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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블로그나 <오마이뉴스>에 쓴 글을 한참 후 읽다 보면 가슴 철렁하다. 나의 경험과 생각을 적은 에세이인데도 글 쓴 사람이 내가 맞는지 가끔 낯설다. 우물쭈물 얼렁뚱땅 사는 나는 없고 단호함과 결기로 가득 찬 사람이 있다. 그럴듯한 계획과 결심은 얼마나 남발했는지. 편견에 찬 투덜이는 어디가고 공명정대의 화신으로도 돌변했다. 아, 나 또 책임지지도 못할 글을 썼구나.

그래서 지인들로부터 내 글을 읽어보았다는 연락을 받으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몰래 나쁜 짓 하다 들킨 것 같아서. 평소엔 글만큼 말을 잘하지 못해서. 때론 글과 딴 소리를 해서. 문체와 말투가 달라서. 글 쓰는 인격과 말하는 인격이 따로 노는 것만 같아서. 앞에선 말 못하는 주제에 집에 와서 '열폭'하는 '키보드 워리어'(인터넷에서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란 신조어)가 된 것만 같아서. 그 사람 나 아니라고 발뺌하고 싶어진다.

말하기는 발산이고 글쓰기는 충전이다

나는 말하기보다 글쓰기를 좋아한다. 글쓰기가 쉽다는 말도 아니며 자랑하는 말도 아니다. 단지 말보다 글이 생각을 더 명확하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점, 또 얼굴 대면보다 문자 대면이 편하다는 점 때문이다.

말하기나 글쓰기나 자기표현이라는 면에서 비슷하지만 상당히 다른 구조를 지닌다. 글은 심사숙고하며 고친 끝에 전달될 수 있지만 말은 글보다 즉흥적이다. 정해진 원고에 따라 읽는 경우도 있지만 원고를 넘어서는 생동감 있는 말하기가 필수다. 청자의 반응에 따라 실시간으로 내용과 흐름을 바꾸는 순발력도 요구된다. 단순 수다를 넘어서는 말하기는 그래서 어렵다. 생각이 자꾸만 미끄러지고 명료한 단어를 선택할 시간도 부족하다. 할 말 다 못한 채 찝찝하게 끝나 버리곤 한다.

글은 여러 차례 수정된 결과물이다. 비공개 일기나 140자 제한의 SNS 글쓰기를 제외한 최소 500자 이상의 공적 글쓰기는 그렇다. 주제를 정하고 단락을 채우고 살을 붙이고 단어와 문장을 매만지기를 반복한다. 두서 없이 엉킨 생각의 갈래가 한 단어, 한 단어 제 모습을 찾아가며 또렷해진다. 내가 모르던 사실도 글을 쓰며 정리해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말이 막힐 때마다 글로 도망쳤다. 글에선 원 없이 말할 수 있었다.

말하기엔 발화자의 몸짓, 목소리, 태도가 반영된다. 발화자의 매력에 따라 똑같은 내용도 다르게 전달된다. 그 점이 말하기를 글쓰기보다 '덜 치밀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글쓰기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기도 한다. '온 몸'을 동원해야 하고 상대와 실시간으로 소통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말하기를 오래 할 때 나는 소진되는 기분을 겪는다. 진이 빠지고 기가 빨린다.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을 가지지 않아서 참말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반면 나에게 글쓰기는 '충전'이다. 말할 땐 상대의 눈치를 살핀다면 글을 쓸 땐 세상 안 무섭고 거침없다. 얼굴, 목소리, 행동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또 하나의 인격을 '창조'할 수도 있는 글쓰기는 나의 안식처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커피를 홀짝이며 차분히 글을 쓸 때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 같다.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 속에 나는 가지런해진다. 말하기가 에너지를 발산한다면 글쓰기는 에너지를 모은다.

말이 곧 글이고, 글이 곧 말이었으면

문제는 말과 글 사이의 간극이다. 생각이 말로 줄줄 나오고 말을 받아 적으면 그대로 글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말을 구성지게 잘해서 받아 적으면 입말이 살아있는 글이 되기도 하고, 말 자체가 문어체라 옮기면 고스란히 문장력 넘치는 글이 되는 사람.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의 육성이 들리는 경우. 참으로 부럽다.

"사는 만큼만 쓸 수 있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한 단어, 한 단어 쓸 때마다 생각을 언어화하고 언어는 다시 사고를 조정하면서 삶이 달라져 간다"고 어느 소설가는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글과 말 사이, 그 사이에 붕 떠 있는 삶을 수시로 실감한다.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말. 그래서 글이 되지 못하는 말. 잘 쓰고 싶은 마음에 말을 살려내기는커녕 말의 생생함조차 죽여 버리는 글. 내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가 싶어서.

말과 글 사이가 먼 이유는 아마도 아직 내 안에 쌓인 내용이 부족하고, 그래서 술술 말이 나오지 않고, 말이 곧바로 글이 될 만큼 생각이 덜 익었다는 증거일 터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앞서 설익은 내공을 매끈한 문장으로라도 만회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써야 할까. 그저 궁리하고 연습한다. 간극을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생활 밀착형' 글쓰기를 지향하는 건 나의 비루한 전략이다. 매일 피부로 부딪히는 일상과 다소 먼 사안에 대한 '논평'은 가급적 지양하려 한다. 부족한 지식이 드러날까 염려스럽고 무엇보다 내가 어떤 사안을 거리 두며 비판할 만큼 '떳떳이 살고 있는지' 자신이 없어서다.

그래서 어떤 주제의 이야기를 쓰더라도 내 삶에서 만나는 지점을 언급하려 한다. 자꾸만 '일기'라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내 이야기를 뺄 수 없는 이유다. '너는 네가 쓰는 만큼 살고 있어?'라고 묻는다면 반격할 최후의 변명거리라도 마련하려고.

삶을 좋게 포장하고 싶은 욕망, 글 안에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은 잠복해 있다가 수시로 치고 나온다. 글을 쓰다보면 자꾸만 나의 현 상황보다 '바람'을 적게 된다. 나란 사람이 자꾸만 부풀려 진다. 경계해야 함을 알면서도 유혹을 느낀다.

글 안에서 실현하는 삶이 아니라 내 삶을 바짝 따라 붙는 글을 쓰고 싶다. 글도 말도 그 사람의 인격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 밖에 없다면, 간극을 감출 수 없다면. 이래나 저래나 '떳떳할 수 없다면', 차라리 '대놓고 부끄러워지기'를 선택하는 것도 차선책. 나의 어설픔과 부족함을 글로 '밑밥' 깔아둔다. 그리하여 누군가 내 입술의 망설임과 버벅거림을 알아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반절 성공이다. 말하기와 글쓰기 사이의 자아 분열을 겨우 만회한 셈이다.

글쓰기의 유혹을 느낄 때마다 다짐한다. 글로 뻥치지 말자. 글 안으로 도망친다 해도 쓴 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태그:#글쓰기 , #시민기자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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