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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앞바다에 나타난 일본 어선의 정체

1879년 4월, 제주도의 앞바다에 일본 어선이 한 척 다가온다. 제주도 어민의 반응은 예민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왜구가 다시 출몰한 것일까? 배를 몇 척 띄워 일본의 어선 가까이 다가가서 큰 소리로 알려준다.

"여기는 조선의 제주도 바다이다. 이곳에 닻을 내리고 조업하는 것은 불법이므로 돌아가라!"

그러나 일본의 어선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대신 공포탄을 쏘아 올려 제주도 어민들이 혼비백산하고 만다. 

잠시 후, 일본의 어선에서 한 남자가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나타난다. 그의 주위에는 몇몇 사람들이 마치 시중드는 것처럼 그를 부축하고 있다. 남자가 둥근 헬멧을 머리에 걸치고는 배에 매달린 줄사다리를 타고 바다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헬멧의 기다란 가죽 끈이 네모난 기계에 연결되어 있다.  
 
일본 잠수기 어업자 1879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바다 침략
▲ 일본 잠수기 어업자 1879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바다 침략
ⓒ 런던 일러스트레이트 뉴스,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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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덩!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장비를 갖춘 남자가 바다에 들어간다. 제주도의 어민들 역시 자리를 뜨지 않고 그들의 행동을 눈여겨 살펴본다. 바다에 들어간 사람은 나올 줄을 모른다. 배 위에서는 몇몇 남자들이 네모난 기계 옆에 달린 둥근 굴레 같은 것을 열심히 돌리고 있다. 

3시간쯤 지나니 바다에 들어갔던 사람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와 함께 올라온 커다란 그물 속에 싱싱한 전복이 1백 관(400kg) 정도나 들어 있어 제주도 어민들은 경악하고 만다. 아무런 기계장치 없이 바다에 들어가 물질(해조류 채취)하는 제주도 좀녀(해녀)들 수백여 명이 하루에 채취할 수 있는 양이다.
 
1879년 부터 시작된 일본의 잠수기 어업  일본의 잠수기 어업자들은 제주도의 앞바다에서 주로 전복과 해삼을 남획하였다.
▲ 1879년 부터 시작된 일본의 잠수기 어업  일본의 잠수기 어업자들은 제주도의 앞바다에서 주로 전복과 해삼을 남획하였다.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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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어민들은 엄청난 양의 전복을 불법으로 채취하고는 유유히 사라지는 일본 어선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장칼과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어민들에게는 변변한 무기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잠수기의 역사

당시 제주도 어민들이 생전 처음 본 이상한 복장의 이름은 잠수기(潛水器)이다. 잠수기란 잠수복과 헬멧을 갖추고 공기 호스를 연결한 뒤 수중으로 들어가 작업할 수 있게 하는 장비를 일컫는 말이다. 1819년 독일 출신의 영국 엔지니어인 어거스트 시브(Augustus Siebe)가 공기 공급식 헬멧을 개발하면서 잠수기가 활성화되었다. 
 
 (좌) 잠수기, (우) 어거스트 시브
 (좌) 잠수기, (우) 어거스트 시브
ⓒ 커먼 라이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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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항구를 축조하거나 선박이나 군함의 수리 혹은 침몰된 배에서 물건을 꺼내 오는 일 등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1866년, 요코하마에 정박해 있던 영국 탄약 창고선의 밑바닥을 잠수기 업자가 수리하고 있을 때, 마스다 만요시(增田万吉)란 자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잠수기를 이용하여 일본 내에서 사업하면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업 구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마스다는 치바현(千葉県)에 사는 모리 세이기치로(森精吉郞)를 만나 사업의 구체적인 방안을 설명하며 설득했다. 마스다는 잠수기를 제공하고 모리 세이기치로는 치바현의 바다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양자 간에 계약서까지 작성했다. 당시 잠수기 한 기의 가격은 650엔이었다. 두 사람은 예상대로 큰돈을 벌게 되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치바현을 비롯하여 홋카이도와 시즈오카, 미에현 등으로 잠수기 어업이 우후죽순처럼 성행했다. 하지만 피해도 컸다. 잠수기 업자 한 사람이 하루에 잡아 올리는 전복과 해삼의 양이 평균 300Kg일 정도로 남획을 계속해서 일본의 해양 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어민과 해녀들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결국 메이지 정부의 수산국은 잠수기 어업에 대한 규제를 시작한다(房総の潜水器漁業史 | 大場 俊雄 | 1993.5.25).

전술하였듯이, 1879년 제주도의 앞바다에 나타나 전복을 도둑질해 간 사람은 일본의 야마구치현(山口県)에 사는 요시무라 요사부로(吉村 與三郎)이다. 하지만 일본 학계 일각에서는 요시무라를 '제주도에 진출한 잠수기 어업의 선구자(조선수산개발사/요시다 케이이치)'라고 추켜세우는 한편, '잠수기 어민의 조선출어가 조선 식민지화 정책의 일환이며 조선에 어업기술을 전수해준 것이다'(잠수기어업의 도입과 조선해출어/이소모토 히로노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맺은 후이므로 일본 어선의 조업은 합법'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일명 강화도 조약으로 알려진 조일수호조규는 1868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며 조선에 보낸 서계(書契)가 8년만에 접수된 것에 불과하며, 조약의 내용에는 통상과 통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전혀 없다. 조선정부가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등 네 군데의 해역을 열어준 것은 1883년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이후이고 제주도에서의 어업권을 획득한 것은 1889년 조일통어장정 이후부터이다.

하지만 전술하였듯이 1879년부터 시작된 일본 잠수기의 불법 조업으로 제주도의 앞바다는 초토화되었을 뿐 아니라, 잠수기 어업자들은 바다를 지키고자 하는 어민들을 살해하고 가축을 강탈하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메이지 정부의 잠수기 어업자들이 제주도의 앞바다를 침탈한 행태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 현재 국제 해양법(1982)에 준하여 영해를 침범한 불법조업은 나포(拿捕)되어 법적인 처벌을 받듯이 19세기에도 이에 준하는 만국공법(萬國公法)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 헨리 휘턴(Henry Wheaton)은 이렇게 단언한다.  

"외국의 영해(領海)에서 조업을 할 때는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절차를 밟지 않고 해상에 진입하여 불법조업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은 해적으로 간주한다. 해적은 문명국가 공통의 적이며, 도적질하는 해적이 자발적으로 모인 조직은 국가라 이름할 수 없다."

일본인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 시기를 묻는다면 대부분 메이지 정부를 꼽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현재 일본의 지폐에 등장하는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1876.11.24~1928.5.21/1000엔),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1872.5.2~1896.11.23/5000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10~1901.2.3/10000엔) 등은 모두 메이지 시대의 인물이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의 초기 민낯은 만국공법의 저자 헨리 휘튼의 표현에 모두 담겨있다. 문제는 1879년 요사부로로부터 시작된 이들의 잠수기 불법조업 혹은 해적질로 말미암아 제주도의 앞바다가 초토화되었다는 사실이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기 무려 31년 전부터 제주도는 바다를 먼저 침탈당한 것이다. 
 
나라보다 먼저 바다를 빼앗긴 제주도 1879년부터 시작된 잠수기 어업의 불법 남획으로 제주도의 해양자원이 고갈되어 제주도의 좀녀들은 1887년부터 고향을 등지고 육지로 바깥물질을 떠났다.
▲ 나라보다 먼저 바다를 빼앗긴 제주도 1879년부터 시작된 잠수기 어업의 불법 남획으로 제주도의 해양자원이 고갈되어 제주도의 좀녀들은 1887년부터 고향을 등지고 육지로 바깥물질을 떠났다.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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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정부가 자행한 불법 남획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제주도의 바다에서 삶을 일구며 살아가던 좀녀(潛女, 해녀)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 잠수기 어업자의 횡포와 해양 자원의 고갈로 인하여 더 이상 제주도의 앞바다에서 물질(해산물 채취)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1887년부터 고향을 떠나 물질할 수 있는 바다를 찾아 전라도와 경상도 등으로 길을 나선다. 이른바 '바깥물질'이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1879년 제주도의 앞바다에 출몰한 요사부로를 '제주도에 진출한 잠수기 어업의 선구자'라고 칭하거나,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맺었으니 합법적인 어업'이라거나, '조선에 새로운 어업 기술을 전수한 것'이라는 주장을 할 것이 아니라, 제주도의 바다를 불법으로 빼앗아 해양경제를 수탈한 30여 년의 세월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해야한다.

* 일반적으로 알려진 해녀라는 호칭은 제주도에서 좀녀(潜女), 혹은 좀수(潜嫂)라 호칭하므로 이 글에서는 좀녀로 통칭하고자 합니다.

* 바깥물질은 일반적으로 출가(出稼)물질이라고 합니다. 출가란 일본어 데카세기(出稼ぎ)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집 떠나 돈벌이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글의 주제인, 일본 어민들이 잠수기를 동원해서 제주도에 불법 조업을 하러 온 것도 데카세기이고, 여기서 다루지는 않지만 일본의 해녀들이 조선의 남해안 등으로 해조류 채취를 위해 바다 건너 온 것도 데카세기로 표현하며, 메이지 정부가 일본 어민들을 조선으로 대거 이주시키는 과정에서도 데카세기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19세기, 일본의 데카세기 현상으로 인하여 제주도의 바다가 초토화되었고 이에 대한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좀녀입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은 1887년부터 고향을 떠나 전라도와 경상도 등으로 바다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좀녀 세계에서는 이를 두고 <바깥물질>, <베꼍물질> 혹은 <육지물질>이라고 부릅니다. 데카세기와 바깥물질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으로 나뉘어 서로의 반대편에 있는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바깥물질>로 통칭하고자 합니다. 


* 다음 편에서는 생계를 위해 타향살이를 하던 제주도의 좀녀들이 또 다시 일본의 해조무역상들로부터 노동력 착취를 당하고, 결국 1932년 제주도 좀녀 항쟁의 도화선을 만드는 역사를 다룰 예정입니다.
 
1933년 10월 5일자 동양수산신문 기사 해녀의 1년 어획고는 135만 엔 이상의 거금이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 1933년 10월 5일자 동양수산신문 기사 해녀의 1년 어획고는 135만 엔 이상의 거금이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 동양수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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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 『제주도 | 이즈미 세이치』 , 『조선수산개발사 | 요시다 케이이치』, 『房総の潜水器漁業史 | 大場 俊雄』, 『만국공법에 나타난 해양법 | 조세현』, 『개항전 한일관계의 변화에 대한 고찰 | 현명철』, 『일본의 어업수탈과정에 대한 고찰 | 강상택』, 『통감부의 어업 이민 장려와 어업법 제정 | 이영학』, 『조선왕조실록 | 국사편찬위원회』, 『잠수기어업의 도입과 조선해출어 | 이소모토 히로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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