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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궁과 월지 과거에는 안압지라 불렀지만 지금은 '동궁과 월지'로 명칭을 바꿔 부르고 있다. 이곳은 야경이 좋다.
▲ 경주 동궁과 월지 과거에는 안압지라 불렀지만 지금은 '동궁과 월지'로 명칭을 바꿔 부르고 있다. 이곳은 야경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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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동궁과 월지라고 불러 주세요

"궁궐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4년 (674)

"동궁을 짓고 안팎의 문 이름을 정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9년 (679)


경주 시내 월성과 국립경주박물관 옆에 유명한 안압지(사적 제18호)가 있다. 본래 안압지는 신라 시대 동궁에 딸려 있던 인공 연못으로 추정된다. 신라 당시에는 월지(月池)라고 불렀다. 안압지는 조선 시대 때 붙여진 이름이다. 이미 폐허가 되어 갈대가 무성한 연못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기러기와 오리의 연못,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동국여지승람>(1481년 편찬)에 이미 안압지라고 되어 있으니 이 명칭이 적어도 500년 이상은 된 이름이긴 하다.

하지만 안압지 발굴 당시 '월지(月池)'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으므로, 월지가 맞는 표현이긴 하다. 요즘에는 문화재 당국이나 경주시 측에서도 원래 명칭인 월지로 바꾸고 홍보하고 있다. 그렇지만 워낙 안압지라는 이름이 보편화되어 있어 아직 '안압지=동궁과 월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아래선 '동궁과 월지'를 사용한다).

동궁과 월지 건물은 옛 모습이 아니지만, 연못은 옛 모습에 가깝다.
▲ 동궁과 월지 건물은 옛 모습이 아니지만, 연못은 옛 모습에 가깝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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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문무왕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무산십이봉을 본떠 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어 진기한 새와 동물을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이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들을 보면 본래 동궁에 임해전이 있고, 이 임해전 옆에 월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월지가 왕실의 동물원 내지는 왕족과 귀족들의 놀이터나 휴식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기록상으로도 주된 기능은 역시 연회였다. <삼국사기>에도 주로 연회 장소로 나오고 있다. <삼국사기> 효소왕 6년(697)조에 "임해전에서 군신(群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라는 기록 등이 있다. 후백제 견훤에게 경애왕이 살해당한 후 경순왕이 고려의 도움을 얻기 위해 왕건을 초청(931년)하여 연회를 베푼 곳도 이곳이다.

동궁과 월지 야경  월지를 한바퀴 돌면 월지의 다양한 모습을 즐길 수 있다.
▲ 동궁과 월지 야경 월지를 한바퀴 돌면 월지의 다양한 모습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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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은 왜 전쟁 중에 동궁과 월지를 만들었을까

요즘 같은 더운 여름에는 낮보다는 밤에 가는 것이 좋다. 동궁과 월지의 야경은 정평이 나 있다. 또 연못 곳곳에는 연꽃이 피어 있어 꽃을 보는 즐거움도 있다. 게다가 동궁과 월지 주변에는 연꽃 단지가 조성되어 눈요기가 되고 있기도 하다. 날씨가 더워도 연꽃을 보고 즐기며 사진을 찍는 재미가 있어 잠시 더위를 잊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여름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동궁을 조성할 때 동궁의 임해전(臨海殿)이라는 건물 명칭에 걸맞게 동해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3개의 인공 섬을 연못에 세웠으며, 월지를 만들 때 사용한 돌들 역시 바닷가에서 옮겨온 것들이 많다고 한다. 바닷가의 돌을 실어와 거대하고 상징적인 '바다'를 만들었던 셈이다.

월지의 백련  7~8월에는 월지에 연꽃이 피어 청초한 풍경을 더한다.
▲ 월지의 백련 7~8월에는 월지에 연꽃이 피어 청초한 풍경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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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무왕이 이 거대한 인공 연못과 건축물들을 만든 시점은 674년이다(정확히 말하면 674년에 시작해서 679년에 끝났다). 674년, 이때는 아직 나·당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다. 끝나기는커녕 하루하루가 급박한 형세를 이루고 전쟁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당나라와의 전쟁은 요즘 식으로 따지면 미국과의 전쟁이다. 현실적으로 이기기 어려운 무모한 전쟁이었던 셈. 그래서 내부에서는 당과 내통한 귀족(아찬 대토)의 반란 음모가 진행되기도 했다. 사전에 발각됐지만.

오죽하면 김유신이 사망(673년)하기 한 달 전에 문무왕이 병석의 그를 찾아가 "만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며, 사직을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봤을까. 다 죽어가는 외삼촌에게 뭔가 대책이 없냐고 물어보고 있으니, 문무왕 본인에게 별다른 대책도 없었고, 최후의 순간을 생각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의미이다.

왕자 시절부터 중국을 오가며 전쟁과 외교를 오락가락하는 일촉즉발의 위기도 경험하고, 아버지(태종 무열왕)가 사망한 후에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 전쟁터에 직접 나서기도 하며 아차 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피곤한 긴장을 겪고 있는 상태였다. 이른바 총력전의 상황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정신적 압박을 받아서였을까. 잠시라도 쉬고 싶어서였을까. 자칫하면 전쟁 중에 왕이 놀이터 만들었다고 비난받을 만한 일인데, 월지(안압지)를 만든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전쟁 중이라도 서라벌(경주)은 안전 지대였기 때문에 홈그라운드에서만은 편안하게 지내고 싶었을까.

동궁에 동물원을 만들고 인공 연못인 월지를 만든 674년, 이 1년 동안은 대규모의 전투가 없었던 일종의 휴식기였다. 어느 정도 긴장을 풀며 쉬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왕이 되기 전부터 전쟁에 휘말리고 왕이 된 이후에도 승산 없는 전쟁 때문에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어 왕 다운 권력과 즐거움(?)을 누려보지 못했던 그를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불과 1년 전인 673년은 신라군이 임진강 일대에서 당군에게 파멸적 패배를 당하고 군대와 식량이 부족하다고 쩔쩔매던 시기였다. 만약 당군이 승기를 타고 그대로 밀고 내려왔으면 큰 위기를 맞았을 텐데, 당군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군대를 재정비하고 준비하는 1년여 시간의 여유가 있어 이때 동궁과 월지를 조성한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동궁과 월지를 조성한 다음 해인 675년 당군과 신라군이 정면 대결을 벌인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고 전황이 유리해졌다는 점이다. 676년의 기벌포 전투에서는 신라가 당의 설인귀 군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결국 당은 한반도에서 발을 빼게 된다. 신라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이었던 것.

이렇게 전쟁이 승리로 끝났기에 망정이지 만약 패배하거나 굴욕적인 결과로 끝났다면 이 동궁과 월지의 조성은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아마 제정신이 아닌 왕의 일탈이거나 폭정의 상징 혹은 전쟁 패배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지목되지 않았을까.

월지 입수구 월지로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를 복원해놓았다. 사람들은 물에 손을 넣고 피서 즐기기에 바쁘다.
▲ 월지 입수구 월지로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를 복원해놓았다. 사람들은 물에 손을 넣고 피서 즐기기에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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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는 야경이 좋다

'전쟁 중에 국왕이 만든 동물원과 놀이터.'

동궁과 월지를 이렇게 표현하면 대단히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었다 할지라도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지만, 이미 1400년 전의 이야기이다. 이 건설 사업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이제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안압지라 불렸던 그곳에 가보자.

동궁과 월지는 1974년 준설 작업으로 간략한 조사만 시행하려 했다가 예상 외로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본격적인 발굴 조사에 들어갔다.

결국 1975년 3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1년 9개월간 발굴 작업을 진행하여 1만 5023점의 유물을 건져 냈다. 연못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것들이라 보존 상태도 좋았다고 한다. 유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이 유물의 보존을 위해 국립경주박물관에 월지관(구 안압지관)을 따로 만들어 보존, 전시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동궁과 월지는 발굴 조사가 모두 끝난 뒤에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복원해 놓은 것들이다. 사실 복원 당시에는 신라의 건축물들에 대한 자료, 정보나 이해가 부족하여 당대 건축물 형태로 복원한 것은 아니다. 즉, 신라 때 모습이 아닌 것이다. 지금 같으면 충실한 복원이 아니라고 말이 많았을 것이다.

월지 출토 주령구  신라의 귀족들이 즐겼던 14면체의 주사위이다. 각 면에 벌칙을 적어 놓아 주령구를 던져 그 면에 나오는 벌칙을 그대로 따라 해야 했다.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 전시.
▲ 월지 출토 주령구 신라의 귀족들이 즐겼던 14면체의 주사위이다. 각 면에 벌칙을 적어 놓아 주령구를 던져 그 면에 나오는 벌칙을 그대로 따라 해야 했다.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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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궁과 월지에서는 유물이 정말 많이 나왔는데, 당시 귀족들이 게임을 즐기던 주사위가 출토되어 주목받기도 하였다. 일명 주령구라고 한다. 정사각형 면 6개와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다.

주령구에는 면마다 벌칙이 새겨져 있어 굴려서 나오는 내용의 벌칙을 그대로 따라 하게 되어 있었다. "노래 없이 춤추기", "술 석 잔 그대로 마시기(이른바 삼배주 원 샷)", "다른 사람이 간질이고 귀찮게 굴어도 가만히 있기". 벌칙의 일부 내용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서 볼 수 있다.

평지에 만들어진 인공 연못 월지를 한 바퀴 휘 돌아보면 의외로 규모가 크다는 데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신라의 국왕이 연회를 베푼 일이 많았고 술잔을 연못에 띄우기도 했다는 월지. 나무로 만든 배까지 발굴된 것으로 보아 배를 타고 연못을 돌며 놀기도 했을 것이다.

신라 당대에는 왕실 사람들과 귀족들 일부 특권층들만 출입했을 곳이지만, 지금은 일반 국민 모두 훌륭한 역사 유적지이자 산책 코스로 활용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곳은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궁과 월지 야경  여름에는 더운 한낮을 피해 야경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밤에 사람이 더 많은 진풍경이 펼쳐진다.
▲ 동궁과 월지 야경 여름에는 더운 한낮을 피해 야경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밤에 사람이 더 많은 진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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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동궁과 월지의 야경은 경주의 대표 관광 브랜드로 떠오르고 있다. 매일 해질 무렵부터 밤 10시까지 불을 밝힌다. 비록 옛 건물은 아니나 야경에 운치는 가득하다. 특히, 연못에 들어앉은 7~8월의 연꽃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청초하고 아름답다. 문득 신라 당대에도 연꽃이 피어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동궁과 월지는 현대적 모습이라 이 자체로는 문화유산 답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동궁과 월지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국립경주박물관에 들러 월지관(구 안압지관)을 따로 찾아야 한다. 발굴된 유물들의 일부이지만, 눈에 띄는 대표적인 것들이 추려져서 월지관에 전시되어 있다.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우니 반드시 들러 볼 것.

연꽃단지  동궁과 월지 옆에는 연꽃 단지가 따로 조성되어 있어 여행객들의 발길을 붙든다.
▲ 연꽃단지 동궁과 월지 옆에는 연꽃 단지가 따로 조성되어 있어 여행객들의 발길을 붙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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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정보]

* 주소: 경북 경주시 원화로 102
* 문의: 동궁과 월지 매표소(054-750-8655)
* 개방 시간: 오전 9시~밤 10시
* 입장료: 어른 2000원, 청소년 1200원, 어린이 600원
* 주차: 100여 대 이상 가능, 국립경주박물관에 주차하고 걸어가도 된다.

* 가는 법
자가용: 경부고속도로 경주IC→경주 시내로 진입, 남천을 건너 인왕동 사거리에서 좌회전, 7번 국도를 따라 직진하면 우측에 안압지가 있다. 건너편이 월성이다.

대중교통: 경주는 시내 전체가 역사 유적지인 만큼 시내버스 체계가 잘 되어 있다. 경주역, 혹은 경주고속버스터미널, 경주시외버스터미널 등에서 600번 버스를 비롯, 여러 시내버스를 이용해 동궁과 월지 입구에서 하차한다. 인원이 3명 이상 되면 택시를 타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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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여행작가, 문화유산 답사 전문가. 개인 저서 6권. 공저 다수. 여행을 삶의 전부로 삼아 나그네의 길을 간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