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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흰 붕대를 풀지 못한 여수 동백은/ 해마다 시월이 오면 후드득, 후드득,/ 생모가지 통째로/ 붉은 울음을 운다."(나종영 시인의 <여수 동백> 중에서)
옛날을 불러 봐도 옛날을 불러 봐도/ 재만 남은 이 거리에/ 부슬부슬 궂은비만 내리네 (강석오 작사의 <여수블루스> 중에서)

이 작품은 1948년 발발한 여순항쟁을 소재로, 사건이 처음 발생한 여수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주철희 박사에 따르면 피해 지역은 시· 군·구 37곳에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다. 공식적 피해자만도 만 명이 훨씬 넘는다. 그리고 이미 특별법 제정이 된 제주 4.3과 연계된 사건임에도 법 제정마저 되어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권력자들의 왜곡으로 북에 동조한 '빨갱이'라는 낙인이 여전히 존재한다.

7월 30일 오후 2시 순천대학교 70주년기념관에서 KBS순천과 여순사건기념사업회가 후원, 여순연구소가 주관한 여순항쟁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앞서 여순연구소는 여순항쟁 70주년을 기념하여 순천대학교에 올해 설립되었고, 이번에 두 번째 학술세미나를 준비했다.

70년 흘렀지만... 특별법 제정 위해 갈 길 멀어

주제발표자들 7월 30일 순천대학교에서 열린 여순항쟁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한 교수들이 종합토론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좌측 순서대로 주철희 박사. 나간채 교수, 정선태 교수, 최현주 교수이다.
▲ 주제발표자들 7월 30일 순천대학교에서 열린 여순항쟁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한 교수들이 종합토론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좌측 순서대로 주철희 박사. 나간채 교수, 정선태 교수, 최현주 교수이다.
ⓒ 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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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는 교수 네 명의 주제발표와 종합토론 이외에 여순항쟁 관련 시와 노래, 그리고 여순연구소가 제작한, 당시 사진과 유가족 증언 등을 담은 동영상이 소개되었다. 참석자들 중에는 유독 노인층이 많았는데, 그중 50여 명 가량은 각지에서 찾아온 유가족이었다. 이들은 이번 세미나에 높은 관심을 보이며, 지역사회와 연구자들의 호의에 흐뭇해했다. 처음엔 굳은 표정으로 들어섰던 이들이 휴식시간에는 수박을 나눠 먹으며 다른 참석자들과 대화하고, 끝날 무렵엔 환하게 웃으며 기념촬영도 했다.

주철희 박사는 제14연대가 제주도 진압 출동명령을 거부한 이유가 당시 제주도 상황이 군이 토벌할 정도로 심각하지 않아 '부당한 명령'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근거로 8월 말 제주도를 시찰한 오덕준 중령은 "도민들의 왕성한 근로정신은 모두가 본받아야"라고 말했으며, 9월 초순에 유격대의 활동이 재연될 기미에도 10월 1일 현지에 온 정일권 대령은 예상했던 것보다 평온하다고 평가했다.

주 박사는 제14연대 봉기 주도세력이 40여 명으로 적었음에도 다수 부대원이 합류하게 된 이유를 경찰에 비해 대우가 열악한 군인들이 가진 '반경의식'에 두었다.

또한 민중이 봉기군에 협조적이었던 것에 대해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다. 1946년 8월 미군정청 여론국에서 시민 8453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보듯이, 사회주의 찬성이 71.4%, 대중정치가 85.4%일 정도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불만이 있었다. 여기에 자연재해 등으로 식량 배급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굶주린 상태에서 관리와 경찰의 부패에 민중은 분노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여수군청 공무원 김계유는 "그때 민심이라는 것이 한말에 동학 난리가 났을 때처럼 사람이 살자니 한계점에 달해 살 수가 없어"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여순이 좌익폭동? 유족들, 왜곡에 당당히 맞서길"

이에 주 박사는 여순항쟁을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는 군인의 봉기였다. 하지만 민중의 생활고를 비롯한 당시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과 폭정이 민중의 가슴에 내재되면서 항쟁으로 발전한 것"이라 평가했다.

그리고 "여순과 관련한 기록들은 1961년 박정희 집권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광기로 정권을 유지하고, 쿠데타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여순을 하나의 이용매체로 썼다"고 주장했다. 이에 "여순을 북과 관련된 것처럼 '여순에 인공기가 달려있다, 북으로 가자 어쩌자' 등은 전부 거짓말"이라며, 본인이 참고한 그 이전 기록에는 이러한 사실들이 없었다고 알렸다. 따라서 "좌익폭동이네, 인공기이네 왜곡된 것은 유족들이 당당하게 맞서 싸웠으면 좋겠다"라고 조언했다.     

휴식시간에 기자와 만난 권중국씨는 순천 월등면 출신이다. 38명 집단학살 때 당시 2대 독자인 27살 부친이 총살당한 이유는 "산에 있던 사람들이 왔을 때 밥을 해줘서"였다. 음력으로 10월 25일 사건 당시에 유복자인 권 씨는 12월에 태어났고, 이후 모친이 개가하여 조부모와 살았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조사를 할 때인 2000년에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렸다고 한다.

권 씨는 "70년이 되었다. 나이도 들어가고, 죽음도 눈앞에 있는데 해결해 줬으면 한다"며 "(여순항쟁에) 6.25까지 연결되어 그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도 정치싸움만 하니 씁쓸하다"라고 탄식했다.

여순연구소가 제작한 동영상 속 유가족 증인, 여수유족회 황순경 회장은 큰형이 처형당했다. 황 회장은 기자에게 노무현 정부 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세워져 피해자들 접수를 하기 6개월 전 안내방송을 보고 신청했노라고 알려주었다.

'울 밑에 선 봉선화' 부르고 스러진 청년

유가족들 세미나에 참석한 유가족들이다. 앞줄의 흰색 옷을 입은 이가 박성태 보성유족회 회장이며, 뒤쪽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이가 유혜량 여사이다.
▲ 유가족들 세미나에 참석한 유가족들이다. 앞줄의 흰색 옷을 입은 이가 박성태 보성유족회 회장이며, 뒤쪽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이가 유혜량 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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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온 유혜량씨는 광주에서 음악회를 준비하다가 학생들이 걱정되어 내려왔다가 처형된 순천여학교 김생옥 음악교사의 며느리이다. 동경고등음악학교 출신의 재원인 김 교사는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르게 해주세요"라 부탁하고 <울 밑에 선 봉숭화>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잘 불러서 지휘관이 죽이지 말라는 것을 부하들이 죽이라는 사인으로 오해하여 살해되었다. 시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유씨는 "유가족 입장에서 뭔가 쓰려고" 65세에 정치학 박사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유씨는 "제주 4.3(유족들에게)도 갔더니 '왜 뭉치지 않느냐? 우린 국회의원 3명밖에 없는데도 만들었다. 당신들은 국회의원이 몇이냐?'라 했다"라며 "작년에 두 번이나 죽다 살아났다. 그 느낌이 '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러니까 그거 해야 와'란 명령으로 다가왔다"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순천여학교가 1951년에 순천여고와 분리된 후 서류만 있고 그 전 서류가 없다", "2013~2014년에 (사망한 시아버지의) 제자 10명을 만났더니 순천여학교가 불이 났고, 순천의료원에서 잠시 몇 달간 있다가 갔다는데 자료가 없어"라며 기록의 부재를 안타까워 했다. 유씨는 "진실은 하나다. 기록은 바꿀 수 있다. 진실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여순항쟁"이라며, "지역사회의 힘이 중앙으로 올라가도록,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지역의 힘과 연구자와 유가족들이 함께 해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박병섭 순천여고 역사교사는 "오늘 행사는 유난히 뜻이 깊다. 지역의 유일한 국립대인 순천대학교가 여순연구소를 만들어 지역의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지역민을 위로하고, 지역민의 열망을 받아들여"라며 평했다. 그리고 "특별법이 만능이 아니다. 특별법을 제정할 때 섬세하게 따져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5.18 특별법 제정과정에 대해 발표한 나간채 교수는, "주체(유가족)들이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특별법이 한계가 있다"라고 말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당해야 할 짐이 무겁더라도 우리 나름대로 짊어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여러 사람의 의지를 모아 힘을 강화해서 나아가길" 기원했다.

한편 주 박사는 "사건의 성격을 규명해야 하는 것이 들어가야", 피해보상을 요구하려면 "피해기간을 산정해야 한다. 여수는 1948년 10월 19일부터 종료점이 없다"라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일가족이 한 날 한 시에... 끝나지 않은 아픔

기념촬영 7월 30일 네 시간에 걸친 열띤 세미나가 끝난 후, 교수와 토론자 및 시민, 유가족들이 기념촬영을 하며 웃고 있다.
▲ 기념촬영 7월 30일 네 시간에 걸친 열띤 세미나가 끝난 후, 교수와 토론자 및 시민, 유가족들이 기념촬영을 하며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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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태 국민대 교수와 최현주 순천대 교수는 문학적 측면에서 바라본 국가폭력을 이야기했다. 정 교수는 국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포와 증오를 통한 권력 공고화"로, '내부식민지화' 전략이라 해석했다. <동아일보> 1948년 11월 5일자에 게재된 이승만의 담화문에는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라 쓰여 있다. 정 교수는 "부당한 권력에 맹종할 때 악마가 된다"라며 "저항해야" 함을 강조했다.

최 교수는 광주 5.18과 여순 10.19가 1984년 갑오년 동학혁명의 외세 침탈과 반봉건에 항거한 모습과 평행이론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여순사건 피해자들을 동명의 책을 쓴 조르조 아감벤의 희생양 개념인 '호모 사케르'이며 "말할 수 없는 자들인 하위주체"로 침묵을 강요당했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애도가 요구되며, 진정한 애도를 위해 '여순 공동체'를 만들어 용서와 화해를 통해 "평화와 인권, 생명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최 교수는 여순연구소 소장으로서 순천시와 공동으로 10월에 학술대회 개최, 유족들의 증언록 발간, 강좌 개설, 국가청원을 계획 중이라고 알렸다.

박성태 보성유족회 회장은 보성 웅치 집성촌에서 아버지, 작은아버지, 당숙 세 명을 한꺼번에 잃는 아픔을 가졌다. 그는 "(유가족들이) 세미나한 것을 보면 세미나 책을 덮고 있다. 우리는 못 배웠다 못 먹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다"라고 말하며, 지역의 국회의원들이 이 사안에 등한시한 것을 분개했다. 그리고 "특별법 꼭 제정해서 죽기 전에 묫등(묏등의 전라도 방언)에다 생선 하나라도 놓을 수 있게끔" 노력해 달라 부탁했다.

여순항쟁은 여전히 진행 중인 시대의 아픔이며, 반드시 청산해야 할 짐이자 계속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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