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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러 층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실과 비현실도 세상을 이루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의 층도 있고, 또한 사회경제적 계급으로 나뉘어 평생 전혀 다른 세계만을 살아가다 죽는 세상도 있겠지요.
 
황정은의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를 읽으며, 이 작가가 보는 세상은 어디일까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말하여지는 것,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사람들이 단정짓는 것, 그런 것들을 삐뚜름하니 보거나 어떤 틈을 세세히 살펴보는 것 같아서요.
 
 
황정은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 책 표지
▲ 황정은 <백의 그림자> 책 표지  황정은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 책 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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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의 그림자>에서 황정은이 그린 세계는 난장이들의 나라, 이제 40년도 더 되어 쇠락한 전자상가의 사람들입니다. 곧 철거가 되어 버릴 전자상가에 깃들어 평생 살아온 사람들은 낡은 건물만큼이나 희미하고 존재감이 적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각자의 인생이 오롯이 존재하고 귀하다는 것, 그저 한순간에 깡그리 철거되어 어디론가 떠밀려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아요.
 
은교와 무재. 숲에서 길을 잃은 연인들로 이야기를 시작하여, 섬에서 길을 잃은 연인들로 끝나는 이야기. 그러나 숲에서는 지치고 확신이 없던 연인들이, 섬에서는 조금 희망적입니다. 이야기의 끝에서 무재가 그러거든요. "노래할까요?"
 
은교와 무재,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젊은이들이죠. 은교는 홀아버지가 키웠고, 무재의 아버지는 가난을 이겨보려고 힘겹게 살다 불운하게 죽습니다. 불행은 은교와 무재의 가정만이 아닙니다. 정신을 조금 놓아버린 듯한 청년의 아버지는 기계에 압사해서 죽었고, 상가의 상인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외롭습니다.
 
가난하지만, 그들은 고결합니다. 세상은 폭력적이지만 그들은 무심한 작은 폭력에도 문제를 제기합니다. 은교의 가마 모양이 특별하다며 무재가 말하자, 그들은 가마에 대해 대화를 하게 됩니다.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히 폭력인거죠." (황정은  <百의 그림자> P.38)
 
또한 은교와 무재의 대화를 보면 그들은 성급히 상대의 말을 재단하지 않아요. 그러니 대화가 대체로 상대방의 말을 메아리처럼 반복하며 받아주기도 하고 "그럴까?" 하고 긍정하며 들어줍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때는 문장이 짧다고 서둘러 읽지 말고, 그들의 대화 속도로 천천히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젖어들 수 있어요.
 
"섹스, 좋을까?" 그런 말은 나누지만 정작 소설에서 두 사람의 스킨십도 뜨거운 열정도 그려지지 않습니다. 무재는 은교가 잠이 안 온다고 할 때 은교네 동네로 와서 같이 배드민턴을 쳐주거나 정전이 되었을 때 전화를 걸어주어 같이 어둠을 견뎌줍니다.
 
소설은 시종일관 따뜻하고, (우리의 대체적인 삶처럼) 조금 쓸쓸하기도 하며, 가끔 웃음이 툭 비어져 나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가끔 엉뚱하고 천진한데 그걸 또 다 들어주고 있거든요. 저는 은교가 무재에게 칠갑산 노래 불러달라는 대목이 유난히 웃겼습니다.
 
책의 제목에 들어 있는 '그림자'는 소설을 전개하는 주요 매개입니다. 작가의 상상력은 그림자가 가끔 사람에게서 분리되어 일어서거나, 떠나거나, 커진다고 하는데요. 누군가의 그림자가 일어서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에서 힘겨운 상황에 직면할 때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혼이 나간다' 하듯이, 그림자는 혼과도 비슷합니다. 그림자가 떠나고 나면 누군가는 죽고 마니까요.
 
그림자를 평생 끌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황정은은 이 사회의 난장이 같은 약자들의 삶을 그리면서도 비참하거나 침울하게 그리지 않아요. 그래요. 고결합니다. 그래서 재개발이니 뉴타운이니 하는 걸로 그들의 오래됨과 그들의 낡음을 순식간에 밀어버릴 수 없다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아요.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황정은 <百의 그림자> P.115)
 
소설을 읽다보면 용산 참사도 떠오르고, 용산 전자상가도 연상됩니다. 또 여기저기 있었던 철거와 재건축의 현장들도 생각나고요. 그러나 작가는 오롯이 연인들과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니 책을 덮으면 사회문제의 무거움이 아니라 인간살이의 따스함만 남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에 대해 이토록 깊은 애정으로 바라보는 황정은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입니다.
 

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황정은 지음, 민음사(2010)


태그:#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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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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