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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나의 요리 흥미를 가장 떨어트리는 계절이다. 주방을 쳐다보기만 해도 한숨이 난다. 어쩌다 한 뱃속에서 한식파 아들과 양식파 딸의 조합이 왔는지 몰라도 끼니때마다 서로 다른 메뉴를 요구하는데 정말 화병이 날 것 같다. 티끌까지 끌어모은 모성으로 어찌어찌 원하는 메뉴를 모두 해줬는데 아이들이 깨작대는 날이면 그날은 내 안의 악마를 만나게 된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지만 그 음식을 내 손으로 하고 싶지 않다. 외식은 귀찮다. 배달 음식은 몸에 안 좋을 것 같다. 반조리 음식은 지겹다. 어쩌라고?! 나도 모르겠다. 당신은 방법을 알고 있는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이런 상태가 쭉 이어져 오다 보니 음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돼 버렸다. 요리 권태기. 원래도 사이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날씨가 더워지니 더욱더 거리를 두고 싶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인지 기운이 더 처지는 날이었다. 큰아이는 낙지볶음이 먹고 싶다고 했고 작은 아이는 매운 걸 못 먹으니 스파게티를 해달라고 했다. 나는 둘 다 내키지 않았다. 만들 생각만으로도 진이 빠지는데 내가 먹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자극적이지 않고 깔끔하고 묵직하면서도 맛있는 무언가... 그것은 바로 콩국수였다. 큰아이용 낙지볶음과 작은 아이용 스파게티를 만들면서 나는 가슴으로 울었다.

"너흰 누굴 닮아서 콩국수를 안 좋아하니... 흐어어억..."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콩국수
 콩국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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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중에 콩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다들 콩이라면 질색팔색 한다. 거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어릴 때 콩을 너무 좋아해서 콩나물도 대가리만 톡톡 떼서 먹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런데 이 집에선 남편은 물론이고 두 아이 모두 콩을 싫어한다. 가족이 싫어하는 음식을 나 하나 좋자고 먹을 일은 크게 없다. 그저 참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날은 참을 수가 없었다. 콩국수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지금 당장 먹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간절해졌다. 마치 집안에서 반대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듯 그 마음은 더욱 뜨거워졌다. 아무리 떨치려 해도 떨쳐지지 않는 그런 마성의 남자 같은 진한 콩국수. '그래! 맨날 아이들 입만 생각할 순 없지'. 나는 후다닥 아이들 밥을 해놓고 콩국수를 먹으러 나섰다. "그 남자 없인 안 돼요!" 하고 뛰쳐나가는 여인의 얼굴을 하고서.

남편이 사 오겠다고 한 것도, 같이 먹으러 가주겠다는 것도 거절했다. 나를 위한 퍼포먼스적인 행위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먹어주는' 모습을 살피는 것도 싫었다. 나 혼자 이기적으로 그 맛을 온전히 음미하고 싶었다.

마침 동네에 찜해둔 콩국수 집이 있었다. 밥때가 지나서인지 식당엔 나뿐이었다. 거침없이 "콩국수 하나요!"라고 외쳤는데 왠지 기분이 좋았다. 거추장스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젓가락과 숟가락도 내 것만 챙기면 됐고 쓸데없는 말을 안 해도 됐다. 나를 위한 음식이 만들어지는 그 시간을 차분히 기다렸다. '곧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나온다. 아무에게도 안 나눠줘도 된다. 집에서 해 먹으면 번거로울 텐데 가격도 아름답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콩국수가 나왔다. 아주 푸짐하다. 걸쭉하고 뽀얀 국물은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다. 콩국물의 농도를 보기 위해 옴폭한 숟가락으로 펐다. 꾸덕한 콩의 질감이 느껴지는 찐 콩국수다! 입안에 밀어 넣자마자 가득 퍼져나가는 고소한 콩의 기운.

이제 본격적으로 먹어볼까? 뽀얀 바다 위에 볼록 솟아있는 작은 섬처럼 자리한 면 봉우리를 헤집었다. 젓가락으로 그 면을 건져 올려 한 입 호로록. '아니, 왜 이 맛을 모르는 거야.' 아니, 몰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인생은 자신이 아는 만큼 잰 체 하는 거다. 나 역시 남편이 제발 한번만 먹어보라고 간청해도 못 먹는 음식이 있다. 닭발과 곱창이다. 각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각자가 즐기면 될 일. 그 맛을 모른다고 서운해할 이유도 강요할 필요도 없다. 

면을 한두 입 흡입한 뒤 살짝 소금 간을 한다. 처음부터 간을 하지 않는 건 콩 본연의 맛을 먼저 느끼고 싶어서다. 소금 간을 한 콩국수는 전혀 다른 맛이 돼버린다. 간을 하지 않은 콩국수가 청초한 느낌이라면 간을 한 콩국수는 원숙한 느낌이다.

두 맛을 모두 경험한 나는 아주 경건하게 콩국수 먹는다. 면 한 번  후르릅, 국물 한 번 벌컥, 후르릅, 벌컥... 어떤 이는 콩국수에 설탕을 넣어 간을 한다는데. 믿고 싶지 않다. 달달한 콩국수라... 상상만으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아차! 콩국수의 짝꿍, 김치도 빼놓을 수 없다. 콩국수엔 신김치가 아닌 겉절이가 '국 룰'(나라의 룰)이다. 배추의 아삭한 식감과 달큼하면서도 새콤한 양념 맛의 겉절이... 콩국수와 겉절이, 나는 이 둘의 사이만 인정한다.

그렇다고 겉절이를 콩국수에 '텀벙' 하고 올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앞접시에 면을 덜고 그 위에 겉절이를 올린다. 순백의 콩 국물에 차마 빨간 고춧가루를 띄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한 결벽 증상이지만 뽀얗고 아름다운 비주얼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콩국수에 대한 나의 예의다.  

먹으면 먹을수록 이 맛을 박제하고 싶다. 아, 완벽하다 완벽해. 넙적 사발을 두 손으로 감싸고 얼굴이 다 가려질 정도로 벌컥벌컥...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고 말끔히 해치웠다. 으음, 아주 흡족한 식사였다. 그동안의 울분이 이 한 끼로 퉁쳐진 것 같았다. 몸 전체가 콩 에너지로 가득 채워졌다. 이제 시동만 걸면 될 일이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근자감이 생겼다.

나를 '나'이게 하는 이 한 그릇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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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는 이 단순한 일. 그 일을 해낸 것만으로도 나는 제법 큰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이 단순한 일조차 망설이고 포기하는 어른이 돼 버렸다. 상대의 눈치와 마음을 얻기 위해 음식을 차리고 고르고 선택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장 알텔므 브리야 사바랭, <미식예찬>)라는 말을 빌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먹었는가? 아이들이 남긴 음식을 먹은 이는 부모라는 사람, 편의점 김밥으로 허기를 때운 이는 열심히 사는 사람, 부모님이 해주는 음식을 먹은 이는 사랑받는 사람. 콩국수를 먹은 나는... 그저 '나'이고 싶은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당신을 당신이게 하는 음식은 무엇인가? 그 음식이 오늘 당신의 한 끼가 되었으면 좋겠다. 

태그:#콩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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