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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고귀한 일상>
 책 <고귀한 일상>
ⓒ 서울셀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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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련의 책 <고귀한 일상>은 자연의 향기와 일상의 향기로 그득하다.

사실 자연과 일상, 다른 듯 같은 말이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하다', 일상(日常)은 '날마다 그러하다'는 뜻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일상도 자연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연의 신비와 고귀함을 누릴 수 있는 이유다. 

우울한 일상에 구원 투수로 나선 <고귀한 일상>

코로나 이전에는 지리멸렬한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주말마다 휴가철마다 차들이 도로를 꽉 메우는 게 흔하디 흔한 풍경이었다. 뭔가 신선한 공기를 쐬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것, 이것이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이었지 싶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는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지루한 일상에 오래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일상을 떠나지 못해 미치겠다고 하는데. 김혜련 작가는 묻는다.
열심히 사는 데 삶은 왜 이리 지겹고, 괴롭고, 우울한가? '여기' 아닌 '저기'로 떠나고만 싶은가? 주말을 맞아 악을 쓰고 놀아야 겨우 사는 것 같은가? ... 우리가 원하는 건 분주하고 숨 막히게 돌아가는 기계적 시간 대신, 쉬고 사색하고 한가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고귀한 일상> 157쪽

저자는 질문을 통해 삶이 지겹고 괴롭고 우울한 이유가,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쉬고 사색하고 한가하게 여유를 즐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 그럼 지금이 가장 좋은 시절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길고 지루한 일상을 고요한 일상으로 즐길 수 있단 말이지?

그녀는 삶이 우울한 이유 중에 하나로 자본과 문명이 몸의 야생성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대의 자본은 야생성을 없애려 한다. 야생은 생명체가 지닌 몸의 직접성을 의미한다. 야생, 즉 문명 바깥에서 사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귀찮다. 몸으로 하는 것이 귀찮아지면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하지만 몸이 편해지면서 사라지는 게 있다. 삶의 생기, 살아있는 기운이다.-172쪽

<고귀한 일상>은 작가가 경주에서 그리고 상주에서 10여 년 이상 몸으로 살며 틈틈이 일상과 자연에서 느끼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몸으로 쓴 그녀의 단단한 언어를 통해 몸의 야생성과 생명의 명랑함을 맛본다면, 우울하고 지겨운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을까. <고귀한 일상>이 우울한 일상에서 그대를 구원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고귀한 일상>은 저자가 말한 것처럼 '시 산문의 형식을 빌린 짤막한 글을 모은 것'이다. 작고 예쁜 책자로 손 안에 쏘옥 들어온다. 언제 어디서나 5분 10분 시간 날 때마다 읽기에 좋다. 어떤 문장을 만나도 마음에 후욱 들어와 생각과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신성한 매력이 있다.

책 곳곳에 흑백 사진도 땅의 평안을 선물해준다. 작가가 고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집과 정원, 동네를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주부의 일상, 밥하기가 신성한 일이라고?

김혜련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은 2020년 봄, 그녀의 저서 <밥하는 시간>을 통해서였다. 그때 나는 구차하고 지리멸렬한 애벌레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분노의 힘을 응축하여 내 나름의 꽃을 피우려 하고 있었다. 

결혼한 이래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애들 돌봐주고... 그것이 나의 일상이 된 삶에 물음표를 찍고,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데 김혜련 작가는 밥을 공양하듯 하란다. 일상에서 신성을 발견하라나.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지?

면밀히 따져보면 김혜련 작가의 말이 맞다. 밥이 생명이고 보약이다. 생명체인 인간이 밥을 먹고 생명을 일구어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따라서 밥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노동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상은 밥하는 일이 아주 하찮은 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365일 아무리 열심히 밥을 해서 먹여도 식구들은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 고마워하기는커녕 엄마는 집에서 노는 가장 팔자 좋은 사람으로 여긴다. 아, 내 평생 밥하는 것만큼 나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일이 또 있을까.  

솔직히 <밥하는 시간>을 읽은 후, 다시 밥하는 일상을 소중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생겼지만, 집안일을 하찮게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는 나는 그 마음을 외면하고 싶었다. 

언제쯤 해탈의 밥을 지을 수 있을까
 
김혜련 작가의 <밥하는 시간>
 김혜련 작가의 <밥하는 시간>
ⓒ 서울셀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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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김혜련 작가가 나의 블로그에 댓글을 남겼다.

"<밥하는 시간>의 저자 김혜련입니다. 야생님 글을 오래 전에 읽고 반갑고 기뻤어요. 제 글의 핵심을 읽어내주시니 말입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 한없이 나눌 것 같은 느낌! 제 새 책이 나와서 전해드리고 싶어요."

얼마나 따끈따끈했던지! 이렇게 나는 <고귀한 일상>을 만났다. 특히 '밥과 밥 사이'는 나에게 의미있게 다가왔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
밥에서 밥으로 가는 길

나는 언제나 이 무겁고
비틀거리는 밥을 건너
저 피안彼岸의 밥에 이를까

언제쯤에야 
피비린내 밥 대신 
평화의 밥이 될까.

중생대의 공룡을 닮은
기중기의 무게로 등이 휘어진,
여자들의 고독한 밥의 무게를 내려놓고
나비처럼 가볍게 
해탈의 밥을 지을 수 있을까. -148~149쪽

<밥하는 시간>이 밥을 공양하듯 해야 한다는 숙제를 안겨주었다면, <고귀한 일상>은 그 숙제에서 나를 조금 해방시켜 주었다. 작가 자신도 피안의 밥, 평화의 밥, 해탈의 밥을 향한 과정에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해탈의 밥으로 가는 길은 나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먼길이다. 그럼에도 <고귀한 일상>으로 초대하는 저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봄을 찾아 온 남쪽을 헤매다 지쳐 집에 돌아오니 마당 한가득 봄이 있더라.-28쪽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고귀한 일상 - 일상에서 발견하는 생명과 존재의 아름다움

김혜련 (지은이), 서울셀렉션(2021)


밥하는 시간 - "삶이 힘드냐고 일상이 물었다."

김혜련 (지은이), 서울셀렉션(2019)


태그:#김혜련, #<밥하는 시간>, #<고귀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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