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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약"이라 하지만, 70년이 흘러도 가슴에 응어리를 간직하며 사는 이들이 있다. 한국전쟁 전후 이념과 권력자의 탐욕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빨갱이의 반란'이라는 오해는 여전하기에, 특별법 제정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실정이다.

7월 16일 이른 7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와 사회적공론화미디어투쟁단이 주최한, 백비(白碑) 민간인 학살지 순례단 출정식이 열렸다. 이들은 2박 3일 일정으로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주둔한 여수 및 군인들이 이동한 순천과 보성을 찾았다. 이 목적은 묻힌 과거를 청산하고, 유가족의 고통을 이해하며 전국민적 관심을 환기시켜 법 개정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순천역 광장에서 열린 백비 순례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와 사회적공론화미디어투쟁단이 주최한, 백비(白碑) 민간인 학살지 순례단이 17일 순천역 광장에서 희생자들을 위해 묵념을 하고 있다.
▲ 순천역 광장에서 열린 백비 순례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와 사회적공론화미디어투쟁단이 주최한, 백비(白碑) 민간인 학살지 순례단이 17일 순천역 광장에서 희생자들을 위해 묵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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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국군준비대 등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이 선포, 도청 소재지 별로 9개 연대로 구성된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다. 그중 제4연대는 1946년 2월 광주에서 창설, 48년 1월에 부대 편성을 완료했다. 그리고 이 연대 소속 중 안영길 대위 이하 1개 대대 병력이 제14연대를 여수 신월리에 5월 4일에 창설했다. 이곳은 일제치하에 여수항공기지로 사용되던 군용지였다.

그리고 10월 19일에 제14연대 군인들은 제주4·3 진압 출동을 거부,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명의로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란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그리고 동족상잔 결사반대와 미군 즉시철퇴를 주장했다.

이에 동조한 지역민과 여기에 좌익세력이 합세하면서 봉기군들은 순천, 광양, 구례, 보성, 고흥 등 전남 동부를 장악했다. 이승만 정부는 광주에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미군의 지원을 받아 10월 23일에 순천, 27일에 여수 진압을 마무리한다.

당시 군경과 우익세력은 일명 '손가락총'으로 봉기군에 가담하거나 협력한 민간인들을 색출하여 무참하게 학살했다. 그리고 '빨갱이의 반란'으로 몰아 그 빌미로 반공독재국가 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희생자 유가족들을 연좌제로 묶는 등 박해했다.

하지만 이 '반란' 사건의 진상을 계속 파헤친 주철희 박사는 선량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국가 폭력에 대한 항거로 결론 내렸다. 이에 기존의 "여순반란"이 아닌, "여순항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순항쟁 희생자를 위해 올린 제사 7월 17일 백비 민간인 학살지 순례단이 제14연대 봉기군과 경찰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장대다리 밑에서 표식을 설치하고, 희생자들을 위해 제사를 올렸다.
▲ 여순항쟁 희생자를 위해 올린 제사 7월 17일 백비 민간인 학살지 순례단이 제14연대 봉기군과 경찰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장대다리 밑에서 표식을 설치하고, 희생자들을 위해 제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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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5·18 민주화운동"이 과거 군사정부가 강요한 "폭도들의 반란"이라는 오명에서 탈피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제주4.3"이 특별법으로 제정된 것과 달리, 이와 연계선상에 있는 여순항쟁은 여전히 미정이다. 따라서 명백한 국가 권력의 피해자임에도 지금도 '반란자'로 오해를 받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배상조차 받지 못하는 유가족들이 발생했다.

당시 1948년 11월 1일 전남보건후생국 조사를 시작으로 49년 10월 25일 전남 당국에서 확인한 것만 포함해도 인명 피해는 무려 1만1131명에 이른다. 그리고 '여순사건 순천시민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순천의 피해자 대부분은 민간인으로, 우익에 의한 피해가 66.9%에 이르렀다. 피해자는 20대 희생자 45.4%로 가장 많았고, 30대도 19.8%이며, 심지어 어린이와 노인도 있었다.

기자는 순례 이틀째 코스인 순천에서 순례단을 만났다. 전날인 여수는 주 박사가 학살지 안내자를 맡았으나, 순천에서는 박병섭 순천여고 교사가 담당했다. 일행은 봉기군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한 기점이 된 순천역 광장에 먼저 집결했다. 여기에는 6월 순천대학교에 설립된 여순연구소 최현주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도 있었다.

2004년에 순천시민연대는 여순사항쟁의 전개와 관련된 6곳에 안내판을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순천역 광장에 있었다. 박 교사에 따르면, 안내판 앞면에 장소를 기재하고 뒷면에 지역민들이 알기 쉽게 사건 설명이 되어 있어서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 표지판의 내용을 가지고 시비"가 있었고, "왜 '반란군'이라 하지 않고 '봉기군'이라 하느냐, '공격'했다가 아니고 '진출'이라 하느냐" 등으로 경찰서와 시청에 신고가 들어왔다.

이후 순천역사가 철도노선 개량사업으로 주변 정비를 하던 때에 아무 고지도 없이 안내판이 제거되었다. 다른 표지판도 어느새 사리지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낙안 신전마을에 있던 것마저 마을길 정비사업 도중에 사라졌다.

순례단에게 장대다리에 대해 설명하는 박병섭 교사 박병섭 순천여고 역사교사가 순례단 일행에게 17일 장대다리 위에서 당시 사진을 보여주며 1948년 여순항쟁 당시 봉기군과 경찰의 치열한 교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순례단에게 장대다리에 대해 설명하는 박병섭 교사 박병섭 순천여고 역사교사가 순례단 일행에게 17일 장대다리 위에서 당시 사진을 보여주며 1948년 여순항쟁 당시 봉기군과 경찰의 치열한 교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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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역 광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촬영하고 중간에 단톡방에 소식을 전하는, 고령의 여성 장경자 씨가 눈에 들어왔다. 두 번째 코스로 방문한 동천의 장대다리에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여름이 선사한 죽도봉과 하천의 풍성한 녹음, 유유히 흐르는 동천. 17일이라 5일장인 아랫장이 서서 폭염에도 행인과 차량이 장대다리를 드문드문 오갔다. 더없이 나른하고 평온했다.

그러나 70년 전 이 다리와 동천 제방은 봉기군과 경찰 사이에 최초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다리 위에는 시신들이 있었고, 죽도봉 인근에서는 시신을 불태우며 피어오른 죽음의 냄새가 휘감았다.

장 씨는 이수중학교에서 학살당한 102명 중 한 명의 유가족이다. 당시 죽도봉 능선에 이 학살을 위해 경찰과 군인 600여 명이 집결했다고 한다. 1945년 2월 출생인 장 씨에게 1948년 11월 30일 벌어진 학살로 비탄의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장 씨에게는 29살인 철도원 아버지와 26살 어머니, 음력 10월에 태어난 돌잡이 여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일한 19살 외삼촌도. 선친은 제14연대가 왔을 때 "잘들 좀 들어 봅시다" 이 말 한마디 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진압했으니 나와서 일해라" 하여 철도광장에 모였던 날에 밀고자, 우익청년단체, 목사, 선교사, 경찰들이 있었다고 한다. 장 씨에 따르면, 모 씨를 비롯한 웃어른에게 평소 아버지가 이쁨을 받았으나, 막상 진압군이 오자 변심하여 자신은 쏙 빠지고 선친을 내세웠다고 한다.

유가족 장경자 씨 7월 17일 순천 장대다리에서 여순항쟁 유가족인 장경자 씨가 죽도봉을 가리키며 29살에  철도원 선친을 포함한 102명이 학살당한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유가족 장경자 씨 7월 17일 순천 장대다리에서 여순항쟁 유가족인 장경자 씨가 죽도봉을 가리키며 29살에 철도원 선친을 포함한 102명이 학살당한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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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2007,8년에 장 씨는 인근에 산보를 나온 당시 목격자 철도원 출신 황 씨 노인에게 당시 (모 씨가)"손가락총을 했냐?" 물으니 "눈짓으로 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어머니와 외삼촌이 평생 한이 맺혀, 장 씨가 13,4살이 되자 직접 모 씨를 만나보라고도 했단다. 하지만 그 당시엔 소녀라 떨릴 것만 같고. 그 사람이 해쳤다고 말하지도 않을 거란 생각에 대면하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지금 같으면 했을 거라고.

당시 어머니가 어떻게든 선친을 구하고자 아기를 업고, 장대다리를 달리던, 군 고위직이 탄 지프차에 동네사람들이 써준 탄원서를 넣기도 했단다.

장 씨는 "어제 주 교수의 이야길 들어보니, 노근리 특별법이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미군의 잘못을 사과하고 생겼다고 하더라. 제주 4.3처럼 특별법이 생기려면 이번 70주년에 대통령이 사과해야"한다며, "이제는 바뀔 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앞서 노근리사건은 1950년 7월 미군이 충북 영동군 노근리 경부선 철로에서 기관총으로 양민 200여 명을 학살한 것으로, 반미 감정이 고조되자 2001년 1월 미군에 의한 학살을 인정하고, 미국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한 후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장 씨는 올해 제주 4.3 항쟁 기념식장에서 나오던 문재인 대통령 손을 잡고 "여순항쟁 밝혀주세요"라고 두 번이나 말했다며, 당시 손을 잡고 안 놓아주니 경호원이 "손 좀 놔주세요"라고 사정을 했던 일화도 들려주었다. 3,4살 유아는 어느덧 70대가 된 노구에도 여전히 선친과 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한 이들이 진상을 밝히기 위해 오늘도 땀을 흘리고 있다.

박병섭 교사의 다큐 인터뷰 17일 장대다리 순례가 끝난 후 박병섭 순천여고 교사가 EBS <다큐 시선>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다큐 시선> 취재진은 이번 순례단 일정을 밀착 취재하고 있었다.
▲ 박병섭 교사의 다큐 인터뷰 17일 장대다리 순례가 끝난 후 박병섭 순천여고 교사가 EBS <다큐 시선>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다큐 시선> 취재진은 이번 순례단 일정을 밀착 취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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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 6800만 원과 시민 모금으로 설립한 여순항쟁 위령탑이 있다. 위령탑 아래의 받침돌은 한반도, 위아래로 갈라진 돌은 이념과 한반도의 분단, 위로 뻗은 여러 돌은 희생자의 넋을 상징한다. 위령탑 주위 비석에 희생자 명단이 있는데, 이는 순천 유족회에 가입되고, 희생자가 진실화해과거사정위원회에서 편찬한 확인결정문에 등록된 경우로 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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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로 '좋아할, 호', '낭만, 랑',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이'를 써서 호랑이. 호랑이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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