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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형사소송법에 따른 일반 절차 또는 재심이나 비상상고 절차에서 무죄재판을 받아 확정된 사건의 피고인이 미결구금을 당하였을 때에는 이 법에 따라 국가에 대하여 그 구금에 대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② 상소권회복에 의한 상소, 재심 또는 비상상고의 절차에서 무죄재판을 받아 확정된 사건의 피고인이 원판결에 의하여 구금되거나 형 집행을 받았을 때에는 구금 또는 형의 집행에 대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형사보상 및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형사보상법) 제2조 2항의 내용이다. 이 법조문을 처음 접했을 땐 외계어 같았다. 그러나 난 이 외계어 같은 법 조항에 따라 국가로부터 형사보상을 받았다.

왜 형사보상을 받게 됐는지 설명하기 위해선 시계를 지난 2015년 12월 말로 되돌려야 한다. 당시 법원이 보낸 등기우편이 집으로 배달됐다. 뜯어보니 벌금 200만 원을 내라는 대전지방검찰청 천안지청의 약식기소문이었다.

한 번은 내가 가입해 활동하는 온라인 카페에 전아무개 목사가 대중집회에서 여성 속옷을 입에 올린 걸 비판하는 게시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이에 해당 목사는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검찰이 벌금형을 부과한 것이다.

우편물을 받아보고 한동안 고민했다. 약식기소에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그대로 형이 확정돼 벌금 200만 원을 물어야 했다. 당장 벌금 낼 돈이 없었다. 돈도 돈이었지만, 목사가 많은 성도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여성 속옷을 들먹이는 걸 문제 삼은 게시글을 범법행위라고 한 검찰의 처분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며칠 고민한 끝에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 정식재판을 청구하기로 했다. 정말 내가 법을 위반했는지 법의 심판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액 청구에도 법원은 '감감무소식'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 법원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 법원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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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심 선고가 있었다. 결과는 무죄였다. 안도감이 들었다. 판결문을 보니 비록 벌금 200만 원에 불과한 사건임에도 재판부가 깊이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이랬다.
"피해자(전 목사 - 글쓴이)라는 공적 인물의 목회자 집회 강연이라는 공적 활동을 사실에 근거해 종교적 비판을 하는 이상, 표현에 다소 과장되거나 거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모두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비방의 목적이 없는 일정한 범위에 있어서는 공개적이고 활발한 토론과 대화의 장 등을 통하여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 우리 헌법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정신과 부합한다."

그러나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검찰이 곧장 항소했기 때문이었다. 또 지난한 법정 공방을 벌여야 하나 하는 생각에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려움은 또 있었다. 1심 재판은 천안에서 이뤄졌으나 항소심은 대전지방법원 본원에서 진행됐다. 재판을 받기 위해 대전까지 가야 했다. 당연히 생업에 지장이 올 수밖엔 없었다. 그럼에도 재판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상대측 전 목사도 직접 증인으로 출석하며 전력을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2심 판결은 해를 넘겨 2017년 1월에 있었는데 역시 무죄였다. 재판부는 "고민했으나 1심을 뒤집을만한 근거가 없다"고 했다. 검찰은 더 이상 항소하지 않았고, 난 결국 무죄가 확정됐다. 재판이 끝나고 안내문을 받았다. 형사보상 대상자이니 보상을 원하면 청구하라는 내용의 안내문이었다. 안내문을 읽자마자 바로 형사보상을 청구하기로 했다. 

형사보상 청구는 2017년 2월 대전지방법원 형사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한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러다 6개월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애초에 사건은 천안지검의 약식 기소에서 시작됐으니 기존 청구를 취하하고 천안지원에 다시 하라"고 알렸다. 기가 찼다.

보상 청구를 할 때, 한껏 액수를 부풀리고 싶었다. 그러나 단지 법원을 오가면서 든 교통비와 일당 5만 원을 기준으로 업무 손실분만 계산해 청구했다. 그러니까 딱 실비만 청구한 것이다. 정신적인 피해도 가산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법원이 기각할 것 같아서였다. 이렇게 법원을 배려(?)했는데 6개월 동안 아무 말 없다가 취하하고 천안지원에 다시 청구하라는 연락을 받았으니 나로선 기가 찰 수밖엔 없었다.

그래서 일단 '알았다'고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 보자는 심산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다행히 서류는 법원 캐비닛에 잠자고 있지 않았다. 대전 법원은 청구 건을 천안으로 이송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6월 천안지원은 형사보상 청구가 합당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거의 1년 6개월 만에 이뤄진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 판단이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한 달의 시간이 더 걸렸다. 법원이 확정증명서를 발급해줘야 한다고 했는데, 그 확정증명서가 지난 23일에야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받은 돈은 약 20여만 원 남짓이다. 이 돈을 국가로부터 받는데 1년 6개월 가까운 시간이 든 셈이다.

사법부 책상에 쌓인 서류 무게는 사람들 삶의 무게

이 지점에서 왜 이렇게 형사보상에 집착했는지 이유를 말해야겠다. 재판은 참으로 힘들고 복잡한 일이다. 그리고 법원 문턱을 들락거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업에 지장을 받게 된다. 서민에겐 여간 큰 고통이 아니다. 돈뿐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공권력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 공권력이 잘못된 기소로 무고한 시민을 괴롭게 했다면 응당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형사보상을 청구한 것이다.

그간의 과정을 돌이켜 볼 때, 사법부가 한 서민의 고통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소액 청구에 대한 최종판단이 내려지는데 1년 6개월이나 소요됐으니 말이다. 소액 청구가 이런데, 엉뚱하게 죄인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이들에 대한 보상은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까? 피해자들은 얼마나 긴장하며 그 시간을 보낼까?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친다.

그러나 앞서도 적었지만 사법부는 서민의 고통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지금 법원은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당시 벌어진, 이른바 '사법 거래' 의혹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그런데 1년 넘게 법원 문턱을 드나들어 보고, 형사보상 청구를 해보니 '높으신' 판사들이 서민의 삶이 걸린 사건을 거래수단으로 삼은 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판사들로선 매일 같이 수북이 쌓인 사건에 치인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쌓여 있는 서류뭉치들은 이 나라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삶을 뒤바꿀 수 있는 심각한 사안들이다. 의혹을 받고 있는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 거래로 KTX 해고노동자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법부에 계신 모든 판사들께 바란다.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 뭉치의 무게는 서류에 적힌 사람들의 삶의 무게다. 그 무게를 가벼이 여기지 마시라. 또 재벌 총수나 유력 정치인의 이름만 보고 솜방망이 처분을 내리지 마시라.

지금 사법부는 신뢰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국민의 신뢰를 잃은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법부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무게를 가벼이 여겼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본다.

사법부가 국민들의 삶의 무게를 제대로 헤아릴 때, 실추된 신뢰가 회복되리라고 믿는다.


태그:#양승태, #사법거래, #KTX해고노동자, #사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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