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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호와 군산 도선장(1950년대)
 경남호와 군산 도선장(1950년대)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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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장항 도선 사업은 광복 후 군산시가 직영하게 된다. 그럼에도 객선은 이름을 바꾸지 않고 '경남환'(京南丸)으로 운항하였다. 일본식 표기인 환(丸·마루)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 그나마 배가 노후해서 휴항이 잦았다. 객선이 결항할 때는 미창(대한통운 전신) 소속 바지선인 영운호(永運號)나 소형 선박으로 대체했다.

60~70년대에는 경남호(91,3톤), 군산 1호(108톤), 군산 2호 등 세 척이 15~20분 간격으로 오갔다. 설이나 추석 대목을 앞두고는 자정이 넘도록 운항할 때도 있었다. 장항선 열차가 20~30분 연착하는 것은 예사이고, 명절을 앞두고는 열차마다 한두 시간씩 연착하는 바람에 늦도록 기다렸다가 귀성객을 싣고 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야간 통행금지가 삼엄했던 유신정부 시절. 자정이 넘어 장항역에 도착한 군산, 옥구, 김제 지역 승객들은 수상파출소 검문 담당 경찰이 팔목에 찍어주는 확인 도장으로 방범대원들의 길거리 심문을 통과,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서천군 소속인 '서천호'가 추가 운항하였다. 서천호 선착장은 군산 도선장 옆에 잔교 1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1984년 금강도선공사 설립 이후 금강호가 가세했으나 1990년 금강하굿둑 완공 이후 승객이 줄자 서천호와 군산호는 휴항하고, 금강호가 뱃길이 끊기는 2009년 10월 31일까지 운항하였다.

차량운반 선박 안창호(1950년대)
 차량운반 선박 안창호(1950년대)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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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대형화물차, 승용차 등 차량을 실어 나르는 선박도 있었다. 갑판이 앞마당처럼 넓은 안창호(51톤)였다. 안창호는 하루에 4~5회 운항하였다. 승용차가 급격히 증가하는 1970년대 이후에는 10회 이상으로 늘어난다. 도선장은 차량을 선적하는 선원들의 고함소리로 요란했다. 트럭 기사들이 대기 시간에 화투를 치다가 싸우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충청도 읍면 단위 소재지는 물론 내륙 산간지역에서 군산으로 수학여행 오는 학생이 많았다. 벽지에서 자란 그들에게 안창호는 이만저만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어린 학생들은 조수에 따라 뜨고 내리는 부잔교(뜬다리)나 미국에서 잉여농산물을 싣고 온 1만 톤급 무역선보다 자동차를 10여 대씩 싣고 운항하는 안창호를 보면서 놀라워했다.

기록에 따르면 1981년 당시 안창호는 하루 왕복 8~10회 운항하였다. 요금은 3500원(소형화물차)~6000원(특수차량)까지 아홉 종류로 나뉘었다. 그러나 운항횟수가 적고 대기 시간이 길어 한 번 건너는데 4~5시간씩 소요될 때도 있었다. 기사들은 밤새우기가 일쑤였고, 오후 7시면 뱃길이 끊겨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객선은 하루에 7천~1만 명이 이용하였다. 운항 시간은 15~20분 간격으로 해마다 승객이 증가하였다.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는 1988년에는 하루 이용객이 3만에 달하였다.

1970년대 군산호
 1970년대 군산호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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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과 장항은 직선으로 1,9km 뱃길로는 3km쯤 됐다. 도선 이용객은 직장인을 비롯해 학생, 영세상인, 날품팔이 노동자 등 다양했다. 해가 멀쩡한 날에도 풍랑경보나 주의보가 내리면 뱃길이 끊기기 일쑤였다. 그래서 학생들은 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섰다가 발길을 돌려야 했고, 수업 중 풍랑경보가 내리면 저녁을 사 먹고 여관방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1년에 뱃길이 막히는 날은 평균 20여 일. 군산의 중고교에서는 일기불순으로 배가 결항할 경우 장항 통학생은 결석으로 치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을 못 받는 피해는 어쩔 수 없었다. 학교 측에서는 뱃길이 묶이면 시내 학생과 통학생들로 조를 편성해 급우를 집에 묵게 하였다.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돈을 거둬 단체로 여관이나 여인숙에 투숙했다.

군산 지역 학생들이 장항제련소로 소풍이나 견학을 가기도 했다. 흥남제련소, 진남포제련소 등과 함께 1936년 준공한 장항제련소는 일제강점기엔 수탈, 광복 후에는 산업화의 상징이 되였다. 특히 바다를 배경으로 바위산에 우뚝 솟은 굴뚝은 문인, 화가, 사진작가 등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였다.

장항제련소 소풍 기념사진(1960년대)
 장항제련소 소풍 기념사진(1960년대)
ⓒ 정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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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장항제련소로 소풍을 다녀왔다는 정영선 문화관광해설사 추억담을 들어본다.

"초등학교 5학년 때(1965) 장항제련소로 소풍가면서 급우들과 군산도선장 선착장에서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카메라가 뭔지도 모르던 때였죠. 담임선생님이 찍어주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무척 세련된 선생님이셨나 봐요. 마을 입구 솟대처럼 우뚝 솟은 제련소 굴뚝을 비롯해 시골 장터처럼 시끌벅적했던 도선장 풍경, 그리고 사진을 찍어준 선생님과 급우들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네요. 엔진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왔던 군산호도 타보고 싶고요."

군산의 장년층들은 어린 시절 장항제련소 굴뚝에서 영원감(永遠感)을 체험하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방향이 달라지는 굴뚝의 연기가 사춘기 청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50~60년대 젊은이들은 군산선(군산-이리)을 오가는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와 장항제련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열애하듯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였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1970년대 군산 도선장)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1970년대 군산 도선장)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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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과 전북을 잇는 가교와 같았던 군산-장항 도선, 1970년대 군산 서해방송(SBS)은 도서지역 어민들의 친근한 벗이었던 <파도를 헤치며> 프로를 통해 이곳의 운항 시간 및 동정을 전하였다. 그만큼 중요한 뱃길로 국도나 다름없었다.

마중나온 사람과 배웅나온 사람으로 항상 북적였던 도선장. 이곳은 10년 만에 고향을 찾아온 친구와 얼싸안고 반가워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나는 아들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는 어머니, 내년 봄 약혼식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청춘남녀 등 만남과 이별의 장소이기도 했다.

맘보바지에 트위스트가 유행하던 60~70년대. 그 시절에는 기차여행 중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사이다와 삶은 달걀을 나눠 먹으며 집안 내력을 묻곤 하였다. 청춘남녀들은 열차에서 시작된 대화가 장항역에 도착, 도선장까지 걸어오는 사이에 무르익어 군산호 객실에서 주소를 주고받으며 인연의 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승선 시간은 15~20분. 배마다 상주하는 잡상인이 있어 무료하지 않았다. 제조 회사가 불분명한 소화제, 손톱깎이, 구두약, 고무줄, 편지지, 천자문 등을 파는 그들의 구수한 입담을 듣는 재미도 쏠쏠했다. 극장의 변사 이상으로 언변이 좋았던 그들은 짧은 시간에 앞뒤 객실을 오가며 팔았다. 승객들도 구면이어서 그런지 인사치례로 사주었다.

장항에 거주하는 산모가 심야에 갑자기 산기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배를 띄워 군산 도립병원에서 아들을 순산했다는 소식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였다. 산모가 친정에 가다가 객실에서 순산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선장이 산모에게 미역을 사주고 선원들이 돈을 모아 기저귀 감을 사줬다는 얘기는 잔잔한 감동을 자아냈다.

그런가 하면 승선권을 이중으로 판매, 현금을 빼돌리던 도선사업소 직원이 횡령죄로 구속됐다는 소식에서부터, 생활고를 비관하던 어느 집 가장이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얘기. 애인 사이로 보이는 청춘남녀가 동반 자살했다는 뉴스, 술취한 승객이 하선하다가 발을 헛디뎌 사망했다는 뉴스 등 가슴이 짠해지는 소식도 들려왔다.

개통을 앞두고 있는 동백대교
 개통을 앞두고 있는 동백대교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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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장항지역 주민들의 100년 숙원사업인 동백대교(총연장 3.2㎞)가 올 연말쯤 개통될 전망이다. 도선장 상공을 지나는 동백대교는 군산시 해망동에서 충남 서천군 장항읍을 잇는 왕복 4차선 교량이다. 교량 왼쪽에는 하늘과 바다가 온통 붉게 물드는 서해 낙조를 조망하며 걸을 수 있는 인도가 개설된다고 한다.

지역민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선장. 사계절 내내 북적대던 이곳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도 어언 10여 년이다. 갈매기도 찾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선착장 모습을 언제까지 지켜봐야만 하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육지의 거리만 재생할 게 아니라 바닷가 도선장도 재생해서 지역 패키지여행 코스로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그:#군산 도선장, #동백대교, #장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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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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