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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종로구 가회동 한옥마을을 비롯한 그 주변마을을 일컫는 '북촌'은 2000년대 들어 서울도심의 골목길 관광지로 가장 먼저 개발된 곳이다. 1990년대 이후 급속한 도시개발로 콘크리트 고층빌딩에 질식되어 갈듯한 거대도시 서울에서 그나마 상당수가 보존되고 있던 한옥마을이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곳을 거닐면 한옥마을의 외형만 느낄 분 그곳에 켜켜이 쌓인 역사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거리는 온통 상점들로 가득 차있고, 이따금 특정 건물 앞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이에 나는 이곳 북촌 일대를 걸으며 길과 건물로 가려져 있는 역사와 그 흔적을 찾아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한다.

북촌의 물길들

먼저 나의 답사 방식은 이미 아스팔트로 덮여 있지만 그 밑에서 흐르고 있는 물길을 따라 걷고자 한다. 왜냐면 본래 이곳은 물길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또 이곳 거주민들의 이동경로 역시 그와 같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동경로는 현재에 있어서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 참고로 이 일대에는 본래 삼청동천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물길이 있다. 이러한 물길을 옛지도와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다.

 
 수선전도(1861, 김정호)에 나타난 북촌의 물길들
 수선전도(1861, 김정호)에 나타난 북촌의 물길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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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지도 위에 표시된 물길의 흐름. 지도 상에는 이 밖의 물길이 더 있지만 편의상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흐르는 물길만 표시되어 있다.
 현재의 지도 위에 표시된 물길의 흐름. 지도 상에는 이 밖의 물길이 더 있지만 편의상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흐르는 물길만 표시되어 있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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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걷게 될 북촌의 여러 물길은 탐방 과정에서 해당 위치에 따른 설명이 추가될 것이지만 출발 전에 먼저 북촌의 물길 전반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떠나도록 하자.

첫째, 삼청동천은 종로구 삼청동에서 발원하며, 여러 동(洞)을 거쳐 청계천으로 합류하지만 특히 일본대사관이 위치한 종로구 중학동의 지명을 따서 최근 '중학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삼청동천은 북촌 일대에서 유량이 가장 큰 물길로 너른 너럭바위도 있어서 일제강점기 경성부청에서 이곳 삼청동 일대를 공식적인 빨래터로 지정(1923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 "공동세탁장은 삼청동에")할 만큼 여름이면 북촌의 빨래터로 인기가 있었던 곳이다.

둘째, 안국동천은 정독도서관 뒤편에서 발원하여 현재의 인사동길을 따라 바로 청계천으로 합류하던 물길인데 자주 범람하자 세종3년(1421) 탑골공원 일대에서 인공수로를 만들어 창경궁 옥류천에 결합시킨 뒤 청계천 본류에 합류하도록 물길을 바꿨다. 그러니 현재 종로3가 일대의 보쌈집 골목은 지난 세종3년 이후 만들어진 물길이다.

참고로 이후 설명되는 회동-제생동천, 금위영천, 북영천 모두 안국동천과 같은 해(1421년) 종로 일대에서 청계천으로 바로 합류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수로를 만들어 창경궁옥류천과 결합된 인공물길이다. 단 이들은 안국동천과 달리 종로 이북의 피마길로 물길을 만들어 한꺼번에 결합하여 범람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셋째, 회동천과 제생동천은 소위 '북촌관광'의 중심지로 개발된 종로구 가회동과 계동을 관통하는 물길이다. 복개 시기를 기록한 자료는 없으며 일제강점기 동아일보(1931.7.18, "총공비 백만원으로 소하수구 대개수(북촌일대의 개천이 더욱 불결해 전염병균도 대개 여기서 생긴다) 국고 금보조를 신청") 기사와 구술 등으로 보아 제3기(1930~1935) 경성부 시구개수사업 때 복개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탐방지역의 다른 물길과 달리 1993년 이 물길의 처음과 끝에 각각 헌법재판소와 감사원 같은 대형 건물이 신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2000년 들어서 '중계동-성북동-감사원-낙원상가'로 연결되는 도로 건설 과정에서 대폭 확장되어 골목길의 옛 맛을 잃었다.

넷째, 금위영천은 종로구 익선동을 관통하는 물길로 최근 가회동 한옥마을에 이어 또 다른 한옥마을로 부상하고 있다. 한편 이 물길은 언제 복개되었는지 알 수 없고 차량 한 대 조차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의 좁은 골목길로 남아 있다. 한편 이곳은 고려시대 향교동에 속했던 곳으로 이 금위영천길은 조선의 한양천도 이전에도 있었던 7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 된 길'이기도 하다.

다섯째, 북영천은 창덕궁의 금천(禁川)으로 1970년대 창덕궁 내부를 제외하고 모두 복개되어 현재의 원서동길을 이루고 있다. 또 창덕궁 단봉문 쪽으로 빠져 나와 돈화문로를 사이에 두도 금영천과 나란히 남쪽으로 흘러 단성사 일대에서 회동-제생동천과 결합하여 창경궁옥류천으로 합류한다.

과연 어디까지 '북촌'인가?

최근 들어 소위 '북촌'이라고 할 때 그 지리적 범위는, 지하철3호선 안국역 북쪽에 위치한 종로구 가회동 한옥마을 일대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곳은 북촌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본래 북촌과 남촌이란 명칭은 구한말 황현의 <매천야록>에 등장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

그러니 결국 종로-청계천 이북은 모두 북촌인 것이며, 그 아래는 남촌인 것이다. 특히 경복궁 일대를 상대(윗대)라 하여 주로 사대부와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살았고, 남촌은 벼슬하지 못한 선비들이 주로 살았다. 한편 을지로6~7가 일대를 하대(아랫대)라 하여 군총 등의 하급관리들이 주로 거주하였다.

 
 남촌, 북촌의 지리적 구분 및 상대(윗대)와 하대(아랫대)의 위치
 남촌, 북촌의 지리적 구분 및 상대(윗대)와 하대(아랫대)의 위치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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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지리적 구분은 18세기 이후 한양에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을 유행시켰다. 즉 '남촌 사람들은 술을 빚어 마시는 걸 즐겼고, 북촌 사람들은 주로 떡을 만들어 먹었다'는 뜻이다. 이런 전통으로 인하여 탑골공원 일대에 떡집이 많은지도 모르겠다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이런 남촌-북촌이란 용어가 대중화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이때 일본인들이 주로 살던 청계천 이남 혼마치(충무로) 일대가 도시화되면서 민족 간의 거주지를 구분하는 의미로 바뀌었다. 이러한 지역별 거주형태는 '일제의 조선에 대한 수탈'이 심해지면서 두 지역 사이에 민족 차별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시작됐다. 청계천 이남의 남촌은 포장도로 위에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번쩍이며 은행과 백화점들이 즐비한 번화가로 변모되었고, 북촌은 근대 도시시설을 갖추지 못한 채 '몰락한 조선'을 형상하고 있는 듯 하였다.



이처럼 북촌과 남촌이란 용어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이원화된 공간구조를 지칭하는 의미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일종의 식민지시대 오렌지족이라 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모두 남촌을 장소적 배경으로 일본의 근대문물을 동경하는 인물들이다. 또한 당시 이러한 도시공간의 이원화된 모습은 1990년 개봉되어 최고의 관객을 끌었던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영화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형성된 침략과 저항을 북촌의 조선주먹 김두한과 남촌의 일본주먹 하야시의 갈등으로 형상한 것이다.

 
 일제 시대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의 이야기를 즐겨 다룬 잡지 '별건곤'(1927년 2월호)과 조선일보(1928년 2월 7일)의 삽화
 일제 시대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의 이야기를 즐겨 다룬 잡지 "별건곤"(1927년 2월호)과 조선일보(1928년 2월 7일)의 삽화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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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장군의 아들’(1990) 포스터
 영화 ‘장군의 아들’(1990) 포스터
ⓒ 임권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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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최근 들어 '북촌관광'으로 가회동 한옥마을 일대가 주목 받으며 이러한 도심관광사업이 여러 곳으로 전파되면서 그 명칭에 있어서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 경복궁 동쪽의 가회동 한옥마을이 뜨면서 서쪽의 옥인동 일대도 새롭게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그런데 이곳의 명칭을 '서촌'이라 명명한 것이다.



이미 가회동 일대가 '북촌'이란 명칭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상태에서 이곳 역시 '북촌'이라고 할 수 없어 결국 '경복궁의 서쪽 마을'이란 뜻으로 '서촌'이라 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명칭은 역사학자들의 비판을 받으며 지금은 세종대왕이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세종마을'로 고친 상태이다.



마치 서울만 대한민국이고 부산, 광주, 대구 등은 대한민국이라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과 같은 셈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상표의 독점성'과 그것으로 인한 '팩트의 혼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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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