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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역사속으로'는 국내 역사문화 유산의 멋과 서사를 찾아 떠나는 답사기입니다.[편집자말]
- 1편 경남 밀양 도로명 주소가 정말 특별한 이유에서 이어집니다.

김원봉과 윤세주의 어린 시절 그리고 동화학교

김원봉과 윤세주는 같은 고향, 한 집 건너 이웃집 친구 사이로서, 1919년 의열단 창립 동지이자, 1935년 좌우 연합의 민족혁명당 창당 동지이며, 1938년 중국 본토에서 가장 먼저 창설된 독립군 부대인 조선 의용대의 창설 동지이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한 줄기를 형성한 의열단 계열의 독립 투쟁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뜻을 같이한 두 사람이다.
 
김원봉과 박차정 김원봉은 1931년 부산 출신의 독립 운동가인 박차정과 결혼했다. 해방 후 김원봉은 돌아왔지만, 그녀는 1944년 충칭에서 전투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무덤이 밀양 송산 공동묘지에 있다.
▲ 김원봉과 박차정 김원봉은 1931년 부산 출신의 독립 운동가인 박차정과 결혼했다. 해방 후 김원봉은 돌아왔지만, 그녀는 1944년 충칭에서 전투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무덤이 밀양 송산 공동묘지에 있다.
ⓒ 홍윤호-의열기념관 2층 사진 재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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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격이나 구체적인 활동을 포함한 삶의 궤적은 서로 달랐다. 크게 보면 김원봉이 맨 앞에서 항상 조직을 이끄는 대장 역할을 맡았다면, 윤세주는 그 밑에서 핵심 조직원으로 사람을 챙기고 이론을 제공하며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차이가 김원봉을 더 유명하게 만든 듯하다. 또 윤세주가 조선 의용대 활동을 하던 중 전쟁터에서 사망했다는 점도 윤세주가 '덜 유명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해방 후에도 살아서 고국에 돌아온 김원봉은 그 후의 행적 때문에 다양한 논란을 일으켰으니 해방 이전에 불꽃 같은 삶을 살고 퇴장한 윤세주가 사후에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삶의 구체적인 행적은 달랐지만, 독립운동의 중요한 시점에서 뜻을 같이 했던 평생의 동지, 그들은 고향 밀양에서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김원봉은 1898년 8월 13일 지금의 의열기념관 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주익, 어머니는 이경념이다. 할아버지가 역관 출신이고 아버지가 중농 정도의 농민이어서 특별난 집안도 아니지만, 가난한 집도 아니었다.

윤세주는 1900년 6월 24일에 태어났다. 밀양의 토호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명망이 있었던 집에서 태어나다 보니 어릴 때부터 총애를 받으며 씩씩하게 자랐다고 한다.

김원봉과 윤세주는 한 집 건너 이웃인 데다가 김원봉이 두 살 많은 정도로 연령대가 비슷해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후에 김원봉은 같이 놀던 7, 8명의 아이들 중에서도 윤세주와는 '특별히 친밀'했다고 회상한다. 
   
윤세주 생가터 김원봉 생가터인 의열기념관 옆에 있다. 김원봉이 두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였고, 평생의 동지이자 벗으로 독립운동을 같이 했다.
▲ 윤세주 생가터 김원봉 생가터인 의열기념관 옆에 있다. 김원봉이 두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였고, 평생의 동지이자 벗으로 독립운동을 같이 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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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모두 밀양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는데,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나라를 빼앗겼다. 이에 둘을 포함한 친구들은 마을 입구에 모여 울분을 토로했다고 한다.

특히, 김원봉은 1911년 4월 29일 일본 국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행사를 위해 학교에서 준비한 일장기를 학교 화장실에 처박았다. 학교는 난리가 났고, 일본인 교장이 학생들을 불러다 호통을 치고 때리기도 했지만,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건 직후 김원봉은 학교를 자퇴하고 인근의 동화학교에 편입학했다.

동화학교는 민족주의자이자 독립 운동가인 전홍표가 세운 학교이다. '우리가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하루도 게을리할 수 없다'고 역설한 전홍표. 그는 학생들에게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라고 대놓고 독려했는데, 그의 활동을 감시했던 일제는 1911년 늦가을에 폐교 조치를 내렸다.

이후 전홍표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윤세주 등과 함께 밀양의 3.13 만세 운동을 주도한다. 밀양에서 일어난 3.13 만세 운동은 영남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로 일어난 만세 운동이었다. 윤세주는 동화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김원봉을 통해 교감을 했고, 이는 3.1 운동에서 그가 전홍표의 지도로 만세 운동을 도모하는 배경이 됐을 것이다.
동화학교 터  북성사거리에서 영남루 방향 언덕길에 있다. 터는 사라지고 지금은 밀양택시가 들어서 있다.
▲ 동화학교 터  북성사거리에서 영남루 방향 언덕길에 있다. 터는 사라지고 지금은 밀양택시가 들어서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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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 교육을 실시했던 밀양 동화학교, 지금 그 학교는 밀양 시내에서 흔적조차 없다. 해천과 석정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북성 사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동쪽 영남루 방향으로 조금만 언덕을 걸어 오르면 길 건너편에 ㈜ 밀양 택시가 있다. 이곳이 동화학교 터로 추정된다.

확실한 근거가 없는 데다 여러 가지 난점이 있다지만 '이곳이 민족 교육을 실시하고 교장인 전홍표가 학생들에게 독립을 역설한 동화학교 터로 추정된다'라는 작은 안내판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다. 아니면 이 앞을 지나는 도로를 어느 도시에나 다 있는 '중앙로'라는 이름 대신 '동화학교길'이라는 도로명으로 바꿔 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의 상상을 해본다.
 
최수봉 의거지 이곳에서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가 있었다. 현재는 밀양교회 주차장이다. 안내판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최수봉 의거지 이곳에서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가 있었다. 현재는 밀양교회 주차장이다. 안내판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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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의 심장부이자 최수봉의 의거지, 밀양

동화학교 터로 추정되는 밀양 택시 건물을 잠깐 올려다보고 다시 해천 하류로 발길을 재촉한다. 해천을 따라 의열기념관으로 내려오면 축협 시내버스정류장 표지판 옆에 넓은 주차장이 하나 있다. 밀양교회 주차장인데, 남보주차장이라고 쓰여 있다. 꽤 넓은 이 주차장 터가 일제 강점기 당시 밀양경찰서 터이다.

흔히 최수봉의 의거지인 밀양경찰서 터는 밀양아리랑 시장 남문 일대로 알려져 있고, 최수봉 의거 안내판도 시장 남문 앞에 있다. 하지만 의열기념관의 이준설 학예연구사는 이를 부인한다.

"일제 강점기 당시 밀양경찰서가 모두 세 번 옮겨져요. 처음에는 지금의 밀양교회 주차장 자리에 있었는데, 최수봉 의거 이후 지금의 아리랑시장 쪽으로 이사를 가죠. 기록은 없지만,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최수봉 의거지는 그 주차장 자리가 맞습니다. 다만, 안내판을 세울 당시 첫 번째 밀양경찰서 위치가 어딘지 몰라서 두 번째 경찰서 자리인 시장 남문 앞에 세운 것이지요."

밀양교회 주차장 앞에 최수봉 의거지임을 표시하는 안내판을 세울 수 없냐고 하니 주차장이 사유지인 데다 버스정류장 앞이라 안내판을 세울 자리가 마땅치 않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안타깝다. 이 주차장 자리가 밀양경찰서 터가 분명하다면 길 건너편 어디에든 안내판이 반드시 있었으면 좋겠다. 최수봉의 의거가 의열단의 두 번째 의거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최수봉의 의거는 의열단이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고 실제 실행에 옮긴 두 번째 사례이다. 그런 의미가 있는 곳이 안내판조차 엉뚱한 곳에 세워져 있다면 안 될 일이라 생각한다.
 
밀양아리랑 시장 남문 시장 남문 입구에 최수봉 의거지임을 표시하는 안내판이 있으나, 의열기념관 학예사는 이를 부인한다.
▲ 밀양아리랑 시장 남문 시장 남문 입구에 최수봉 의거지임을 표시하는 안내판이 있으나, 의열기념관 학예사는 이를 부인한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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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된 후, 단원들은 지체 없이 거사 계획에 들어갔다. 그들은 1차적으로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자체 제조한 폭탄과 상하이에서 구입한 무기를 밀반입하여 주로 밀양의 의열단원들 거처에 숨겨 놓았다.

그러나 이 첫 번째 거사는 실행하기 전인 1920년 6월 밀정의 밀고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부단장 곽재기, 윤세주, 황상규 등 다수의 의열단원들이 체포, 구속되면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이에 대한 보복을 천명하고 1920년 9월에 박재혁으로 하여금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게 하였고, 이어 12월에 최수봉에게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를 지시했다.

12월 27일 밀양 출신인 최수봉은 의열단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밀양의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수라장을 만든 후 체포되었고, 1921년 28세의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의열단이 첫 번째 거사의 실패를 딛고 이후 두 번의 폭탄 의거를 실행한 것이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의거와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이다. 이런 의미에서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 현장이 정확하게 표시됐으면 한다.

(- 3편 반경 500미터에 독립운동가 생가가 줄줄이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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