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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태어난 제이(가명)는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필리핀에서 살고 있는 청소년이다.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필리핀에서 제이의 어머니를 만나 제이를 낳았고, 두 사람이 함께 제이의 출생신고를 했다. 당시에는 필리핀에서 출생신고가 되어 있으면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는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제이의 아버지는 한국에 가정이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에 자주 오지 못했지만 2010년까지는 어머니와 연락도 주고받고 양육비도 부쳐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부터 연락이 끊기고 생활에 보탬이 되던 양육비도 끊겼다. 제이의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제이에게 아버지를 다시 찾아 주고 아버지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어린 제이를 친정 식구들에게 맡기고 한국행을 택했다.

필자는 <이주민지원센터 친구>를 통해 제이네 가족을 만났다. 그리고 대한변호사협회 법률구조재단의 구조기금 지원을 받아 법원에 제이의 아버지를 상대로 인지와 양육자지정을 구하는 소를 제기했다. 소송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우선 아버지의 이름 말고는 주소나 현재 연락처 등 인적사항을 몰라 소장 송달이 어려웠는데, 다행히 아버지가 대표이사로 있던 법인명을 알고 있어 법인등기부를 발급받았다. 법인등기부에 나타나 있는 과거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통해 아버지의 주민등록등본을 확인하여 현재 주소지로 정정한 후 송달할 수 있었다.

소장을 받은 제이의 아버지는 다행히 친자 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에도 응했고 제이가 자신의 친자임을 인정하는 답변서를 법원에 제출한 뒤 필자의 사무실에 연락하여 제이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제이의 부모님이 수년 만에 다시 만난 자리에서, 필자는 서로 감정이 격해지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결국 조정이나 합의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 제이의 아버지는 한국에 있는 부인과 자식들에게 제이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제이를 가족관계등록부에도 올려 줄 수 없다고 했다. 대신 형편이 나아지면 양육비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지금은 사업이 망하고 빚만 남아 경비원 일을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둘째로 제이의 어머니가 제이의 출생 당시에 필리핀에서 법률상 혼인한 남편이 있었던 사실이 문제가 됐다. 우리나라 민법에서는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하기 때문에(친생자추정), 아내가 혼인 중에 다른 사람의 자녀를 임신한 경우 원칙적으로 '친생부인의 소'에 의해 그 자녀와 법률상 남편 사이의 친자관계를 단절시킨 후 친부가 인지할 수 있다.

우리는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의 진술서를 통해 제이의 어머니가 제이를 낳기 전부터 7년 이상 남편과 별거하며 왕래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한편, 유전자검사 결과를 비롯해 피고가 이 사건에서 제이가 자신의 친자임을 인정하고 있는 사실, 피고가 필리핀에서 직접 출생신고를 한 사실 등 제이의 생부가 피고라는 객관적이고 명백한 증거들을 제시했다. 현재 판례에 따르면 부부가 장기간 별거하는 등 아내가 법률상 남편의 자녀를 임신할 수 없는 외관상 명백한 사정이 있는 경우 친생자추정이 미치지 않으므로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지 않고도 친부를 상대로 인지청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친생자추정'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 올해 10월에 나온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간단히 소개한다. 최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다른 사람의 정자를 기증받아 출산한 자녀와 혼외관계로 낳은 자녀 모두를 친생자로 추정해야 한다고 하여 많은 논란을 낳은 판결이다.

대법원이 이처럼 일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을 한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현행 민법의 친생자추정 규정이 매우 엄격해서 친생자추정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부부 중 한쪽이 친생자가 아님을 알게 된 지 2년 이내에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해야만 한다고 정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 생물학적 가족뿐만 아니라 공동생활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형성된 가족 또한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험난한 여정 끝에 제이의 어머니와 제이는 인지청구 소송에서 승소하고 앞으로 매월 양육비도 지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큰 산을 하나 넘은 제이의 가족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제이에게 한국 국적을 찾아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속인주의를 채택하여 부모 중 한쪽이 한국인이면 국적을 취득할 수 있지만 국적 심사 과정에서 법무부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문제다.

앞서 인지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다른 코피노(Kopino, 코리안과 필리피노의 합성어로 한국인 부와 필리핀 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일컫는 말)들의 국적 심사 사례를 보면, 인지 승소 판결문 말고도 친부의 가족관계증명서, 신분증 사본 등 친부의 협조 없이는 받을 수 없는 서류들을 제출하라고 하여 서류 미비로 국적 취득에 실패한 사례가 적지 않다.

법무부는 코피노 국적 취득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올해 안에 국적 취득 시 필요한 친부 관련 서류를 친부의 협조 없이도 재외공관을 통해 발급하는 지침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한다. 제이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정당하게 국민으로 대우받을 수 있게 될 때까지 필자와 <이주민지원센터 친구>는 제이와 제이의 가족들을 도울 계획이다.

필자는 유전자검사를 받으러 잠시 한국에 들어왔던 제이를 만났던 날 보았던 제이의 맑은 눈빛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어린 소년이 자기 이름에 있는 '킴(Kim)'이라는 한 글자의 뿌리를 찾기 위해 바다를 건너 한국까지 왔다. 한국은 심심하다며 친구들이 있는 필리핀에 돌아가고 싶다는 제이에게 아버지를 만나고 싶냐고 물었다. 제이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필자는 변호사로 일하는 8년간 수많은 사건을 경험했지만 사건이 끝나고도 선명히 기억나는 사건은 의외로 많지 않다. 이 사건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제이의 맑은 눈망울과 함께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제이를 다시 한국에서 만날 날을 기대해 본다.
   
임애리 변호사  법무법인 덕수, 친구 법률자문단
▲ 임애리 변호사  법무법인 덕수, 친구 법률자문단
ⓒ 이주민센터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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