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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능력주의'(meritocracy)를 다룬 책들이 한꺼번에 여러 권 출판되었다. 지난 11월과 12월에 나온 <엘리트 세습 THE MERITOCRACY TRAP>(대니얼 마코비츠. 2020. 서정아 옮김. 세종), <공정하다는 착각 THE TYRANNY OF MERITOCRACY>(마이클 샌델. 함규진 옮김. 2020. 와이즈베리.), <능력주의와 불평등>(박권일·홍세화·채효정·정용주·이유림·이경숙·문종완·김혜진·공현. 2020. 교육공동체벗)이 대표적이다.

'능력주의'(meritocracy)란 무엇인가?

이들 책에서 공통으로 다루는 '능력주의'는 영어 'meritocracy'를 옮긴 말이다. '능력주의'라는 단어 이외에도 '실력주의'나 '업적주의'로 번역되기도 하며, '메리토크라시'라는 외래어 표현이 그대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많이 사용되는 단어 능력주의에 따옴표를 붙여서 쓴다.
  
마이클 영이 쓴 <The Rise Of The Meritocracy> 책이 2020년 4월 <능력주의>(유강은, 이매진)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 마이클 영이 쓴 <능력주의> 책 표지 마이클 영이 쓴 책이 2020년 4월 <능력주의>(유강은, 이매진)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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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는 마이클 영이 1958년에 쓴 <The Rise Of The Meritocracy>에서 만들어낸 말이다. 이 책은 2034년 마이클 영이라는 동명이인의 가상 인물이 과거를 돌아보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설이다. 풍자와 비꼬기를 잘 건넌다면 잘 쓰인 사회학책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1986년 한준상과 백은순이 <교육과 평등론:교육과 능력주의 사회의 발흥>(전예원)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했다. 최근에는 작년 4월에 유강은이 <능력주의>(이매진)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영은 능력(merit)을 지능(IQ)과 노력(effort)이 합쳐진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 '능력'이 지배하는 사회가 '능력주의' 사회이다. 정확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영어 단어 'cracy'가 통치나 지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kratia'에서 온 말이기 때문에 '능력(자) 통치'나 '능력(자) 지배'라고 직역하는 것이 맞겠지만, 비슷한 조어인 'democracy'를 '민주주의'라고 옮기고 있으므로 '능력주의'라고 사용해도 형식 측면에서는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능력주의'라는 말은 마이클 영의 의도와 달리 지나치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면서 내용면에서는 문제가 있는 용어 사용이다. 특히 최근 우리 사회에서 '공정'이라는 말과 합쳐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이 말을 그냥 사용해도 괜찮은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따옴표를 굳이 붙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이클 영도 나중에 이러한 우려를 직접 표현한 적이 있다. 트랜색션 출판사판 서론(유강은 번역본 11-21쪽 수록)에서 많은 사람이 '능력주의' 사회에 대해 풍자한 내용을 오히려 거꾸로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잘못된 해석은 책을 쓴 핵심적인 이유나 주장을 정반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가 2001년 6월 29일 가디언 칼럼 "Down with Meritocracy"에서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를 강하게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판 이유는 블레어 총리가 '능력주의'를 추구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신분이나 돈이 아닌 개인의 능력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를 말한다. 영은 그 능력이 지능과 노력이 합쳐진 것, 결국은 지능이라고 규정했으며, 오늘날 많은 사회 구성원들은 학력이나 학벌, 또는 시험을 통과해 얻은 자격이라고 생각한다. 언뜻 생각하면 '(지적) 능력'이 신분이나 돈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분배 기준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학력이나 학벌로 대표되는 능력이 결국 사회 경제적 지위에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에 소수 엘리트가 독점한다는 점에서 크게 나을 것도 없다.

풍자와 해학을 빼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능력주의는 엘리트주의다. 능력 있는 소수, 즉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소수자 통치이다. 평범한 다수인 '데모스'의 지배를 의미하는 민주주의 반대편에 자리를 정한 사회 운영 체제이다.

교육에서 '능력주의'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교육에서 '능력주의'는 다양한 시험과 그 결과인 점수로 나타난다.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가장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면서도 극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이다. 시험과 점수, 서열로 이어지는 교육에서의 '능력주의'는 보호자의 소득이나 문화 자본과 같은 결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과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회 구조적 불평등을 감춘다.
 
"선발은 분명 부모의 지위나 재산이 아니라 아동이나 젊은이의 능력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 바로 이것이 교육가들이 어느 정도 정교한 검사와 시험 체계의 도움을 받아 자기들이 하고 있다고 즐겨 생각하는 일이며, 실제로 종종 하기도 한다. …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결과는 동일하다고 여겨진다.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을 거쳐 진학 과정에서 선발된 젊은이들이 학교와 대학에서 계속 업적을 입증해서 그 뒤 일반 사회에서도 출세하게 된다. 실제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능력주의 교육은 능력주의 사회를 지탱한다."
(마이클 영 지음. 유강은 옮김. 2020. <능력주의>, 15-16쪽. 이매진>
 
요즘 대학 입시 수시전형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고등학교 교무실에서 특정 학생이 이른바 명문대학에 합격했다며 기뻐하거나 성적 상위권에 있는 학생들의 대학 합격 여부를 묻고 답하는 교사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살벌한 학벌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위치를 차지하기를 바라는 '선한 의도'가 만든 풍경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한 의도'가 만드는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보호자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학생들의 학업성취 수준 차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교사들마저 '능력주의' 고착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한다.

소위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시·도교육청들은 학생들의 진로 진학에 도움을 준다는 명목으로 대학 진학을 담당하는 부서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 진학을 당연시하고 '인 서울'이나 SKY 입학을 '노력이 담긴 능력'으로 자리매김하는 분위기를 공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만들어낸다. 정부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이 시험을 통해 학생들을 줄 세우며 일부 학생들에게 학벌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는 입장권을 발행하고 있다. 이 입장권을 받지 못한 학생들은 아무 잘못한 것도 없이 주눅 들고 고개를 숙이게 된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지위가 추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들은 학교에서 낙인이 찍히게 될 경우, 나중에 취업이 더욱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엘리트들에 의해 도덕적으로 쉽게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하층 계급이 가진 재능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평가된다. 하층 계급이 도덕적으로 이렇게 무방비 상태가 된 적은 없었다."
(마이클 영. 2001년 6월 29일. "Down with Meritocracy". 가디언.)
 
시험을 통해 만들어진 강력한 학벌과 학력 피라미드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공고하게 다음 세대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아울러 점점 더 많은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평가와 배제 시스템이 확장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코로나19' 상황에서 보듯이 필수 노동이라고 부르며 위험 상황으로 노동자들을 내몰면서도 전문성과 능력이라는 포장지를 두른 학벌과 학력을 근거로 이들 노동자들에게 일한 만큼의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다.

'능력주의'로 인해 위협받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연대가 필요하지만 점점 진정한 지지 세력은 줄어들고 있다. 이른바 진보 진영에서도 '능력주의'로 포장된 엘리트주의 망령이 좀비 바이러스처럼 퍼지기도 한다.

위에서 인용한 가디언 칼럼에서 마이클 영이 1940년대 노동당 정부와 2001년 노동당 정권을 비교하며 비판한 것도 이러한 현상과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광산 노동자 출신 장관들이 있었지만 60여 년이 지나서는 더는 노동당 정권에서도 하층 계급 출신 장관을 찾기가 어렵다고 꼬집었다. 이 말은 최근 피케티가 <자본과 이데올로기>(피케티. 2019. 안준범 옮김. 2020. 문학동네.)에서 미국과 영국에서 이른바 진보 정당이 더는 경제적 하층 계급을 대변하고 있지 않다며 '브라만 좌파'라고 이름 붙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과연 능력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능력주의'는 최순실이나 조국 자녀 입학 과정에서 드러난 '부모 찬스' 논란에 대한 문제 제기처럼 부도덕한 전근대적 불공정에 저항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은 함정이 있다. 이러한 저항은 '부모 찬스'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시스템을 마련하는 노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법 위반 사항이 있는 일부 유명 개인들에게만 칼을 겨눈다.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부모 찬스'가 양산되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것이 '능력주의'의 부정적인 모습이다. '능력주의'가 보이는 양면성은 좋은 측면만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공동체와 구성원들을 해치는 함정이다.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이나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 채용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는 사태가 '능력주의'의 진짜 모습이다.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정해진 시험을 통과하지 않았다는 데 집중돼 있다. 정규직이 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다. 무엇이 능력이며, 능력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이고, 과연 그 능력을 정확하게 재서 점수로 나타낼 수 있는지이다.

능력 있는 교사는 누구인가? 좋은 교사는 어떤 사람인가? 능력 있는 교사와 좋은 교사는 같은 것인가? 임용고사를 통과한 교사는 그렇지 않은 교사보다 좋은 교사인가? 이런 질문에 전혀 대답하지 않으면서 누군가 정해놓은 교육과정을 저항 없이 충실하게 이행하거나 누군가가 만든 시험을 통과한 이들에게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나아가 시험을 통과하지 않거나 정해진 코스에 저항하는 이들을 향해 자격 없는 이들이 생떼를 부린다며 부도덕한 존재로 낙인찍는 것은 과연 도덕적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예 없는 나라들도 있는 교장 자격증이 있어야 교장을 할 수 있다거나 외국 유명 대학의 박사학위가 있어야 교수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주장도 비슷하다.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 후반부에서 능력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첼시 선언'을 소개한다. 이 선언 속에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다음은 선언 일부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만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서도 평가한다면,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리라. 어느 누가 아버지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경비원보다 과학자가 우월하며, 장미 재배하는 데 비상한 솜씨를 지닌 트럭 운전사보다 상 받는 일에 비상한 기술이 있는 공무원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마이클 영. 1958. 유강은 옮김. 2020. <능력주의>, 268쪽. 이매진.)
 
그런데 이 주장은 넬 나딩스의 다음 주장과 매우 비슷하다.
 
 "우리가 지성intelligence과 지적intellectual 활동을 동일시한다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수학이 요리나 오토바이 수리보다 본질적으로 더 지적인 것은 아니다".
(넬 나딩스. 2013. 심성보 옮김. 2016.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 112쪽. 살림터.)
 
'능력'이라는 핑계를 달아 사람을 가르고 차별하며 혐오하는 '능력주의' 사회는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학교와 교육 분야는 '능력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엘리트주의가 깊게 뿌리박혀 있는 곳이며, 사회에 퍼뜨리는 숙주 역할을 하고 있다. 엘리트 지배와 불평등을 정당화하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능력주의'를 없애지 않고는 교육 혁신은 제대로 된 시작도 어렵다. '능력주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 교육 혁신의 진정한 출발이다.

우리는 이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왜 국어, 영어, 수학은 '일정 수준 이상의 기초학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요리나 공차기, 노래 부르기, 세상을 바꾸는 용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 영어와 수학 성적이 높으면 똑똑하다고 말하면서 왜 고장 난 책상이나 자전거를 잘 고치는 학생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지? 자격증이 있는 의사나 변호사는 열심히 노력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왜 일상생활 속 삶을 통해 터득한 놀라운 기술과 지혜를 가진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누가 '능력'은 가르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한 것인지?

태그:#능력주의, #메리토크라시, #엘리트주의, #교육 혁신, #교육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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