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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창업이 붐이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아마도 그 이면엔 취업난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청년 창업이 이점이 더 있는 건 절대 아니다. 매너리즘에선 자유로울 수 있지만 경험에선 오히려 밀린다.

자본주의는 꿈과 노력이 보인다고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을 만큼 냉혹하다. 웬만한 중소기업 아이템에 대기업이 다 진출해 있는 대한민국에서 청년창업은 정부가 밀고 있는 상황과 달리 온통 약점 투성이다. 그렇다면 청년 창업이 취해야 할 남다른 창업 자세는 무엇일까?

최근 서울 중구의 한 골목에 위치한 와인바에서 '청년 아로파'라는 이름으로 모인 청년 열 명의 대단한 도전을 목격했다. 중구 저동 와인바 '십분의일'이 그곳이다. 가게를 홍보하는 기사가 아니므로 음식 맛이 어떠니 가격이 저렴하니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들이 창업을 하는 시스템이다.

청년 열 명이 공동주주가 되어 만든 '인기 와인바'
 
별 인테리어가 없는 심플한 실내 공간에 이삽십대 젋은이들이 붐빈다
▲ 와인바 "십분의일" 실내 전경 별 인테리어가 없는 심플한 실내 공간에 이삽십대 젋은이들이 붐빈다
ⓒ 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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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인쇄소 골목이라 불리던 곳의 어느 건물. 서울에 이런 건물들이 아직 있었나 싶을 정도로 허름한 건물들이 좁은 골목 좌우로 이어지더니, 어느 지점에 의외의 장소가 있었다. 2층 매장으로 들어가는데 1층엔 간판도 없다. 1층 입구엔 언뜻 보면 이전 가게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허름한 광고 글씨가 그대로 붙어 있다. 자세히 보니 맥주와 와인을 판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가게의 콘셉트가 일차적으로 노출되는 부분이다. 콘셉트에 따라 광고 글씨를 촌스럽게 연출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좁은 계단을 한층 오르고 철문을 열어젖히자 신천지가 펼쳐진다. 일제시대 건물인 것을 입증하듯 천정엔 서까래가 그대로 있고 벽은 고작 시멘트마감이 전부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인위적으로 몇 군데 배치되어 있는 게 인테리어의 끝이다. 그런 곳에 20~30대 여자 손님들이 테이블을 꽉 채우고 있다.

왜일까? 어떤 매력 때문에 이 가게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걸까?
  
아주 오래된 가게같은 느낌을 연출하고 있다.
▲ "십분의일"입구의 허름한 모습 아주 오래된 가게같은 느낌을 연출하고 있다.
ⓒ 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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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와인바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들이 와인을 소비하는 것 같진 않다. 도시재생 붐을 타고 명소가 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 그런 명소라면 이들이 소비하는 건 결국 공간이다. 낯설고 이색적이면서도 전혀 불결하지 않은 오래된 공간을 소비하고 있는 듯하다.

이곳에 간 날 필자는 와인을 입에 대지 않아 평이 불가하나, 동반자들의 평이 나쁘지 않았다. 그다음 안주는 치즈에 깻잎을 곁들인 게 나왔는데 이것 역시 나쁘지 않은 조화였다. 깻잎이라는 아주 한국적인 허브에 서양의 치즈가 만나 탄생한 퓨전 안주였다. 홍보성 기사를 쓰지 않기로 했으니 음식에 대한 평가는 현재로서는 딱 거기까지만 가능하다.

그 대신 언급하고 싶은 것은 가게를 만든 10명의 청년들이 가진 이 사회를 대하는 태도다. 필자도 그들에 못지않게 치열하게 살아온 기성세대지만, 나이를 불문하고 존경을 표하고 싶을 정도다.
  
십분의일에서 제공하는 이색적인 안주
▲ 깻잎과 치즈의 만남 십분의일에서 제공하는 이색적인 안주
ⓒ 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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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의 청년들이 처음부터 창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새로운 형태의 경제 공동체였는데 창업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현재 '십분의일'을 맡고 있는 이현우(33) 사장은 드라마 제작사 프로듀서 출신으로 2016년 초 모임이 처음 만들어지던 당시 4인의 창립 멤버 중 한명이었다. 경제공동체 준비작업이 2월에 바로 시작되었고 7월 건물임대계약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이 사장이 '십분의일'의 대표를 맡았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현재의 와인바를 오픈하게 되었다. 마침 이 사장은 드라마 대본 공모 준비 때문에 다니던 제작사를 그만둔 상황이었다고 한다. 현재 '청년 아로파'의 멤버는 10명으로 늘었는데, 10명의 젊은이 중에서 가장 먼저 창업을 한 셈이었다. 

매장에서 만난 이현우 사장은 30대지만 아직 앳돼 보였다. 전직 드라마 제작 프로듀서답게 다양한 자료 조사를 거쳐, 매장 인테리어마저 셀프로 뚝딱 해결했다고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혼자만의 사업을 창업한 것도, 혼자의 힘으로 창업을 한 것도 아니었다. 젊은 패기와 아이디어가 돋보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가게는 이현우 사장 혼자만의 노력과 투자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열 청년의 '남다른 꿈의 결정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 명은 친한 친구이자 직장인이다. 이들은 각자 한해 연봉의 십분의 일씩을 출자했다. 급여에 따라 많이 내기도 하고 적게 내기도 하지만 지분율은 동등하다. 사업장 대표들의 연봉은 각자 다르다. 사업 초창기엔 월급이 상당히 낮았지만 현재는 전체의 실적이 좋아 연봉이나 인센티브가 좋아진 편이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대표들의 연봉은 본인이 다닌 직장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더 많을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멤버들은 매월 한 번 정도 주말에 만나 가게 운영의 문제개선, 새로운 변화의 방향을 협의한다. 지금은 매월 수익이 나면 배당도 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창업을 위해 여전히 급여의 '십분의 일'을 매월 출자하고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창업 방식은 언뜻 보아서는 주주가 여러 명인 공동창업일 뿐이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남다른 점이 보인다.
    
청년 아로파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메뉴판
▲ "십분의일"의 가치관 청년 아로파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메뉴판
ⓒ 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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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파' 정신을 창업에 접목... 2년간 세 명 창업 

'청년 아로파'의 모델은 자본주의에 따르면서도 자본주의답지 않은 면이 있다. 대주주가 없는 상태에서 공동주주에 의한 경영이 이루어진다. 경영권 분쟁이 없다. 일반적인 창업과 달리 창업자 혼자 모든 손해를 뒤집어쓰고 망할 일이 없다. 그만큼 실패해도 재기가 어렵지 않다.

먼저 창업한 이가 있고 모든 문제를 같이 고민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멤버는 창업 준비가 저절로 되는 셈이다. 멤버들은 단순히 투자자들이 아니라 이 사업의 주체로 서게 되는 것이다. 쉰 살에 육박한 필자의 세대들도 비슷한 아이디어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주변에 그런 식으로 성공한 이들은 없다.

동업한 경우는 있고, 근사한 창업 아이템으로 벤처투자를 받기도 하지만, 뒤끝이 항상 장밋빛이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의 시도는 분명 선배들의 실패를 거울 삼고 있으며, 그래서 선배들이 생각지 못한 창업모델이다. 30대 초반의 이 청년들의 발칙하고도 멋진 상상력과 도전에 경의를 표한다.
  
아누타 섬 사람들의 어업은 자신의 식량이 아니라 부족의 식량을 확보하는 작업이다
▲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아누타섬 사람들 아누타 섬 사람들의 어업은 자신의 식량이 아니라 부족의 식량을 확보하는 작업이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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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아로파'의 멋진 구상은 2012년 SBS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 4부에서 소개된 아누타 섬 아누타 부족이야기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남태평양 뉴기니섬 동쪽 솔로몬 제도의 작은 섬나라 아누타섬. 척박한 환경에 인구 300명밖에 되지 않는 아누타 섬사람들은 여전히 공존과 협동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이 정신을 '아로파'라고 한다. 이들 청년 10명이 자신들의 모임 이름을 '아로파'라고 붙인 이유는 바로 이 정신을 구현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누타섬과 아로파를 소개한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아로파란 연민과 사랑, 협동과 나눔을 뜻한다. 아누타 섬 사람들은 한정된 자원을 공평하게 나누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지혜를 실천하고 있다. 개인은 거대한 자연 앞에 약할 수밖에 없지만, 함께 하면 강하며 개인에게 불가능한 일도 힘을 합치면 가능하게 된다. 이들에게 공동체 구성원들은 모두 가족이다.

그러므로 집안의 가장이 죽어 가족만 남게 된 집들은 부족 전체가 돌본다. 아픈 가족이 있는 집들은 부족 전체의 돌봄을 받는다. 능력을 빙자하여 교만한 구성원을 경계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구성원은 병이 들었다고 생각한다.
 
욕심을 버리고 서로 나누는 것은 '아로파'정신에 의한 것이다.
▲ 아누타 사람들의 "아로파"정신 욕심을 버리고 서로 나누는 것은 "아로파"정신에 의한 것이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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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프로그램 홈페이지에 게재된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의 기획의도는 다음과 같다.
격변의 시대에 던지는 최후의 경고, 이제 인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세계는 1%와 99%의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곪을 대로 곪아 있다.
(이하 생략)
빈부격차와 같은 양극화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류의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로 읽혔다. 아로파 정신이 이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것은 바로 자본주의 대안으로서의 가능성 때문일 거다. 열 명의 젊은이들은 아로파 정신을 자본주의에 접목 시킨 것이다. 그리고 일정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 이현우 사장 외 2명이 더 이런 과정을 거쳐 창업을 했다. 두 번째 창업은 이곳 '십분의일' 근처 맥주전문점이었다. 뒤늦게 출발했지만 첫 번째 창업인 와인바를 능가하는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7월 초 제주도에 게스트하우스가 하나 더 오픈을 했다. 이들의 모임이나 도전 방식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들의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가 기성 질서 속에서 얼마나 더 큰 성공을 해낼지에 대한 기대감이다.

참고로 '십분의일'의 아르바이트 시급은 최고 1만원이다. 아르바이트생은 처음 일을 시작하면 최저임금 8350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성실히 근무하면 3개월마다 인상이 되는데 구체적으로 8350원, 8500원, 9000원, 9500원, 10000원 순으로 오르게 된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들도 대부분 9000원에서 9500원을 받고 있는 장기 아르바이트생들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자영업자들이 힘들다고 아우성이지만, '십분의일'은 이런 사연을 비웃기라도 하듯 최저임금보다 월등히 높은 시급으로 운영되는데도 인건비로 인한 압박이 전혀 없다고 한다.

아르바이트생 사이에 인기가 좋은 가게라는 점, 그리고 일단 일을 하게 된 아르바이트생들이 얼마나 성실할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아마도 임대료, 인테리어 등의 거품이 없고 아로파 정신처럼 구성원들의 욕심이 자제되어 있기에 가능했을 거다. 아로파 정신이 의외로 승부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의 도전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어느 정도로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아로파 정신을 얼마나 구현하는가에 달렸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blog.naver.com/fhuco)와 동시에 게재되는 기사입니다.


태그:#청년창업, #십분의일, #아누타섬, #아로파, #청년아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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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모 방송사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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