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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0월 6일 오후 8시 21분]

교통수단이 열악했던 19세기 말, 섬을 떠나 육지로 바깥물질을 떠날 때 좀녀들은 그 험한 제주도의 바닷길을 어떻게 건너갔을까?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짧은 스토리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1887년 3월, 어두운 밤바다를 가르며 쉬걱쉬걱 노를 젓는 소리와 좀녀들의 힘들어하는 소리가 바람에 날려간다. 순간 마파람이 샛바람으로 바뀌자 고치비(고씨 집) 어른이 모두에게 노를 거두게 한다. 그러자 좀녀들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이물 쪽 작은 돛의 아딧줄을 당기고 고물 쪽 큰 돛의 아딧줄을 잡아당기자 샛바람이 밀어주는 힘으로 배는 쏜살같이 육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제주도 고향을 떠나온 지 일주일이나 지났다. 거센 비바람이 이틀이나 계속되어 일정보다 많이 늦어졌다. 물로 뱅뱅 돌아진 섬에서 태어나 바닷속에서 숨비며(해산물 채취) 살아왔지만 이렇게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맞아가며 배에서 일주일을 견디는 일은 몇 년이 되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바닷길에 노련한 고치비 삼춘 덕분에 고기밥을 면할 수 있어 다행이다.

'어~이!' 어슴푸레 해가 밝아오자 고치비 어른이 소리친다. 그러자 저쪽에서도 '어이!', 또 저쪽에서도 '어이!', 또 저쪽에서도 '어이!', '어이!' 하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돌아오자 다섯 척의 배 안에 꼭꼭 끼어 앉은 예닐곱 명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샛바람이 이대로만 불어준다면 오늘 저녁 무렵이면 강진에 도착할 것이다. 작년에도 다섯 척의 배가 출발했지만 두 척은 비바람에 전복되어 모두가 고기밥이 되었고 이틀 후 바다에 둥둥 떠내려온 테왁을 붙들고 오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부디 이번 바깥물질에는 모두가 무사히 고향 제주도로 돌아갈 수 있기를…

아침햇살을 받으며 얼마 남지 않은 조밥과 소금된장 그리고 받아놓은 빗물을 식수 삼아 간단한 식사를 마친다. 지난달에 해산한 순녀는 젖이 도는지 누빈 겹저고리 안으로 손을 넣더니 돌아앉아 눈물을 훔친다.

고치비 어른의 설명에 따르면 올해부터는 울산에서 우미를 조물어(천초를 채취하여) 일본의 해조 무역상에게 팔 예정이라고 한다. 우미(천초)는 전복이나 해삼보다 작업하기도 쉽고 값도 많이 쳐준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목돈 좀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6개월의 바깥물질을 마치고 가을에 고향 제주로 돌아가서는 가족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싶다는 희망으로 좀녀들 모두 이를 악물며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내자고 굳게 마음먹는다.


19세기 말 제주도 좀녀의 바깥물질

위의 상황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좀녀가 바깥물질을 나서기 위해서는 우선 험한 바닷길에 목숨부터 걸어야 했을 정도로 상황이 절박했다. 1887년에 대마도 출신의 후루야 리쇼(古屋利渉)를 비롯한 잠수기 어업자들이 제주도 어민을 살해하고 가축을 강탈해가는 등 남획과 횡포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바깥물질 초기에는 주로 경남의 울산을 중심으로 물질(해산물 채취)했는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천초의 수출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정부가 임진왜란 이후 유일하게 부산의 초량에만 왜관을 두고 일본에게 개항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아래의 도표를 보면, 1888년부터 1891년까지 4년 동안 부산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일본 해조무역상들이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미국, 캐나다, 인도, 호주, 중국 등 세계 각국으로 천초를 수출하면서 4년 동안 수출금액이 5배로 급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888-1891년 일본해조무역상의 천초 수출 현황 開澤明淸 朝鮮近海漁業視察 外務省通商局 第 課[伊地知紀子, 2011,81쪽 재인용]
출처 : 식민지시대 한.일해역의 자원과 해녀의 이동(논문)/ 안미정
▲ 1888-1891년 일본해조무역상의 천초 수출 현황 開澤明淸 朝鮮近海漁業視察 外務省通商局 第 課[伊地知紀子, 2011,81쪽 재인용] 출처 : 식민지시대 한.일해역의 자원과 해녀의 이동(논문)/ 안미정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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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시 말해, 제주도 좀녀들이 1887년부터 울산에서 본격적으로 바깥물질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위와 같은 기록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참고로 그 이전까지 울산 지역에 좀녀라는 여성 전문 직업인은 없었고 현재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해녀는 19세기 이후 바깥물질에서 타지에 정착한 좀녀의 수가 늘어나면서 형성된 것이다.

조선 시대에 경남과 전남 지방에서 좀녀의 흔적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15세기부터 제주도 사람들이 남해안에 몰려들어 선상난민 생활을 할 때, 좀녀들이 해안가에서 해산물을 채취해서 생계를 이어갔기 때문이며 16세기 본도 쇄환 정책과 더불어 출륙금지령(1629-1834)이 내려진 이후 남해안에서 좀녀의 흔적은 서서히 지워져 갔다. 이 부분에 대한 역사는 추후 조선 시대의 좀녀 역사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20세기 초 해외로 수출하는 해산물 중에서 천초와 감태의 수요가 가장 많았는데 울산이 전국의 70%에 달할 정도로 어장이 풍부했다. 천초는 양갱과 아이스크림, 케이크 등의 식자재료로 쓰였고, 러일전쟁(1904)과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의 와중에는 군수품을 만드는 접착제의 화학 원료로 사용되었으며, 감태는 요오드 성분이 많아 빨간약으로 유명한 소독약의 의학 재료로 사용되었다.

1년 어획 판매액 130만 엔... 그러나 좀녀 한 달 수입은 18엔
 
20세기 초 좀녀의 어획고 제주도 좀녀의 바깥물질 공동판매금액과 좀녀의 개인당 소득 현황. 1920년~1933년까지 좀녀의 어획고에 따른 판매 금액.
▲ 20세기 초 좀녀의 어획고 제주도 좀녀의 바깥물질 공동판매금액과 좀녀의 개인당 소득 현황. 1920년~1933년까지 좀녀의 어획고에 따른 판매 금액.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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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일제강점기 이후, 바깥물질을 나오는 제주도 좀녀의 수와 더불어 해산물의 어획량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는데 학술서적 및 언론 등의 여러 자료를 모아 도표를 만들어 보면 위와 같다. 
                       
오른쪽 부분은 왼쪽의 자료를 바탕으로 좀녀 1인당 한 달 소득을 계산해서 추가한 내용이며, 현 화폐가치는 한국은행 경제통계 시스템(http://ecos.bok.or.kr/)에서 제공하는 '화폐가치 계산' 프로그램을 활용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한 동영상 참조)

위의 자료 중에서 당시 가장 높은 어획고를 보이는 1933년 <동양수산신문>의 기사 내용을 하나의 예를 들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3년 10월 5일자 동양수산신문 기사
▲ 1933년 10월 5일자 동양수산신문 기사
ⓒ 동양수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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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당시 제주도 좀녀 1만2천 명이 바깥물질에서 일궈낸 어획량이 130만엔 이상의 거금이며 따라서 해녀의 활약이 제주도의 경제계를 좌우할 뿐 아니라 우리 조선 수산계의 일대 영웅이다."

그러나 정작 이 기사를 토대로 좀녀의 수익을 계산해 보니 좀녀 한 사람당 수입이 108엔이며 이것을 또 6개월의 바깥물질 기간으로 나누면 한 달에 18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4년 쌀 한 가마니의 가격이 21엔 22전(동아일보 1934.06.09기사)이었다고 하니, 당시 18엔이 어느 정도의 경제적 가치가 있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좀녀의 실소득액이 판매금의 20% 정도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기사(오사카 아사히 신문, 1930.05.16)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30년 5월 16일 오사카 아사히 신문기사
▲ 1930년 5월 16일 오사카 아사히 신문기사
ⓒ 오사카 아사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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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무도 비참한 해녀의 수입
"(중략...) 해녀들이 채취한 해조류는 모두 조선해조회사가 판매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그 수수료로서 채취액의 5할(50%)을 떼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1할 8부(18%)는 해당 지역의 어업조합이 걷어간다. 그리되면 잔액 3할 1푼 2리(31.2%)만이 해녀에게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게 끝이 아니다. 그중에 선부들의 임금과 그 밖의 잡비까지 지출하고 나면 실수입은 2할(20%) 안팎밖에 되지 않는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당시 조선해조(주)도 일본인이 운영하였고 어업협동조합 역시 조선총독부 산하였으며 돈이 되는 풍부한 어장은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하여 비싼 입어료를 챙겼으니 결국 좀녀 수익의 70%를 일본이 착취해 가는 셈이다.

참고로 해방 이후, 1970년대 바깥물질에서 좀녀와 전주간의 소득액 분배는 6대4 혹은 5대5였으며 육지를 오가는 뱃삯과 조합비 및 입어료 그리고 타지에서의 의식주 등 모든 경비를 전주가 부담하였다. (우도의 김수자 좀녀 인터뷰)

또한 2019년 제주도 수협의 자료 제공에 의하면 좀녀가 채취한 해산물 판매금액 중 수협에서  4.5%의 판매 수수료로 제외하고 나머지 95.5%의 금액을 입금해 준다고 하니 20세기 초 일본의 노동력 착취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학계에서는 좀녀가 바깥물질을 통하여 꽤나 많은 목돈을 챙긴 것으로 주장하는가 하면 바깥물질의 역사적 배경 역시 활동무대가 좁아서 떠난 것이라고 일축한다.
 
"그들의 수입은 1일 평균 50~60전으로부터 2~3원에 이르러 그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막대한 것이다.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 「濟州道生活狀態調査」> "

"이들 해녀는 이 섬만으로는 활동무대가 좁다고 경상남·북도로부터 강원·황해·함경도는 물론 중국까지도 출동하기에 이르렀다. <마에다 겐지(前田善次)/ 「文敎의 朝鮮」>

하지만 이것은 험하기로 유명한 제주도의 바닷길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지금이야 비행기도 있고 안전한 운항선이 있지만 당시 제주도는 출륙금지령(1629-1825)이 해지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기에 탐라국이 해상무역을 하던 배의 흔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따라서 좀녀는 그 험한 바닷길을 건너기 위해 작은 돛단배에 몸을 의지하고 손이 부르트도록 몇 날 며칠 동안 노를 저어가며 바다를 건너야 했다. 따라서 풍랑이라도 만나면 고기밥을 면치 못할 정도로 바다에 목숨부터 내 걸어야 했던 절박한 상황을 두고 바깥물질을 떠난 이유가 '제주도의 활동무대가 좁아서'라는 주장은 어이없다.

일제강점기 사료의 대부분이 일본인에 의한 기록이기 때문에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잘못된 해석을 수도 없이 가지치기해 놓아서 혼동을 초래한다. 그래서 '활동무대가 좁아서'라느니, '인구가 급증해서 육지로 바깥물질을 나간 것'이라는 등의 황당한 해석으로 포장해서 '메이지 정부의 잠수기 불법 남획과 횡포'의 역사를 뒤로 감추고자 한다. 또한 좀녀의 소득을 과장해서 정작 소득액의 20%에 불과할 정도로 노동력을 착취하였던 당시의 상황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한다.

따라서 다음 시간에는 일본이 운영한 해조무역상이 고금리 사채놀이를 하며 좀녀를 그들의 조직에 묶어 두고 빚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였던 비열한 수법과 이를 구제하기 위해 제주도의 유지들이 발벗고 나서 만든 '제주도 해녀 어업조합'의 형성 과정에 대해도 자세하게 정리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제주해녀와 일본아마 비교 연구 | 제주해녀박물관』 , 『제주여성사료집2 | 제주발전연구원』 ,『식민지시대 한일해역의 자원과 해녀의 이동 | 안미정』 , 『잠수의 역사와 출가물질의 요인 | 김영, 양징자 | 정광중, 좌혜경 옮김』 , 『제주해녀문화 실태조사 및 지속가능한 보전 방안 | 좌혜경, 강정식』 , 『울산 역사 속의 제주민 | 안미정, 좌혜경』 , 『순이삼춘 | 현기영』 , 『제주도 | 이즈미 세이치』 , 『동양수산신문』 , 『오사카 아사히 신문』 , 『동아일보』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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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우도에서 살고 있는 사진쟁이 글쟁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