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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시방에서 본 요지경 세상 (상)] 스쳐 지나가는 저 손님, '먹튀'이렷다에서 이어지는 기사입니다.

* 이 기사에 나오는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쳅터 4. 피시방에서 만난 아이들

가끔 뉴스를 장식하는 청소년들과 관련된 안 좋은 기사들 덕분에 나 또한 '요즘 애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그래서 피시방을 시작하기 전 그런 청소년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요즘 스마트폰 때문에 조금은 주춤 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학생들의 주 놀이터는 '피시방'이다. 나도 한때 피시방 업주였지만 이 나라에 청소년들이 친구들과 같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우리나라에서는 피시방, 노래방뿐이라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다.

그래서 피시방에는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한 장을 들고 오는 꼬마부터 사장의 눈을 피해 몰래 애들 돈을 갈취하는 일진들까지, 어른만큼이나 다양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출입한다.

내가 피시방을 운영하던 지역에 가끔 피시방에 순찰 오는 지역 파출소 경찰들이 자주 찾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 지역 '핵폭탄'이라 불리는 두명, 그중 한명은 당시 초등학교 6학년 '영석'이란 아이였고, 한명은 '창규'란 고등학생이었다.

도대체 동급생도 아닌 둘이 어울리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둘이 체격이 비슷하다는 정도, 그리고 언듯 고등학생 창규가 초등학생인 영석이를 속칭 '똘마니'로 두고 나쁜 짓을 시키는 사이 아닐까라는 상상을 하였으나, 현실은 영석이가 훨씬 반항적이고 과격했으며 오히려 그 왜소한 창규를 끌고다니는 격이었다.

그 둘은 이 지역에서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다. 아이들 돈을 빼앗는 건 물론 방화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어느 피시방의 경우 두 녀석이 며칠 동안 피시방 입구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소위 '삥'을 뜯었고, 학생들이 그 피시방을 기피해 폐업 직전까지 갔던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두 녀석은 지역 피시방 사장들의 경계대상 1호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 또한 두 녀석이 가게에 들어오면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 한 분으로부터 학생들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말에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열어보니 바로 그 '핵폭탄'들이었다. 고등학생 창규는 그나마 놀라는 척 했지만 초등학생인 영석이는 미동도 없이 담배를 문 상태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며 난 그 둘을 카운터로 불러 들였다.

"어른들은 너희처럼 애들이 담배 피우는 거 보기 싫어한다, 여기서는 담배 피우지 마라, 그리고 저렇게 바닥을 더럽게 하면 다음에는 너희들에게 청소 시키겠다"란 말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영석이는 반항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왜 애들은 담배를 못 피우게 하느냐"며 오히려 반문을 했다. 어차피 잔소리가 먹힐 애들이 아니라고 판단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 경찰에 쫓겨봤지? 경찰을 피해 도망갈 때 담배 많이 피면 폐가 상해 가슴이 아프단 말이다. 잘 도망가려면 담배 끊어라! 그래서 애들은 못 피게 하는 거다. 알겠냐?" 

영석이와 창규는 그 말에 빙그레 웃으며 피시방에서 나갔다. 이후 둘은 가끔씩 들러 조용히 게임만 하다 갔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신경 쓰이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고등학생인 창규는 게임은 하지 않고 카운터 옆에 서서 다른 피시방에는 먹거리가 뭐가 있고 어떤 게 인기가 좋다는 둥,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열심히 떠들었다.

녀석의 관심이 조금 귀찮고 불편했지만 마냥 무시할 수 없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런 저런 대답도 해주자 녀석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사장들은 이야기가 하면 귀찮아하는데... 이렇게 들어주고 대답해준 사람은 사장님이 처음이에요."

이 두 녀석처럼 연민과 불안감을 선사한 우리 가게 어린 손님들, 평상시 친구들과 나에게 보여줬던 친밀감과 예의바른 모습과는 달리 어느날 동생의 "엄마가 게임 그만하고 빨리 오래"라는 말에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과 분노를 표출하던 중학생 성원이, 늦은 밤까지 장사를 하는 부모로부터 '돈은 퇴근할 때 줄 테니' 아이들 저녁 좀 챙겨주라며 피시방에 맡겨진(?) 천방지축 초등교 2·3학년 형제,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동생과 함께 손님들 외투에서 돈을 훔쳐 온 동네 피시방에서 지명 수배된 또 다른 어린 두 형제, 오랜 단골로 초등학생 시절은 말수도 없고 얌전했던 아이가 고등학생 때 학교 '짱'이 되고 내 자전거까지 훔쳐갔다 반납한 일진 명석이 등.

난 이 아이들을 근거리에 지켜보며 연민도 들었지만 그래봐야 '피시방 사장'으로서 나는 이들을 가게에서 사고 치지 않고 곱게 게임하다 가길 바라는 '골치 아픈 어린 고객'으로 대했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중학생 성원이의 감사 인사는 날 각성하게 했다. 성원이는 게임 중독을 염려한 엄마에 의해 쫓겨나가듯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출국 며칠 전 나를 찾아와 자신에게 관심 가져주어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가끔 큰 의미 없이 어른으로서 말했던 상투적 조언들, 그리고 녀석이 나에게 털어 놓는 고민을 어쩌면 고객 관리 차원에서 경청하는 척 했던 내 행위가 이 이 아이에겐 큰 위로였던 것이다. 그때 이 아이는 '진심'이었는데 난 얼마나 '진심'이었을까?

이런 경험들은 후에 청소년들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주었고 덕분에 당시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내 아이를 이해하는 발판이 되었다.

쳅터 5. 알바, 지옥과 천국을 만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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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자들에게 장사에서 최상의 조건이 무엇이냐 물으면 아마 대부분은 좋은 목과 좋은 직원이라 이야기 할 것이다. 또 장사를 정리한 사장들에게 다음에도 장사를 하겠느냐고 물어보면 상당수는 "하더라도 두번 다시 사람 쓰는 장사는 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한다. 소규모 자영업자에게 알바란 존재가 얼마나 어려운 존재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일 것이다.

회사원 시절 겪어보았던 일정 수준의 책임감과 소속감이 있는 20대 중후반 청년들이 아닌, 아직은 청소년의 티를 채 벗지 못한 20대 초반의 소속감은커녕 아직 '책임'이란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청년들과 부대끼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일지 피시방 초기 시절 자영업 경험이 전무한 초보 사장으로서 난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장으로서 너무도 미숙했던 피시방 초기에는 '아무 말 대잔치'란 개그처럼 정말 '아무 알바 대잔치'였다. 그들이 약속한 근무기간은 정치인들의 헛공약과 다를 바 없었고, 몇 개월은 고사하고 이삼 일 만에 그만 두거나 말도 없이 사라지는 속칭 '잠수'도 적잖았다(그래도 시급은 반드시 챙겨간다).

특히 피시방에서 심야 알바의 잠수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피시방은 24시간 3교대로 돌아갔기에 심야 알바가 잠수를 타면 누군가는 철야로 16시간을 근무해야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당연히 '사장'이었다.

심야 알바가 무단으로 이탈하는 순간부터 새로운 심야 알바가 구해질 때까지 매일 반복되는 16시간의 철야는 근무가 아닌 '고문' 이었다. 그때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지금도 얼얼하게 남아있다. 그런 일을 겪은 후부터는 피시방 운영 내내 심야 알바 교대시간에는 언제나 마음을 졸여야 했고, 아무리 고단해도 심야 알바가 정상적으로 출근하기 전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뿐인가. 피시방 특성상 심야 알바들은 혼자 근무하게 되다보니 이때 많은 사건 사고가 터졌다. 절도, 파손, 무단이탈, 싸움 등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핸드폰이 울렸고, 심야에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는 가게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를 예고하는 종소리였다.

피시방 2년 차에 접어들면서 좋은 알바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 지방에서 혈혈단신으로 올라와 주간에는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부족한 생활비를 메우려고 우리 피시방에서 심야 알바를 시작한 병한이, 그는 본업으로 이미 피곤해진 몸을 끌고 심야에 출근했지만 매장 관리나 손님 응대 등 근무 상태는 이전의 어떤 알바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실했다.

그런데 어느 날 단골손님 한 분이 나에게 지금 심야 알바는 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건넸다. 사연을 물어보니 새벽에 카운터에서 졸고 있어 일부러 카운터의 금전출납기까지 흔들어 보았지만 깨지 못하더란 것이다. 나는 고민스러웠다. 그의 개인적 사정은 이해하지만 가게 운영에는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실한 그를 야박하게 내칠 수 없던 나는 앞으로 이런 일어나지 않도록 자기 관리를 부탁했고 그는 사과를 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그렇게 이해한 다음 날 가게에 설치된 음료수 냉장고와 카운터 앞쪽에 몇 줄의 글이 인쇄된 종이가 붙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심야타임에 근무하는 직원 이병한이라고 합니다. 제가 주간에는 다른 일을 하고 있어 저녁에 고시원에서 잠깐 눈을 붙인 후 자정부터 피시방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잠을 자지 못하고 바로 피시방으로 출근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손님 여러분들에게 불편을 끼친 것을 사과드립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일들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저로 인해 불편한 일이 생기면 아래에 있는 제 전화번호로 말씀 해 주시면 바로 개선하겠습니다. 전화번호 : 010-XXX-XXXX"

이 사과문은 어쩌면 당장의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감성적 전략이라 폄하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난 이렇게라도 글을 쓰고 붙인 그에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손님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이후 손님들은 병한이를 볼 때마다 피로 해소제와 음료수를 챙겨줬고 단골 중 일부는 간간이 간식까지 사다 주었다. 그를 타박했던 단골까지 그를 좋아했고 그로 인해 우리 피시방에 대한 단골들의 신뢰와 호감은 남달랐다.

자영업 시장에는 '한 명의 좋은 알바가 가게 전체를 정화시킨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병한이를 기점으로 좋은 알바들이 안착하기 시작했다. 간간이 들어오는 어설픈 알바들이 있었지만, 심야를 든든히 받쳐주는 병한이가 있었기에 난 걱정이 없었고 그러하기에 더욱 옥석을 가릴 수 있었다.

덕분에 내가 피시방을 팔기 직전까지 우리 피시방은 요즘 말로 '어벤저스'급 알바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병한이에 이어 몇 개월 후 들어온 종철이는 지금까지도 지인들에게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속칭 '역대급' 알바였다.

그가 나를 감동시켰던 여러 일화 중 한 가지를 기억해보면, 어느 날 평상시처럼 오전 8시에 출근해 보니 종철이가 근무하고 있었다. 난 어리둥절했다. 왜냐하면 종철이는 오후 알바(오후 6시부터 12시까지)였기 때문에 그는 퇴근해야 했고, 내가 출근하는 오전 8시에는 분명 심야 알바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야 알바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분명 어제 오후 6시에 나와 교대했던 종철이가 오늘 아침 8시까지 여전히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된 일이냐고 하니 심야 알바가 잠수를 탔다고 했다. 왜 전화하지 않았냐는 내 물음에 종철이는 어차피 '사장님 아니면 제가 심야 근무를 해야 하는데 젊은 제가 근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고 잠이라도 편히 주무시라고 전화하지 않았다며 너무 신경 쓰지 말라며 씽끗이 웃었다.

과연 내가 알바였다면 저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주간 14시간도 아닌 지옥 같은 철야 14시간(심야 알바는 화장실을 포함한 매장 청소와 비어 있는 식음료도 진열해야 한다)을 말이다.

난 이런 알바들을 위해 근무 기간에 비례하여 시급을 조금이라도 인상해줬고, 근무 시간대 일정 금액 이상의 매출을 올리면 초과금에 비례하여 실적 수당도 지급해주었다. 그리고 학기가 시작되거나 어학연수 등으로 잠시 알바를 떠날 때는 적은 금액이지만 격려금도 주었다. 

피시방은 청년들이 선호하는 게임업종이라 알바 구인이 비교적 쉬운 대표적인 최저시급 업종이면서도, 24시간이란 특성으로 육체노동의 강도가 강한 요식업보다도 알바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이중적인 면이 있다. 이런 피시방만의 독특한 특성 탓에 나는 근무하는 알바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하지만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직장생활을 포함한 이십여 년의 경제 활동 중 피시방을 한 2~3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간이었다. 바로 천국을 만들어내는 능력자 알바들 덕분에 말이다.

이 알바들과 마지막으로 회식을 하던 때가 생각난다. 알바들 대부분이 취업을 준비 중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화제는 그와 관련되었고 난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너희들이 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안착하지 못한다면 그건 이 나라가 잘못된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쳅터 6. 조물주 위에 건물주

사람의 '삶'이란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일 것이다. 자영업자에게 임차인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임대인과 사장에게 지옥과 천국을 선사하는 직원,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매출만큼 중요하다.

매출이 아무리 좋아도 임대인을 잘못 만나면 그야말로 재주만 넘는 곰이 되거나 심지어 가게를 공중 분해하고 나와야 하고, 매출이 아무리 좋아도 잘못된 직원을 만나면 매출을 줄여 일인 자영업자가 되거나 가족들과 초주검이 되도록 일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난 '직원 복'은 있었지만 '임대인 복'은 정말 없었다. 피시방 인테리어를 마치고 영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대인에게 전화가 왔다. "당신 가게 손님이 주차장에 대변을 봤으니 빨리 나와 치우고, 하는 김에 주차장 쓰레기도 치우고 청소도 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 그 대변의 주인이 우리 가게 손님이란 근거는 무엇이냐고 따지니 그는 이 건물 손님들은 주로 우리 손님이니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난 피시방 내에 5평짜리 아방궁 같은 화장실이 있는데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가게 손님이 왜 주차장에서 볼일을 보느냐며 건물주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언성을 높여 따졌고 흥분한 상태에서 전화를 끊었다. 당시 마침 내 집에 계셨던 장모님은 이 전화 통화를 듣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권서방 2년 후 가게를 그만 둘 거면 몰라도 건물주에게 그렇게 대들면 안 돼. 억울하고 분하겠지만 가게를 생각해서라도 내일 만나면 미안했다고 사과하게나."

그랬다. 난 2년 후 건물주의 결정에 가게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임차인'이란 것을 깜빡 했던 것이다. 건물주가 그런 억지를 부린 것은 사실 다른 의도가 있었다.

내 가게가 입점할 당시 그 건물에는 단 두 개의 상점만 입점해 있었다. 그런데 모두 건물주와 건물주 가족의 소유였다. 즉 그 건물에 정상적인 임차인은 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건물주는 경비를 아끼기 위해 관리인을 고용하지 않았고, 그렇다 보니 건물 내부는 몰라도 주차장은 거의 방치 상태로 온갖 쓰레기와 먼지가 가득했고, 내가 입점하자 나에게 주차장 쓰레기 처리와 청소를 시킬 요량이었던 것이다.

내가 임차한 건물의 건물주가 이런 수준의 사람이란 것을 계약 당시 알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 건물주는 임대차 계약 당시 구두로 약속했던 '지역이 재개발되면 임대료를 인하해주겠다'란 약속도 '공수표'로 만들었고, 영업 후 1년여 만에 지역 재개발이 확정되어 상권이 붕괴되고 있었음에도 임대료 인하는커녕 '싫으면 원상복구하고 떠나라'는 냉정한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해가 갈수록 난 재주만 넘는 곰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했다. 상권이 붕괴되면서 기근으로 굶주림에 눈에 핏발이 선 사람들처럼 인근 피시방 사장들의 생존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 과정에서 경쟁 업체의 이어지는 폐점을 지켜보면서 이겼다는 쾌감보다는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것이라는 공포감만이 더 커질 뿐이었다.

그나마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내 곁을 지키던 든든한 알바들 덕분이었지만, 그들도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해 하나 둘 떠나갔고 난 결국 가게를 매매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인생 2막의 내 피시방 역사는 끝났다.   

위대한 코미디 배우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정말 공감하는 말이다. 당시에는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이렇게 돌이켜보니 우습고 애잔하며 비극보다는 희극 같은 추억으로 남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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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에서 자영업자 그리고 시급제 노동자와 법인대표로 일하며 느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같은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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