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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씨가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관련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 참석한 뒤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으며 법원을 떠나고 있다.
▲ 거센 항의 받으며 광주법원 떠나는 전두환 전두환씨가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관련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 참석한 뒤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으며 법원을 떠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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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지난 11일 오후 법정 출석을 마치고 광주를 빠져나갔다. 37년 전인 1982년 3월 10일, 광주 동북쪽 바로 옆 담양군 고서면 성산마을에 은밀히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 민박 마을'이라 새겨진 기념비를 남게 만들었던 전두환 부부다. 그랬던 그들이 이번에는 광주 시내로 들어가 광주 동구 광주지방법원까지 방문하고 돌아갔다.

남의 나라에서조차 해서는 안 되는 학살극을 자기 나라에서 자행하고, 헬기 사격을 한 것도 모자라 전투기 폭격까지 추진했던 전두환이다. 죄인 중의 죄인인 그를 대하는 광주시민들의 태도는 무척 신사적이고 선량했다. 구호를 외치고 차를 막아서는 정도의 반응은 전두환 부부도 예상했던 바였을 것이다.

그런 광주에 와서 전두환이 대중에 남긴 말은 "이거 왜 이래!"라는 말 한마디였다. 부인 이순자가 공식적으로 남긴 언어는 '재판부에 드리는 글'뿐이다.

이번 사자(死者)명예훼손 소송의 당사자인 고 조비오 신부의 조카 조영대 신부가 "'정말 잘못했다'고 한 마디라도 해달라"라고 요청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광주시민들이 전두환에게 원하는 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도 그는 죄스러움을 표하는 말 한 마디는커녕 표정 하나조차 짓지 않았다.

전두환은 퇴임한 해인 1988년부터 국민들의 사죄 요구를 받았다. 5.18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지자 그해 11월 백담사로 몸을 피했다가 1988년 12월 31일 할 수 없이 국회 청문회에 출석했다. 또 1995년 12월 3일 경남 합천에서 체포돼 재판에 넘겨지고 안양교도소에 수감됐다.

출소 당일인 1997년 12월 22일, 교도소 출소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여러분은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답한 데서도 느껴지듯이, 그는 짧은 교도소 생활이나마 그 속에서 어느 정도는 불편을 느낀 듯하다. 1988년부터 31년째 이처럼 세상의 욕을 먹고 때로는 신체적 제약을 겪었으면서도, 그는 여태껏 사과 한 마디를 하지 않고 있다.
 
위쪽의 두 사진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 아래쪽 왼쪽은 망월동 묘역 땅바닥에 묻힌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 기념비, 오른쪽은 기념비를 이곳에 묻은 경위를 설명하는 안내문.
 위쪽의 두 사진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 아래쪽 왼쪽은 망월동 묘역 땅바닥에 묻힌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 기념비, 오른쪽은 기념비를 이곳에 묻은 경위를 설명하는 안내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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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을 지탱해주는 '힘'

그런데 전두환의 외면적 뻔뻔함을 지탱하는 것이 오로지 내면적 뻔뻔함만은 아닌 듯하다. 내면적 뻔뻔함만으로 그런 외형을 유지하기엔 세상의 적들이 너무나 많고, 그 시간도 너무나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의 외면을 지탱해주는 '또 다른 힘'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보도를 통해 많이 알려졌듯이, 전두환은 대인관계가 상당히 원만하다. 장교 시절에도 그랬다. 전두환 후임으로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는 1970년에 전두환 대령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이 된 일을 회고하면서 "당시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 전 대령의 이름은 능력이나 최고통수권자의 신임 면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주변 사람들에게 돈도 잘 쓰는 듯하다.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에서는 이명박·전두환의 자금 문제를 설명하다가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사망했을 때 전두환이 낸 조의금이 1억 원이라는 설과 5000만 원이라는 설이 아직도 싸우고 있다"라고 말한다.

또 하나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전두환이 민중혁명을 상당히 의식하며 살아왔다는 점이다. 6월항쟁 때인 1987년 6월 17일 저녁 안가에서 노태우 민정당(민주정의당) 대통령후보, 안무혁 안기부장(국정원장),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 김윤환 정무1장관 등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도 그런 내면 심리가 표출됐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 따르면, 전두환은 이런 말들을 했다.
 
"민중혁명이 성공되게 할 수는 없어."
"우리가 정치를 하는 데 있어 과거에 하던 식, 군대를 동원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그런 걸 반복해서는 안 되지 않겠어."
"우리가 지금 밀려가고 있는데, 나는 카드를 다 썼어요."
"안기부장, 이제는 데모 보고 올리지 마라. 나는 청와대에 쳐들어올 때까지는 꼼짝 안 한다. 천만 명이 나와도 상황을 보고하지 말고 대책을 보고해야 돼요."
  
민중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 전두환

전두환이 민중의 움직임에 민감하다는 점은 이승만·박정희·박근혜와의 비교에서도 드러난다. 전두환과 이들의 공통점은 민중의 격렬한 도전에 직면한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중 정권을 지킨 사람은 전두환뿐이다. 이승만은 4.19로 쫓겨났고, 박정희는 민중항쟁 와중에 내부 분열이 일어나 부하의 배신으로 죽었고, 박근혜는 임기 중에 권한이 정지되더니 임기를 못 마치고 감옥에 들어갔다.

세 사람과 달리 전두환은 6월항쟁을 겪고도 임기를 무사히 마쳤을 뿐 아니라, 같은 편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데도 성공했다. 또 이승만의 자유당과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주군'의 퇴장과 거의 동시에 주류 정치권에서 퇴장한 데 반해, 전두환의 민정당은 민자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을 거쳐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며 아직까지 주류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는 민중의 동향에 대처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면에서 전두환이 이승만·박정희·박근혜보다 기민하고 민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18 당시의 계엄군. 국립 5·18 묘지에서 찍은 사진.
 5·18 당시의 계엄군. 국립 5·18 묘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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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죄'에는 선결과제가 있다

그처럼 대인관계를 중시하고 민중의 동향에 예민한 전두환이 자신에 대한 세상의 분노를 모를 리 없다. 세상이 자기한테 원하는 게 감옥행이 아니라 사죄라는 것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오랜 세월 버티는 것은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정치권에도 그의 의지처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만원씨가 1980년 광주에서 찍힌 연로한 여성 사진을 근거로 '북한 장군 리을설이 여성 차림으로 광주에 와서 폭동을 지휘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펴고, 김진태·김순례 한국당 의원 등이 그런 지만원씨를 응원하며, 한국당 지도부가 이런 의원들의 당대표·최고위원 출마를 도운 것은 전두환 단죄를 찬성하지 않는 정치세력이 여전히 만만치 않음을 의미한다.

위에서 소개한 1987년 6월 17일 술자리에서, 전두환은 민중혁명에 대한 두려움을 피력하면서 "군부 지지가 없으면 정권 유지가 안 돼"라고 말했다. 군부에 대한 믿음이 6월항쟁 당시의 공포로부터 전두환의 내면을 붙들어줬던 것이다.

5.18에 대한 전두환의 뻔뻔함을 지탱해주는 것 역시 5.18 청산을 저지하는 세력의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대인관계를 중시하고 민중혁명을 두려워하는 그가 이처럼 극도의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은 동조자들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지만원·김진태·김순례 등으로 대표되는 동조 세력에 대한 믿음이 전두환의 태도를 강화시켜 주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그는 "천만 명이 나와도 상황을 보고하지 말고 대책을 보고해야 돼요"라고 말했다. 6월항쟁 당시 그는 1000만 명이 거리로 몰려나와도 군부 지지로 정권을 지킬 대책만 있다면 꼼짝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은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의 행태를 볼 때, 자신에게 동조하는 세력, 이를 테면 '전두환 세력'이 무너지기 전까진 스스로 참회할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 모순과 부조리를 청산하는 과감한 사회개혁으로 '전두환 세력'을 청산하기 전에는 그의 사과를 듣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전두환 세력'인 지만원·김진태·김순례 등이 응징을 받고 그 세력 전체가 주류 무대에서 퇴장하는 모습이 TV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 한, 전두환의 심경 변화를 유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 전두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이거 왜 이래!" 따위의 반응뿐일지 모른다.
 
국립 5·18 묘지에서 찍은 사진들.
 국립 5·18 묘지에서 찍은 사진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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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전두환, #광주, #5.18, #이거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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