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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여름도 끝자락에 접어들었다.

날이 선선해지면서 땅거미는 서서히 내려앉았고 카바시토(Caballito)에 위치한 친구 마틴의 집에는 그의 친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어느새 2층의 널찍한 발코니는 포르테뇨들로(Porteño: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을 일컫는다) 가득 차버린다.

나도 쭈뼛거리다 한자리하고 앉아 처음 보는 이들과 통성명을 하고 있었다. 곧이어 큰 맥주병 몇이 무리를 돌고 돌아 우리 모두의 목을 축였다. 구석에서 팝송과 레게톤이 번갈아 흘러나왔고, 영어와 스페인어가 뒤섞여 오갔다. 우리의 '불타는 토요일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마틴과 나는 에어비엔비를 통해서 알게 된 인연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집주인이고 나는 하숙생인 셈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갑자기 취업준비생 신분이 된 나는 싼 방을 찾아 이 도시를 곳곳을 부초처럼 떠돌았다. 그러다가 마틴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된 것이다. 20대 후반의 끼 많은 영화감독인 그의 집에는 언제나 개성 넘치는 그의 친구들과 예술인들이 드나들곤 한다. 그리고 토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발코니 파티로 조용한 동네가 활기를 띠었다.

자정 무렵 주문했던 피자와 술은 동이 났고 모두들 겉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기 시작했다. 보통 새벽 늦게까지 파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곳 현지인 기준으로는 파하기가 좀 이르다 싶어 의아했다. 마틴의 사촌 히나와 그녀의 친구 훌리가 영문을 모르는 나의 손을 양쪽에서 붙들며 묻는다.

"너도 당연히 갈 거지?"

"이 오밤중에 어딜?"

"어디긴 어디야, 페로니스타 클럽이지!"

"응? 뭐라고?"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스페인어 걸음마를 겨우 뗀 나라도 '페로니스타(Peronista)'가 무엇인지는 짐작이 갔다. 우리말로 풀면 '페론주의자'로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인 페론과 그의 정치적 행적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전직 대통령을 추모하는 나이트클럽이라니. 춤추고 마시며 이미 돌아가신 분을 생각한다고? 4대륙 20여개국을 다녀봤지만 이런 '밤문화의 장'에서 특정 정치인을 기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클럽 안의 사람들이 현정권을 고양이에 빗대어 풍자하고 있다.
 클럽 안의 사람들이 현정권을 고양이에 빗대어 풍자하고 있다.
ⓒ Hoy es una noche Pero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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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클럽의 공식 이름은 'Hoy es una noche Peronista(오늘은 페로니스타의 밤이다)'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동남쪽 알마그로(Almagro)에 있다. 집에서 거리는 조금 되지만 술도 깰 겸 튼튼한 두 다리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새벽 1시께 도착했다. 신분증 요구도 받지 않은 채 약 5천 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섰다.

같은 이념을 공유하며 노래하는 곳

우리는 혹시라도 서로를 놓칠세라 기차놀이하듯 두 손을 서로의 어깨에 얹었다. 인파를 헤치며 들어가니 조용한 입구와 다르게 내부는 상당히 붐빈다.

쿵- 쾅- 쿵- 쾅-. 벽을 울리는 진동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로컬 쿰비아(Cumbia)다. 쿰비아(혹은 꿈비아)는 콜롬비아의 카리브 연안 지역에서 처음 유래한 4/4박자의 민속음악으로 오래전 남미 대륙 전체를 휩쓸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결과로 각 나라마다 그들 고유의 쿰비아가 탄생하게 되는데, 아르헨티나도 그중 하나로 이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자국의 스타 축구선수 메시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으로도 알려져 있다).

클럽 중앙의 무대에서 로컬 음색이 짙은 '쿰비아'가 연주되고 있다.
 클럽 중앙의 무대에서 로컬 음색이 짙은 '쿰비아'가 연주되고 있다.
ⓒ Hoy es una noche Pero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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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비아 가수가 전 영부인이자 평가가 각양각색인 에비타의 가면을 쓰고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쿰비아 가수가 전 영부인이자 평가가 각양각색인 에비타의 가면을 쓰고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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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서는 페로니스타라는 클럽답게 페론과 그의 부인인 에비타(Eva Perono, 에바 페론)의 피켓과 마스크 등이 눈에 확 띈다. 그 주변에는 우리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페론 전 대통령 부부의 가면을 쓴 클러버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페론 전 대통령 부부의 가면을 쓴 클러버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Hoy es una noche Pero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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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깨달았다. 페로니스타의 정치적 색깔은 이 클럽의 테마인 셈이다. 정치적 양극화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존재하겠지만 아르헨티나는 유독 그 정도가 심한 편이다. 그리고 이는 곧 세대 간의 갈등으로 이어진 지도 오래다. 거기다 정권이 한 번씩 바뀔 때마다 자신들의 일상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는지라 모두들 정치라면 질색하면서도 뉴스에는 귀를 쫑긋 세운다.

젊은 층이 지지자의 주를 이루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은 페론 부부와 많이 닮았다. 둘 다 좌파 민족주의에 기반한 포퓰리즘을 지향해 노동자, 빈민층 그리고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에 반해 전혀 다른 길을 가는 현직 대통령인 마우리시오 마크리는 그들에게 돌을 맞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이 클럽은 실제로 반백 년 전의 전 대통령을 추모한다기보다는 그의 정치적 행적이나 성향에 대한 지지를 '음악'이라는 수단으로 승화시키고 그에 반하는 현 정권을 해학적으로 풍자하는 공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기자가 현지인 친구들과 함께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기자가 현지인 친구들과 함께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Hoy es una noche Pero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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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 두리번거리며 주문한 맥주 한 잔을 다 같이 나눠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춤을 출 때 걸리적거리니 다 같이 빨리 마시고 또 새 맥주를 시키는 게 낫다).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웅장한 음색이 스피커 사이로 흘러나온다. 곧이어 조금 흥분한 듯한 클럽 안의 모든 이가 손을 위로 치켜들고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이어 그들은 다 함께 노래하기 시작했다.

페로니스트 소년들은 이길 것이다
모두 함께이고 항상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가슴으로 외쳐야만 한다

승리의 페론, 승리의 페론!

그 위대한 아르헨티나인을 위해
그 누가 또 어떻게 정복하는지를 알겠는가
그 많은 사람들이 수도를 위해 싸웠네-

페론, 페론! 너는 얼마나 위대했었나
나의 장군! 너는 얼마나 가치 있었나
페론, 페론! 위대한 지도자여
너는 우리의 첫 번째 노동자

(Los muchachos peronistas
todos unidos triunfaremos
y como siempre daremos
un grito de corazón:

¡ Viva Perón! ¡ Viva Perón!

Por ese gran argentino
que se supo conquistar
a la gran masa del pueblo
combatiendo al capital.

Perón, Perón, qué grande sos
Mi general, cuanto valés
Perón, Perón, gran conductor,
sos el primer trabajador)


쿰비아 외에도 각양각색의 공연이 현지 젊은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있다.
 쿰비아 외에도 각양각색의 공연이 현지 젊은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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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하나가 모두를 순식간에 하나로 묶어버렸다. 같은 정치 이념을 공유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 하나가 되는 순간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했다. 클럽이라, 노래와 춤이라 진지하지 않아 보인다고?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떠랴. 이런 '클러빙'에 정치를 녹여낸 것도 그들에게는 하나의 방법인 것을. 


태그:#남미, #아르헨티나, #클럽, #해학,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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