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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은담 폭포를 따라 내려가는 기행
 
 중은담 폭포
 중은담 폭포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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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고거에서 설두산까지는 버스로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입구에서 매표를 한 다음 셔틀버스를 타고 설두산 안으로 들어간다. 길은 설두사를 지나 더 깊은 산속으로 나 있다. 버스가 멈춘 곳은 삼은담(三隱潭) 폭포 주차장이다. 삼은담 출입구로 들어가 상은담부터 중은담을 거쳐 하은담까지 내려가면서 폭포를 구경할 예정이다. 그리고 궤도전차를 타고 천장암 폭포로 이동할 것이다.

천장암 폭포는 설두산 최고의 명승이다. 그것은 천 길이나 되는 높은 곳에서 물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천장암 폭포를 보고 나면 케이블카를 타고 천장암 폭포 위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그곳에서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묘고대(妙高臺)를 보고, 천장암 폭포를 위에서 내려다 보기 위해서다. 이들을 보고 나면 길은 설두사로 연결된다. 설두사에서는 최근에 만든 초대형 미륵불과 역사적인 전각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용왕묘의 세 용왕
 용왕묘의 세 용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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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은담 폭포 입구에는 삼은담이라는 현판을 단 건물이 있다. 이곳이 삼은담 폭포의 입구다. 이곳에서 표를 제시하고 들어가면 작은 시내를 건너고 그 아래로 여러 개의 폭포를 볼 수 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상은담, 중은담, 하은담 폭포다. 상은담 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계단이 만들어진 것은 1931년이다. 장제스는 1932년 1월 9일 이 길을 통해 삼은담 폭포를 구경한다.

계단 옆으로 상은담 폭포가 떨어지고 그 아래 상은담 연못이 있다. 연못가에는 용왕묘(龍王廟)가 있고, 그 안에 세 용왕(三龍王)이 모셔져 있다. 이들은 청룡, 황룡, 자룡(紫龍)으로 상중하 삼은담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청룡은 기우담(祈雨潭)인 상은담을 지킨다.

비와 물을 다스려 백성들에게 복을 가져다준다. 그래선지 손에 곡식을 들고 있다. 황룡은 백보탄(百寶灘)인 중은담을 지킨다. 성실하고 신용이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보의 신이다. 그래서 손에 화폐로 쓰이는 말굽 모양의 은(元寶)을 들고 있다. 하은담에 사는 자룡은 학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학문의 신이다. 그래선지 출세의 상징인 홀(笏)을 들고 있다. 

상은담 왼쪽 암벽에는 은담(隱潭)이라는 붉은색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용왕묘 옆에는 용녀소장석(龍女梳粧石)이 있다. 용녀가 머리를 빗으며 화장하는 모습의 바위라는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동해용왕의 태자 청룡이 이곳 상은담을 자주 찾았다.

남해용왕의 공주인 용녀가 그를 사랑해 이곳에서 만났고, 자신을 가꾸기 위해 동쪽 산으로 올라간다. 그녀는 기우담을 거울삼아 자신의 긴 머리를 빗으며 화장을 했다고 한다. 상은담 폭포의 긴 물줄기가 그녀가 빗는 긴 머리칼 모습이라고 말한다.

중은담과 하은담에 남겨진 장제스와 쑹메이링 이야기

상은담에서 중은담으로 가는 길에 금거북이(金龜) 모양의 바위가 있다. 이 거북은 원래 동해용왕의 보물단지를 지키는 문지기였다. 마침 설두산에 큰 화재가 나자 동해용왕이 폭우를 내려 불을 끄게 되었다. 그런데 비가 지나쳐 큰 홍수가 났고, 산중 백성들이 수재를 만나게 되었다.

이에 화가 난 옥황상제가 용왕의 목을 베고 그의 재보(財寶)를 몰수하라고 명령했다. 충성스런 금거북은 자기직무를 다하기 위해 하늘나라 병사들과 싸움을 벌여 용왕을 구출한다. 그리고 보물단지를 등에 업고 이곳에 이르게 된다. 금거북은 전투 중 눈 하나를 잃었으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중은담에 이르면 한옥정(寒玉亭)이라는 정자를 만난다. 찬물이 옥구슬처럼 떨어지는 정자라는 뜻이다. 정자 옆 바위에는 송나라 시인 매요신(梅堯臣)의 오언절구 2행이 새겨져 있다. 내용을 보니 이 시구에서 정자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산 위로부터 폭포가 날 듯이           山頭出飛瀑
떨어져 차가운 옥구슬소리를 낸다.   落落鳴寒玉


중은담 폭포는 높지는 않지만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좋다. 폭포 바위에 식물과 어류 화석을 있다고 한다. 이 폭포는 1억 4천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본다. 중은담 폭포 아래에는 원앙폭(鴛鴦瀑)이 있다.

여기서 원앙은 앞에서 이야기한 동해용왕의 태자와 남해용왕의 공주다. 이들은 부부가 되어 천년해로하는 폭포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두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을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희롱(雙龍戱珠)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선지 폭포 아래 못은 쌍룡입담(雙龍入潭)이다.

원앙폭 아래로는 인위적으로 보를 막아 또 하나의 폭포를 만들었다. 그리고 취석정(醉石亭)이라는 정자를 만들었다. 취석정 아래 하은담으로 내려가다 보면 기암절벽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석순(石筍)으로 불리는 죽순바위다. 1928년 9월 28일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삼은담을 구경하다가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고 한다.
 
 죽순처럼 생긴 석순봉
 죽순처럼 생긴 석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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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쑹메이링이 장제스에게 "이게 개석이네(此介石也)"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석은 대나무처럼 절개가 있는 바위라는 뜻을 갖고 있다. 장제스의 이름, 절개 있는 사람, 죽순처럼 생긴 모습 세 가지를 나타내는 중유적인 표현이다. 이에 장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바위는 석순봉(石筍峰)으로 불린다. 석순봉을 지나면 하은담 폭포가 나온다.

하은담 폭포는 장제스가 고향을 떠나 대만으로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다. 그때가 1949년 4월 15일이다. 부하인 쥐징(居正), 추지아화(朱家驊), 수렌치우(蘇紉秋) 등과 삼은담과 천장암 폭포를 구경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성공 후 너무 늦게 은퇴하지 않으리'라는 구절이 절절하다.
 
 하은담 폭포와 장제스 시구
 하은담 폭포와 장제스 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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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두산 명승이 동남으로 지나가니                雪山名勝夸東南
삼은담에 이르지 않고는 기경을 본 게 아닐세. 不到三潭不見奇
내가 임천과 더불어 옛날에 맹세한 바가 있어  我與林泉盟在昔
성공 후 은퇴하는 일이 너무 늦지 않으리.       功成退隱莫迟迟


천장암 폭포로 가는 길
 
 설두산 행복열차
 설두산 행복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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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이제 비운교(飛雲橋)를 지나며 인간계로 내려간다. 인간들이 사는 곳에는 대나무 군락이 있다. 그래서 이곳을 죽향계구(竹鄕溪口)라 부른다. 계구가 대나무의 고향이라는 뜻이다. 대모죽(大毛竹), 수죽(水竹), 뇌죽(雷竹)이 유명하다. 이어서 등운교(騰雲橋), 사은담(四隱潭)을 지나 잠룡교와 구룡교로 이어진다. 상은담에서 계류를 따라 내려오면서 흐르는 물줄기를 용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마지막에 궤도차를 탈 수 있는 행복열차역이 있다.

이곳 행복열차 서역에서 열차를 타고 동역으로 간다. 그곳에서는 천장암 폭포를 향해 걸어 올라간다. 천장암 폭포는 이름 그대로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수량이 적어 장쾌한 맛은 없지만, 물줄기가 비단처럼 하늘거리며 내려온다. 폭포는 아래서 위로 올려다 볼 때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다시 앙지교(仰止橋)를 지나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묘고대로 올라가는 케이블카역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5-6분 정도 올라가면 묘고대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우리가 탔던 열차의 궤도, 천장암 폭포, 산간 마을, 정하호(亭下湖)를 볼 수 있다. 정하호는 계구진 상류 정하촌에 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겨난 인공호수다. 이 호수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묘고대다. 우리는 케이블카에서 내려 묘고대로 향한다.

묘고대에서 장제스의 영욕을 알게 되다

 
 묘고대
 묘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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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고대는 1927년 장제스에 의해 설두산 천주봉에 만들어진 별장이다. 2층 누각 형태로, 1층에 사무실 겸 회의실이, 2층에 응접실과 침실이 있다. 누대 2층에 장제스가 쓴 묘고대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누대 앞에는 불탑이 있고, 중정을 지나 정문을 나가면 앞마당에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는 정하호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묘고대는 설두산 최고의 조망대이자 피서별장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제스가 정치무대에서 밀려날 때마다 찾는 영욕의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는 장제스의 정치경력을 보여주는 서류와 문서,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장제스의 삶은 1910년 쑨원(孫文)을 만나면서 혁명의 길로 접어든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건립되었으나, 수구세력인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북양 군벌의 힘을 빌려 정권을 탈취했다.

1923년 장제스는 쑨원에 의해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고, 대원수로 본영 참모장이 된다. 그는 1925년 쑨원의 사후 국민당의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했고, 1926년 중화민국 혁명군 총사령이 된다. 1927년 4월에는 북벌에 성공하고 남경을 수도로 하는 정부를 수립했다.
 
 묘고대 통신실: 왼쪽 장제스 사진
 묘고대 통신실: 왼쪽 장제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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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는 1927년 12월 1일 쑹메이링과 결혼하면서 이곳 묘고대를 찾게 된 것이다. 이때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1936년 시안사변, 1937년 중일전쟁 등으로 장제스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중국공산당과 권력투쟁을 벌여야 했다.

1949년 1월 정치무대에서 물러나 다시 묘고대를 찾는다. 이때 묘고대는 막후 지휘소 역할을 했다. 그 때문에 각 방은 기밀실, 통신실, 회의실로 사용되었다. 이들 방에서 우리는 고뇌하는 장제스와 활짝 웃는 쑹메이링의 사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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