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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릉역 1번 출구 바닥에 쓰여 있던 글자이다. 김슬옹 원장이 컴퓨터에 띄워 보이고 있다.
 "K&R".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릉역 1번 출구 바닥에 쓰여 있던 글자이다. 김슬옹 원장이 컴퓨터에 띄워 보이고 있다.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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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릉역 1번 출구 바닥에 쓰여 있던 글자다. 이를 보고 이 공간의 용도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용인시 신분당선 동천역, 원주역, 수인선 오목천역 등에도 같은 표기가 적혀 있었다. 'Kiss & Ride(키스 & 라이드)'를 줄여 쓴 말인데, 역에서 사람을 내려주거나 태울 때 잠시 머무는 곳을 의미한다. 다행스럽게도 한글문화연대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환승정차구역' 등의 표기로 바꿔가고 있다.

'어메니티 서천'.

위 문구는 충남 서천군이 한때 전면에 내걸었던 구호이다. 하지만 서천군민 중 어메니티(Amenity)의 뜻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전을 검색했더니, '어떤 지역의 장소, 환경, 기후 따위가 주는 쾌적성. 아름다운 경관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따뜻함을 포함하는 미(美), 감(感), 쾌(快), 청(靑)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결국 이 표현도 국어문화원연합회가 문제를 제기해서 구호를 접었지만, 지금도 서천군의 여러 홍보물에 흔적은 남아 있다. 이렇듯 외국에서 통용되는 어려운 말을 공공기관들이 사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전에도 없는 합성어나 정체불명의 신조어, 국적을 알 수 없는 다국적 혼용어 등을 써서 국민들의 정보 접근권을 원천봉쇄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공공언어 실태] '대한민국' 서울시인가? 
 
우리말 살리기와 관련한 자료들
 우리말 살리기와 관련한 자료들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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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국어문화운동본부가 조사한 '2020년 서울시 공공언어 실태' 결과에 따르면, 부서명, 정책명, 누리집 등에 외국어 남용이 두드러졌다. 국어문화운동본부는 서울시 본청 부서명 중 사업명 기반 부서명 14개, 전문용어 기반 부서명 25개, 그 외 외국어 사용 부서명 15개, 한자어 사용 부서명 1개를 검토가 필요한 부서명으로 선정하고, 대안어를 제시했다. 

애니타운팀→만화마을팀, S-Net 팀→서울형 통신망팀, 클린도로팀→청결도로팀 또는 물분사도로팀, 그린카인프라팀→친환경차지원팀, 빈집Bank기획부→빈집활용 기획부, 디자인 R&D센터→디자인연구개발팀 등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어문화운동본부의 조사 결과, 318개의 홍보물에서 외국어 및 외국 문자는 총 252개로 불필요하게 사용된 외국 문자(알파벳, 한자 포함)는 91개, 외국어는 161개였다. 누리집에서의 외국어 남용은 심각했다. 누리집 메뉴 이름으로는 리플렛 다운로드, 유리 파빌리온, 큐브 입주, 세운 맵, 버스킹, 홍릉바이오브러리, 허브 파트너스, 허브BI소개, 허브Today, 온택트 시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봉제아카이브, 원데이 클래스, 원모어트립, 서울ONE+패스 등 외국어가 많이 사용됐다.

중앙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가 지난해 발표한 '중앙정부의 국어기본법 지킴 실태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간 정부 18개부에서 낸 보도자료 8671건(매년 4월~6월)에서 외국어 남용 총 횟수는 4만 6925건에 달했다. 1개 보도자료 당 평균 5.4회 외국어 남용이 있었던 셈이다.

이 대표가 지적한 어휘에는 웰니스, 해커톤, 크리에이터, 라이브커머스, 얼라이언스, 벙커링, 웨어러블, 밸류체인, 딥러닝, 로보틱스, 케이터링, 패터링, 워라밸, 커뮤니티매핑, 케이무크, 헬프데스크, 렉시블디스플레이 등 생소하거나 전문가들만이 알 수 있는 용어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국립국어원은 2020년 2월 '공공용어 대국민 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일반 국민 1000명과 공무원 10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다. 설문 문항은 2016년에서 2018년까지 중앙행정기관의 보도자료와 정부 업무보고 자료 등에서 추출한 공공용어 140개였다. 이때 일반 국민이 잘 모르겠다고 응답한 용어는 무려 97개였다. 심지어 공무원들도 자신이 잘 모르는 말이라고 응답한 용어가 81개에 달했다. 

[외국어 남용, 왜?] 별반 다를 게 없는 정책, 과대 포장으로 혈세 낭비 
 
국립국어원 전경
 국립국어원 전경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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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외국어 남용 추세가 줄지 않고 오히려 확산되는 것일까? 

국립국어원 김선철 공공언어과장은 성과주의를 꼽았다. 김 과장은 "공무원들이 자기가 내놓은 정책을 멋있게 포장을 하기 위해 불필요한 외국어를 남용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예전의 정책과 내용은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정책명만 바꾸면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급하게 일에 쫓기면서 정책을 내놓으면 언어 표현을 고민할 틈도 없을 것"이라면서 "상대적으로 외국어에 능통한 분들이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데, 외국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는 문화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형 전국 국어문화원연합회 회장(상명대 교수)은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한글은 세계의 모든 언어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표음문자)할 수 있다"면서 "외국에서 도입된 새로운 개념의 말을 우리말로 바꾸는 것도 쉽지 않기에 외국어가 남발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외국어 오남용은 국민들의 안전 및 생명과 직결되기도 한다. 

김 회장은 "심장충격기는 급할 때 바로 꺼내 써야 하는데, 지하철역이나 학교에 '자동제세동기'라는 알 수 없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면서 "한참 뒤에야 심장충격기라는 표현으로 바꿀 수 있었고, 지하철에서 '스크린 도어' 안내 방송을 '안전문이 열립니다'로 고치는 데에도 수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한번 사용하면 빠른 속도로 굳어지기 때문에 나중에 바로잡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공공언어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쉬운 선택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국민의 입장에서는 그 반대일 수 있다"면서 "언어는 사고의 도구이고 소통이 안 되면 사고가 막히는 것인데, 외국어 남발은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불통만이 문제가 아니다. 뒤늦게 쉬운 우리말로 고치려면 혈세를 투입해야 한다. 김 회장은 '어메니티(Amenity) 서천' 구호를 예로 들었다. 그는 "우리가 문제를 제기해서 이 구호를 접었는데, 이 표현이 적힌 홍보물들은 곳곳에 남아있다"면서 "세금을 들여 만들고, 이를 교체하는 데 세금을 들이는 일이 거듭되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위에서 예로 든 'K&R'도 노면의 페인트를 지우고 새로운 표기로 다시 칠해야 하고 표지판도 바꿔야 한다. 문화재 안내판의 잘못된 어휘 등도 처음부터 제대로 쓰지 않으면 교체하는 데 많은 세금을 투입해야 한다.  

이렇게 낭비되는 비용은 얼마나 될까? 국립국어원이 현대경제연구원에 의뢰해 분석한 결과, 국내 전체 공공기관에서 어려운 행정용어로 발생한 기회비용은 연간 170억 원이다. 어려운 정책용어로 인한 시간비용도 114억 원에 달했다. 10년 전인 2010년에 분석한 조사 결과였다.  
 
김미형 전국 국어문화원연합회 회장
 김미형 전국 국어문화원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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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주의? 국뽕?] "잡탕식 영어가 세계화인가"

일부에서는 언어운동 또는 한글운동을 국수주의, '국뽕'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세계화 추세를 거스르고 문화적 다양성을 무시한다는 지적이다. 심지어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라고 부르는 북한을 거론하며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은 "공공기관만이 아니라 언론들도 앞다퉈 국민들이 모르는 영어를 많이 쓰고 있는 상황인데, 이건 다양성이 아니라 영어 획일주의"라면서 "언어는 소통이고 배려인데, 이를 무시한 채 잡탕식으로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을 세계화로 포장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김 원장은 "공공기관들의 우리말 오염 행태는 명백하게 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국어기본법 제14조(공문서 작성)에는 "공공기관 등은 공문서를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국어기본법 시행령 제3조(국어책임관의 지정 및 임무)에는 "해당 기관이 수행하는 정책을 효과적으로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알기 쉬운 용어의 개발과 보급 및 정확한 문장의 사용을 장려"하도록 하고 있다. 

김 원장은 "서울시에는 시장 직속의 국어 바르게 쓰기 위원회가 있고 제가 부위원장이기도 한데 누리집과 홍보물에는 '스타트'니 '피니시' 등의 외래어가 수두룩하다"면서 "국어책임관은 '겸직'이기에 자신이 책임관인지도 모를 정도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법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말 사용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미형 회장은 "사적으로 이뤄지는 언어를 강제할 수는 없지만, 공공언어 영역에서 어려운 어휘를 사용하면 정부 정책에 국민 참여가 제한되며, 이를 인용한 언론 매체의 뉴스도 알아들을 수 없다"면서 "정부가 지속적으로 개선사업을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공무원이나 기자들의 책임의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공공언어가 쉬운 우리말로 쓰여야 하는 이유는 정부 정책, 법과 제도, 행정 절차 등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알기 어려운 어휘를 사용한다면 국민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으며, 재산상의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다. 또 누군가의 보건과 복지 혜택의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어렵게 쓴 공공언어는 공공의 이익을 박탈하는 차별과 불통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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