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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같은 공간에만 존재할 뿐, 진정으로 함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저 같은 공간에만 존재할 뿐, 진정으로 함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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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누군가 독특한 억양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길을 지나는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무서워 바로 상대방과 거리를 두고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지적장애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었다.

요즘 워낙 흉흉한 사건들도 많고 상대적으로 유약한 여성의 신체를 지니고 있기에, 조그만 일에도 몸을 사리게 된 것도 있다. 하지만 그가 딱히 내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그저 비장애인과는 다른 모습에 거리를 두어버린 것이다. 

나와 다르지만 분명히 이 사회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대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장애인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 등의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뿐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대하는 법조차 배운 적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장애인 인구수가 궁금해 찾아봤다. 267만 명(2017년 장애인 실태조사). 전체 인구의 약 5%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사회에서 생활하며 별로 마주한 적이 없다는 것도 의문이다. 공립학교를 다니며 '특수반' 아이들과 함께 지낸 적이 몇 번 있을 뿐이다.

그때에도 그들을 '다른 존재'로 여겨졌을 뿐이다. 그 아이들은 그들끼리 식사하고, 생활하고, 공부했다. 비장애인인 우리들은 그들과 한 공간을 나누면서도 학교생활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그저 같은 공간에만 존재할 뿐, 진정으로 함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들과 생활하며 배려해야 하는 부분들을 속으로 불편하다고 느끼면서도, 그저 그들을 싫어하지 않으니 그들을 존중하는 것이라 여겼다.

얼마 전,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KBS 1TV <거리의 만찬>이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내가 봤던 방송의 주제는 강서구 특수학교 논란. 지난해, 장애아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하는 사진 한 장으로 이슈가 됐다. 이를 두고 출연진인 김소영 아나운서가 했던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는 자신이 장애인을 혐오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내 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장애인 학부모들이 학교 건립을 위해 무릎까지 꿇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며, 그렇기에 나 같은 사람도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더는 방관하지 않겠다

나도 그랬다. 여태껏 내 일이 아닌 많은 것들에 무감각했다. 안타까워하면서도 당장 내가 겪는 불편은 아니기에 그냥 넘어가 버렸던 수많은 불의들이 존재했다. 내가 나서서 불의를 조장한 게 아니라면 나는 가해자가 아니니까. 그 사건에서 제3자로 멀리 떨어져 존재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장애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소수자들, 약자들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혐오와 불의의 사건들은 결국 방관자였던 나와 또 다른 많은 방관자들이 모이고 모여 미완의 상태로 남겨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장애인 부모들이 무릎을 꿇게 만든 데에 나도 기여한 부분이 있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사회에는 소수의 약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나 역시 어느 순간에는 다수이자 강자에 속해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비장애인으로서 나는 '비장애인/장애인'이라는 분류에서 다수이자 상대적 강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청년으로서 나는 '청년층/노년층'의 분류에서 신체적으로나 정보 습득력 등에서나 상대적 우위를 차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다른 사회적 역할을 떠올려보면, 내가 약자가 되는 순간도 많다. 피고용인으로서 불합리한 고용의 조건들을 감내해야 하는 '을'의 위치라거나, 월세 세입자로서의 처치, 그리고 남성에 비해 절대적인 신체적 불리함을 지니는 여성으로서 밤거리에서 불안에 떨어야 하는 현실 등.

나는 수많은 사회의 역할군 속에서 언제나 강자일 수만은 없는데, 강자일 때는 입을 꾹 다물고 방관자가 돼왔던 것이다. 결국 모든 이들이 강자의 위치에 놓여있을 때 입을 다문 방관자가 된다면, 거꾸로 약자의 위치에 놓였을 때 약자를 위해 입을 열어주고 함께 싸워줄 이들이 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인과관계의 흐름일 뿐이다.

나는 어느 순간 방관자로서 결국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고, 그러다 다시 수많은 방관자들에 의해 피해자가 되기도 해왔던 것이다. 이 씁쓸한 뫼비우스의 띠는 언제까지 반복돼야 할까. 나는 이제 그만 이 뫼비우스의 띠가 끊어지기를 바란다. 더 이상 나는, 그리고 우리는 비겁한 방관자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혐오하지만 않으면', '내가 가해자가 되지만 않으면'이라는 생각들로 무수히 지나쳐왔던 약자들의 불의한 사건들이 결국 나와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여태껏 해결되지 못한 채 이어져오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해 수많은 약자들의 이야기에 함께 목소리를 내려 노력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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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끝자락에서 매일 고군분투하고 있는.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