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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열린 토론, 미래: 대안찾기’ 토론회. 오른쪽에서 2번째가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
 2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열린 토론, 미래: 대안찾기’ 토론회. 오른쪽에서 2번째가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
ⓒ 정진석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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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무서운 침묵을 본받자'는 주장이 지난 23일 오전 국회에서 나왔다. 정진석·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이 공동 주관한 '열린 토론, 미래: 대안찾기' 토론 모임에서다.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린 이 토론회에는 '방치되고 있는 한일관계, 타개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박철희 서울대 교수가 기조발제자로 초청됐다. 이날 정진석 의원은 모두발언에서 '우리도 베트남처럼 일본한테 사과나 배상을 요구하지 말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힘써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아래와 같이 베트남의 사례를 들었다.
 
"베트남은 1940년부터 73년까지 30여 년 동안 일본으로부터 침공받고, 프랑스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미국과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겪었고 중국과 갈등을 겪었다. 이렇게 해서 전체 인구 10%인 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가 과거 자신을 침략하고 학살했던, 또 식민지배했던 미국·프랑스·일본·중국에게 사과나 보상을 요구했다는 기록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30년 넘게 일본·프랑스·미국의 침략을 받고 중국과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국민 700만 명을 잃었지만, 베트남이 사과나 보상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 뒤 정 의원은 "이런 무서운 침묵은 그 후 국제사회에서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라며 "우리보다 훨씬 가혹한 역사와 처절한 고난을 겪었던 베트남이 취하는 자세와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주는가 생각해보는 아침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정 의원의 발언은, 한국 국민들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지지해줌으로 인해 일본의 반발을 사고 있는 지금 상황에 대한 불만의 표시라고 해석할 수 있다. 베트남처럼 '무서운 침묵'을 지키고 한일관계를 안정시키는 편이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게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대안이다. 

"베트남이 사과·보상 요구한 기록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라고?
  
그런데 정진석 의원은 "베트남이 사과나 보상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세계 어디에도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 의원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나라 경우에는, 정 의원과 아주 가까운 곳에 관련 자료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료를 가장 쉽고 가장 많이 검색할 수 있는 곳 중 하나인 국회도서관이 바로 그곳이다.

국회도서관 홈페이지 검색란에 '베트남 일본 배상'이란 키워드를 입력하면, '일본 배상외교 정책의 특징과 전략: 베트남공화국에의 전후배상(1953-1965)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박홍영 영남대 교수의 논문이 나온다.

논문 제목 밑에, 국회도서관이나 협정 기관을 방문하면 원문을 컴퓨터 화면으로 볼 수 있다는 안내문도 있다. 정진석 의원이 이 자료를 얼마든지 검색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국회도서관에서 쉽게 검색되는 관련 논문. 빨간 줄 친 부분을 보면 된다.
 국회도서관에서 쉽게 검색되는 관련 논문. 빨간 줄 친 부분을 보면 된다.
ⓒ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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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논문의 첫 페이지만 읽어봐도 정 의원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주장과 관련된 내용이 논문 1페이지에 언급됐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본은 남베트남과 1959년에 배상협정을 체결하고 1965년까지 전후(戰後)배상을 실시했다. 일본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제공한 전후배상 가운데 가장 늦게 이루어진 것이다.

남베트남에의 배상은 일본 국내에서 매우 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 이유는 첫째, 냉전구조 질서 하에서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기에 '남베트남에만의 배상은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당초 225만 달러 정도로 예상되었던 배상액이 일본과 베트남정부 당국 간의 배상교섭 과정에서 3900만 달러까지 급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일본 정부는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을 일본이 지나치게 후원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한국정치학회가 2000년 발행한 <한국정치학회보> 제34집 3호.
  
1951년, 일본에 배상요구한 남베트남

반미 국가인 북베트남과 달리 남베트남은 친미 국가였다. 일본과도 가까웠다. 그런 남베트남도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일본이 베트남을 지나치게 후원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한테서 배상금을 받아냈다.

남베트남이 가만히 있는데 일본이 알아서 배상해준 것이 아니었다. 박홍영 교수가 제시한 배상교섭 일지에서 알 수 있듯이, 남베트남이 적극 요구한 결과로 일본이 그런 배상을 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이 분단된 상태에서 남베트남에만 배상을 하는 게 타당하겠느냐는 일본 내부의 문제제기에도 아랑곳없이 남베트남인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냈다.

 
 박홍영 논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베트남의 배상 요구.
 박홍영 논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베트남의 배상 요구.
ⓒ 박홍영, 한국정치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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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의원은 베트남인들이 '무서운 침묵을 보여줌으로써 국제사회의 존경을 받았다'고 했다. 베트남인들을 경험해본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정 의원의 말을 듣는다면, 그들의 얼굴 표정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과거 아시아·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했던 유럽 국가들은 아직까지도 배상은 물론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프랑스 같은 나라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사과 및 배상을 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요구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들이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들은 사과·배상을 받을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힘이 없어 못 받고 있을 뿐이다.

베트남이 일본한테는 배상을 받아내면서도, 미국과 프랑스한테는 받아내지 못하는 것은 그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럴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한테 받아낸 것은 당시의 일본이 패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섭이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과·배상 문제의 본질은 '힘'

사과나 배상을 받고 못 받고는 본질적으로 '힘'의 문제다. 베트남이 앞으로 더 강해지면 미국과 프랑스한테도 받아낼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점은 그간 있었던 일들에서도 드러난다. 1995년 베트남-미국 수교 2년 뒤에 있었던 이른바 '하노이 대화'를 일례로 들 수 있다.

하노이 대화는 베트남전쟁 때의 두 나라 당국자들이 과거사 문제를 논의한 회담이다. 지난 2월 북미정상회담이 있었던 메트로폴 호텔에서 1997년 6월 20일부터 24일까지 열린 하노이 대화에는 양국에서 각각 13명씩 참석했다. 베트남전 당시의 외무차관인 응우옌 고 탁과 베트남전 당시의 국방장관인 로버트 맥나마라가 자국 대표단을 이끌고 회담에 자리했다.

전직 당국자들의 회담이긴 했지만, 매우 비중 있는 회담이었다. 만약 베트남이 힘이 조금 더 있었다면 공식 회담으로 끌어올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입장이 아니었기에 전직 당국자들의 회담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형식을 통해서라도 베트남인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미국한테 표시했다는 점이다.

이 대화를 정리한 히가시 다이사쿠 조치대학 교수의 <적과의 대화>에 따르면, 베트남 대표단은 미국의 지난날 잘잘못을 조목조목 따져물었다. 전쟁 이전의 것까지도 따져물었다. 베트남이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일 당시 미국이 베트남의 협력 요청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도 서운함을 표시했다. 또 북베트남이 통킹만에서 미군을 공격한 사실도 없는데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전 참전의 명분을 만든 것에 대해서도 따져물었다.

이런 공세 끝에 맥나마라 전 장관은 "베트남 측의 증언을 역사적 사실로서 존중한다"는 우회적 표현으로 미안함을 표시했다. 맥나마라는 일선 미국 장교들의 허위 보고를 근거로 미국 정부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으니 양해해달라는 식으로 말했다. 베트남의 국력이 조금 더 셌더라면, 이보다 높은 수준의 사과를 얼마든지 받아내려 했을 것이다.

'무서운 침묵' 베트남? 아니다

정진석 의원은 모두 발언에서 약간 조롱 섞인 투로 "(문 대통령이) 김정은으로부터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는 표현을 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 대통령을 비판했다는 뉴스만 확인하고, 베트남 정부가 문 대통령한테 항의했다는 뉴스는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다.

문 대통령이 취임한 지 1개월이 채 안 된 2017년 6월 6일이었다. 이날 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 경제가 살아났습니다, 대한민국의 부름에 주저 없이 응답했습니다"라며 "폭염과 정글 속에서 역경을 딛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라고 칭송했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과 관련해 '조국 경제, 임무, 애국'이란 표현을 쓴 문 대통령에 대해 베트남 정부는 '무서운 침묵'을 지키지 않았다. 3일 뒤인 6월 9일에는 베트남 외교부가 한국대사관을 통해 항의를 표시했고, 12일에는 외교부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 정부가 베트남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양국 우호와 협력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언행을 하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라고 밝혔다. 베트남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무서운 침묵'을 지키는 나라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모두 발언에서 정진석 의원은 "베트남전쟁 중 미군에 의한 밀라니 학살사건이 있었다"라고 말한 뒤, "미국 정부는 추모공원 건립하고 보상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는 단호히 거절하고 자력으로 추모공원을 만들었다"라며 한국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한ㆍ일 양국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 방안을 마련하며 합의한 가운데 29일 오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 쉼터를 찾은 임성남 외교부 1차관이 이용수 할머니께 호통을 듣고 있다.
 2015년 12월 29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 쉼터를 찾은 임성남 외교부 1차관이 이용수 할머니께 호통을 듣고 있는 모습.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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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비판을 받을 대상은 엄밀히 말하면 박정희 및 박근혜 정권이다. 약간의 돈을 받고 한일 과거사 문제를 봉합한 쪽은 다름아닌 정진석 의원이 몸담은 정권 때였다.

박정희 정권도 대한민국 정권이고 박근혜 정권도 대한민국 정권이었으니, 이는 대한민국이 돈을 받고 한일 과거사 문제를 봉합했다는 말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을 향한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통해, 또 박근혜 정권을 향한 탄핵 투쟁을 통해 그런 방식에 대한 거부의 뜻을 명백히 밝혔다. 두 정권의 행동은 대한민국 주권자의 위임을 명백히 벗어난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런 식으로 문제를 봉합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국민들이 요구하는 것도 1차적으로 일본의 사과다. 우리 국민들이 돈 때문에 일본과 싸우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인이 된 김복동 할머니도 "위로금이라 하는 건 1000억 원을 줘도 우리는 받을 수 없다"라며 "바로 돌려보내라"고 외쳤다.

이것이 우리 국민들의 정신이다. 정진석 의원이 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았거나 애써 무시했을 뿐이다. 이런 점도 고려하지 않고 '베트남을 본받으라'고 국민들을 훈계하는 것은 국회의원의 할 일이 아닐 듯하다.

정진석 의원님, 가까운 국회도서관에 가보십시오
 
 모두발언 하는 정진석 의원.
 모두발언 하는 정진석 의원.
ⓒ 정진석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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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정진석 의원의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베트남은 우리보다 훨씬 강력하게 일본에 배상을 요구했다. 일본보다 강한 미국한테는 우회적 방법으로 사과를 요구했다. 한국에 대해서도, 베트남전쟁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베트남은 절대로 '무서운 침묵'을 지키는 나라가 아니다.

게다가 세계 어디를 갈 필요도 없이 가까운 국회도서관만 가봐도, 정 의원은 자기 주장이 틀렸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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