었다'는 말이 가능할 정도로, 그는 은율탈춤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노래, 춤, 반주, 탈 제작... 두루 능통​한 장용수 선생
 
은율탈춤의 최초의 인간문화재는 장용수(1903 ~1997, 영감, 가면제작)와 김춘신(상좌, 의상제작)이다. '장용수가 없었다면, 은율탈춤을 없었다'는 말이 가능할 정도로, 그는 은율탈춤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사진 은율탈춤보존회 제공)
 은율탈춤의 최초의 인간문화재는 장용수(1903 ~1997, 영감, 가면제작)와 김춘신(상좌, 의상제작)이다. "장용수가 없었다면, 은율탈춤을 없었다"는 말이 가능할 정도로, 그는 은율탈춤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사진 은율탈춤보존회 제공)
ⓒ 은율탈춤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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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율탈춤 전수발표공연. 1983년 7월 23일 인천시민회관. 인간문화재 장용수, 김춘신, 김영택이 악사를 맡으며 탈춤을 지도했다. 당시 은율탈춤보존회 장용수 회장은 이 공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마치 자신의 손녀와 손자처럼 아꼈다.
 은율탈춤 전수발표공연. 1983년 7월 23일 인천시민회관. 인간문화재 장용수, 김춘신, 김영택이 악사를 맡으며 탈춤을 지도했다. 당시 은율탈춤보존회 장용수 회장은 이 공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마치 자신의 손녀와 손자처럼 아꼈다.
ⓒ 윤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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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수 선생이 국악계에 알려진 건, 1970년대초다. 1972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황해도민속예술보존회(黃海道民俗藝術保存會)의 제1회 발표회 때 장용수 선생이 출연했다.

김창구 국립극장장 시절인 1975년, '명창대향연 – 경서도편'이란 이름으로, 서도민요와 경기민요의 명창들이 무대에 올랐다. 서도소리의 김정연과 오복녀, 선소리산타령의 정득만과 이창배, 경기민요로 스타의 반열에 오른 안비취, 이은주, 묵계월, 감옥심과 함께, 장용수가 무대에 올랐다. 그의 소리는 달랐다. 그의 노래는 통속민요가 아니라 향토민요(토속민요) 본연의 땅내음과 땀내음이 배어있었다.

1977년 10월 26일, 제1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의 마지막 날(수원 공설운동장). 황해도팀은 '황해도민요–감내기, 난봉가'로 참여했다. 이때 유난히 주목받은 한 사람, 장용수 선생이 '개인 연기상'을 받았다. 장용수 선생은 노래, 춤, 반주, 탈제작에 두루 능통했다.
 
장용수 선생이 손자 손녀처럼 아낀 제자들. 은율탈춤보존회 보유자(인간문화재) 이수자, 국비전수장학생, 일반전수자.
 장용수 선생이 손자 손녀처럼 아낀 제자들. 은율탈춤보존회 보유자(인간문화재) 이수자, 국비전수장학생, 일반전수자.
ⓒ 윤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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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율탈춤을 발전시킨 기능보유자 김춘신(1925~2015). 사진 은율탈춤보존회 제공
 은율탈춤을 발전시킨 기능보유자 김춘신(1925~2015). 사진 은율탈춤보존회 제공
ⓒ 은율탈춤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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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7월 23일, 인천시민회관에서는 '은율탈춤 전수발표공연'이 있었다. 장용수와 김춘신에 이어, 김영택(피리, 장고)이 악사보유자로 추가 지정(1982년 6월) 되면서, 은율탈춤의 전승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세 분의 인간문화재와 젊은 탈꾼들이 합심한 무대였다.

은율탈춤보존회 초대회장 장용수는 젊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은율탈춤 공연은 마치 '본인의 손주를 보는 듯한 뿌듯함'이라고 인사말을 통해 쓴 바 있다. 이때 은율탈춤 공연에서의 '손주 같은' 젊은이는 바로 차부회(사자, 노승), 안선균(목중, 미얄할미), 윤순자(상좌, 소무), 박일홍(취발이)으로, 모두 인천의 전통예술계의 중견으로 성장했다. 이 무대에 출연한 최정학(목중, 원숭이)은 이후 향토사학자로서 인천을 알리는 일에 치중했다.

은율탈춤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은 곧 인천에서 은율탈춤이 뿌리를 내렸다는 것인데, 40여년이 지난 지금 앞의 사람들은 이제 은율탈춤의 '손주같은' 신세대를 길러내는 책임을 지고 있다. 모두 장용수 선생의 제자들이다.

장용수 선생은 은율탈춤을 중심으로 해서지방(황해도)의 노래문화와 공연문화를 알리기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었고, 서울과 천안 등지를 돌았다.

그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은 인천이다. 함께 월남한 큰 아들의 사업은 부진했다. 이런 어려운 시절에, 은율탈춤전수관이 수봉공원에 생겼고, 장용수 선생은 늘 거기에 계셨다. 전수관의 한 구석에 있는 수의실의 간이침대가 그의 잠자리였다.
 
제18회 전문민속예술경연대회. 장용수는 황해도대표로 참가해 황해도민요(감내기, 난봉가)를 불렀다. 장용수는 개인 연기상을 받았다.
 제18회 전문민속예술경연대회. 장용수는 황해도대표로 참가해 황해도민요(감내기, 난봉가)를 불렀다. 장용수는 개인 연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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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율탈춤중 과장노승춤 (사진 은율탈춤보존회 제공)
 은율탈춤중 과장노승춤 (사진 은율탈춤보존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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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7월, 민속학자 이보형과 KBS-FM의 홍승철 PD가 수봉공원을 찾았다. 1992년 8월 15일 광복절특집방송 '두고온 땅, 그곳의 토속민요'(구성 심우성, 진행 이보형, 제작 홍승철) 프로그램 취재차 들렸다. 홍승철 피디는 얘기한다. 민요를 취재하는 녹음 중 쉬는 시간에 여흥으로 부르신 장용수 선생의 '수심가'는 국악피디로서 오래도록 활동한 홍승철 PD의 몇 손에 꼽는 노래였다고.

KBS-FM에서 제작한 '북한지역의 토속민요'(21세기 KBS –FM 시리즈 17. 한국의 전통음악)엔 배치기 소리가 담겼다. 황해도 배연신굿에서도 부르는 이 노래는, 황해도 남정네의 노래다. 고기잡이를 떠나려 갈 때나, 만선이 되어서 돌아올 때, 배 위에서 신명나게 부르는 노래다. 음반에선 안승삼, 고초재, 장용수 세 명이 불렀다.

1992년 7월말, 인천 수봉공원에서 장용수 선생을 취재하고 돌아온 홍승철 피디는, 당시 방송작가로 활동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윤 선생님, 저 촌지를 받았어요?"
"아니, 홍 PD가 촌지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인천 수봉공원에 장용수 선생님 취재 간 것 아시잖아요. 취재를 다 끝내고 내려오는데, 장 선생님이 러닝셔츠 차림을 마구 뛰어오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손에 돈 천 원을 쥐여주셨어요."
"그래서 그걸 받으셨어요?"
"한두 차례 거절을 했는데, 완강히 주시는데 어른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고맙습니다' 하면서 받았어요."


1997년 2월 5일, 장용수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그가 세상을 하직한 곳도 바로 전수관이다. 이곳은 그의 집이자, 그의 일터였다. 평생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지 못했으나, 아들같고 손자같고, 딸같고 손녀같은 많은 제자를 길러낸 분이 장용수 선생이다.
 
2003년에 진행된 은율탈춤 공연 포스터
 2003년에 진행된 은율탈춤 공연 포스터
ⓒ 윤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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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더운 여름날, 러닝셔츠 차림의 장용수 선생이 좁은 수의실에서 부채질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내가 그 현장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자신의 노래와 얘기를 담으려고 서울서부터 찾아온 젊은 프로듀서에게, 러닝셔츠 차림으로 뒤따라오면서 배웅해준 선생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인천사람에게, 인천에 터를 잡은 실향민들에게, 장용수 선생은 종가의 큰 어른같은 존재였다. 공원에 가서, 위인의 동상을 만난다. 수봉공원에선, 장용수 선생을 만났으면 좋겠다. 은율탈춤 최초 인간문화재 장용수 흉상이 수봉공원에 세웠으면 한다. 은율탈춤보존회와 인천미추홀구가 의기투합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글·사진 윤중강 문화재위원, 국악평론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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