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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의 혐한의식을 거슬러 올라가면, 1870년대 정한론과 맞닥뜨리게 된다. 당시는 국호가 조선이었고 대한제국이 건국하기 이전의 시기였기에, 정한론은 적합한 용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 정조론이 되는데, 이 또한 적절한 용어라고 할 수 없다. 조선침략론이라야 가까운 의미에 해당된다.
    
정한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은 당시 조선에 자극을 줄 것을 알면서도 일본신화에 나오는 한반도 남부에 대한 삼한정벌에서 그 유래를 찾으려 했다. 정벌이라는 용어가 타당성을 가지려면 처음부터 상대는 일본에 해를 끼친 나라라는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조선이 일본에 해를 끼친 객관적인 증거가 나와야 하는데, 일본에서 정한을 주장하는 이유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 무력에 의한 조선 침략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정한론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태극기(자료사진)
 태극기(자료사진)
ⓒ 거창군청 김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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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여기서 침략의 이유를 거론할 때 조선은 수비만 할 줄 알았지, 공격을 모르는 나라라고 비아냥하고 있다. 사무라이 전통으로는, 공격도 방어의 한가지 전술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당시 일본은 전쟁으로 지새우는 날이 많았는데, 오랫동안 평화를 지켜온 조선을 비웃고 있다. 처음부터 정당한 이유 없이 침공을 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일본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아시아를 찾아와 무력시위를 하면서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열강 앞에 국가운명을 맡겨야 하는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조선을 희생시킴으로써 일본의 기세를 떨쳐 보여, 적어도 구미열강에게 더 이상 틈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국내외로 알리겠다는 의도였다.

1853년 미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가 군함 4척으로 함포외교를 전개하며 요꼬스까에 나타나, 막부를 위협하고 이듬해 가나가와조약으로 통상교섭에 성공하게 된다. 이를 그대로 조선에 적용시켜 1875년 운양호로 강화도를 공격하고 무력시위로 통상을 요구하여 이듬해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맺게 된다.

조선 침략의 수순

정한론에서 출발하는 조선 침략의 과정은 세 가지 수순을 보이는데, 일본 정부가 큰 그림으로 방향을 틀면, 일본 언론(매스컴)이 이를 뒷받침하면서 선전, 선동하는 나팔수 역할을 하고, 국민이 지지하는 데모로 이를 받아낸다. 일본 정부가 정한론을 의식하면서 조선 침략이라는 그림을 그려내면, 신문과 잡지에서 이를 지지하는 사설이 나오고, 국민이 지지하는 모양새이다.

정한론의 한 축에 정한파의 중심인물 사이고 다까모리가 등장한다. 정한의 실행이 늦춰진 것은 타이완 침공을 우선으로 했기 때문이다.
 
사이고 다카모리 묘사, 에도아르도 키오소네(Edoardo Chiossone)의 판화
 사이고 다카모리 묘사, 에도아르도 키오소네(Edoardo Chiossone)의 판화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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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정부에서 사이고 다까모리의 조선사절파견을 두고 대립이 일어나기 전, 1871년 태풍 때문에 타이완에서 조난당한 류큐인이 타이완 원주민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873년에도 오까야마현 선박이 타이완에 표착하는데, 승조원 4명이 약탈당하는 사건이 알려지게 된다. 이에 1874년 메이지 정부의 첫 번째 해외파병인 대만침공 후, 청과 교섭하여 청과 사쓰마번에 조공하던 류큐에 대한 일본 귀속을 청으로부터 승인받게 된다.

메이지유신 후 일본 정부는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여 신정부의 수립을 알리는데, 메이지 정부 국서에는 황(皇)이라는 글자가 표기되어 있어,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가 대등한 것이 아니라, 상하 관계를 맺으려 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결국, 조선 정부는 국서형식이 이전과 다르다는 이유로 수령을 거부한다.

일본 침략의 완성, 친일파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에 대한 반발이 정한론에서 나타나는데, 조선에 대한 방침을 둘러싸고 일본 각의에서는 논란을 벌인다. 무력행사를 하는 방법을 둘러싼 이견이었다. 조선에 있는 일본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파병을 하여 무력으로 수호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사이고 다까모리는 무력행사 이전에 조선과 교섭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사절로 파견되어 모욕을 당하고 희생이 되면, 이를 빌미로 무력침공을 하면 어떻겠냐고 조선에 사절로 파견해 달라고 요구한다.

각의에서 사이고의 조선 사절파견은 결정되지만, 반대파는 이를 뒤집어 사절파견을 중지하는 재가를 받아낸다. 사이고 다까모리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막부를 무너뜨렸지만, 지도자 간의 대립으로 가고시마에 귀향한 후, 뜻을 함께하는 후원자들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반란군의 주모자가 되어, 정부군에 쫓기면서 자결하게 된다. 사이고 다까모리가 정부군에 대항하였다고 해도 유신에 기여한 공적은 평가받았고, 정부 편에 남아 있던 친동생 사이고 주도는 타이완 침공에 참여한 후, 해군, 육군 대신으로 승승장구한다.

사이고 다까모리가 조선 사절을 통해 다시 조선 정부로부터 거절당하고 모욕을 받게 되면, 전쟁상태로 돌입한다는 점을 알아차린 메이지 정부는 경계하게 된다. 이는 조선과의 전쟁은 청의 개입을 불러일으키기 쉽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아직, 조선을 청과 연계되어 움직이는 국가라는 인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청일전쟁 후 대만을 식민지로 편입하고, 러일전쟁 후 국권침탈(한일병합)로 이어지게 된다. 청일전쟁 후, 청으로부터 외교적으로는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확인받지만, 일본으로부터 보는 시점은, 군사적으로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떼어내기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외부의 힘으로 얻은 자주와 독립에는 그만큼 한계가 뒤따르고 있는 셈이다.

일본에서 정한과 혐한이라는 용어가 사라지려면, 현재도 진행 중인 친일파 재산의 청산을 포함한 친일문제가 정상적으로 해결되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남남갈등의 중심에는 친일파에 대한 처리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좁은 의미로 친일파는 국권침탈에 협력한 자를 일컫는데, 국권침탈이라는 정한론의 완성은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태그:#혐한, #지한,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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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그 내면에 자리잡은 성숙도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민하면서 관찰하고 있는 일본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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