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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종종 불이 가져온 삶의 변화를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는 불과 함께 발전했다. 인간이 불을 활용하면서 야생에서 활동하는 맹수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불은 음식을 익혀먹는 식생활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반면 철의 제련을 통한 무기의 등장을 가져왔으며 전쟁과 폭력이라는 참혹한 세계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불과 관련해 거창하게 얘기를 꺼낸 것은 내가 손수 만든 화덕에 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지내온 어른들이 볼 때는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릴 수 있다.

시골에 있는 작은 농막 마당에 화덕을 만든 지 1년이 된다. 지난해 화덕 만드는 과정을 이 지면을 통해 잠시 소개한 적이 있다. 그 이후 화덕은 다양한 음식을 만들고 시험하는 조리시설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3박 4일 꼬박 불을 피워 경옥고를 만들었다
▲ 경옥고를 만드는 화덕 3박 4일 꼬박 불을 피워 경옥고를 만들었다
ⓒ 정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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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맛에 빠진 1년

불맛이라는 게 있다. 단맛이나 짠맛과는 다르다. 불맛은 불의 향기를 머금었기 때문에 불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런 맛 때문에 직화구이를 비롯해 바비큐 같은 음식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원시시대 인간이 사냥한 동물을 익혔을 때부터 불맛은 존재했을 것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시절까지도 우리가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맛이었다. 하지만 주된 주거 공간이 아파트로 옮겨지면서 식재료를 불에 직접 태우거나 익히는 조리법이 줄어들었다.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화덕에 밥을 짓고 반찬 만드는 장면을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원시인류가 먹었던 불맛의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시골에 농막을 지을 때부터 화덕을 구상했다. 어떤 형태로 화덕을 만들지 검색을 하고 책을 찾아보았다. 화덕의 세계도 매우 다양하고 넓었다. 손재주가 없는 내가 만들 수 있는 모양은 가장 일반적이고 단순한 형태였다.

2017년 6월에 만든 화덕. 완공 1년을 맞았다
▲ 화덕의 위용 2017년 6월에 만든 화덕. 완공 1년을 맞았다
ⓒ 정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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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는 폐가스통을 절단해 넣고 주위에 벽돌로 마감하는 것으로 화덕을 만들었다. 열의 효율성이나 전도율 등 물리적 상식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그저 삼겹살이나 잘 구워지면 된다며 스스로를 격려했다. 화덕을 만들고 가장 먼저 한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고기 굽기였다.

"역시 삼겹살은 장작에 구워야 제 맛이지."
"나무 연기가 스며서 그런지 불맛이 기가 막히네."
"식당에서 먹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르구먼."

반응은 칭찬일색이었다. 화덕을 중심으로 서넛이 모여 고기를 굽고 소주잔을 채우는 시골의 저녁은 고즈넉했다. 화덕요리의 반응을 본 이후부터 구울 수 있는 것은 모두 굽기로 했다.

가을에는 밤을 구웠고 석쇠 위에 감자를 구웠다. 쇠꼬치에 끼워 구운 소시지를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겨울에는 고구마와 가래떡을 불 위에 올려놓았다. 소고기는 두세 번, 장어는 한 번, 화덕을 거쳐 간 식재료는 다양했다. 밤하늘의 별과 달은 술잔을 채우게 하는 풍족한 기운이었고 꺼져가는 불씨는 깊은 밤 시간을 알려주었다.

3박 4일, 경옥고 만들기

지난해 추석 연휴에는 여러 날에 거쳐 화덕의 불을 꺼뜨리지 않았다. 연휴가 매우 길었던 덕분에 오래 전부터 생각한 경옥고 만들기에 도전한 것이다. 경옥고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흘 밤낮 불을 지펴야 하고 하루 식힌 다음에 다시 24시간 불을 지펴 중탕을 해야 한다. 제조방법은 인터넷검색을 거쳤다.

재료는 생지황, 백복령, 인삼, 꿀 네 가지다. 금산 약초시장에서 직접 재료를 구입했다. 말린 인삼을 곱게 갈아주는 가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생지황은 집에서 즙을 냈다. 네 가지 재료를 섞은 후에 작은 항아리에 담았다. 입구는 기름종이로 다섯 번을 싼 다음 베 보자기로 마무리를 했다. 큰 통에 물을 담고 그 안에 항아리를 넣은 뒤 중탕을 시작했다.

인삼,생지황,백복령을 가루와 즙을 내어 꿀과 섞은 모습. 항아리에 담아 사흘동안 중탕을 했다
▲ 경옥고 재료 인삼,생지황,백복령을 가루와 즙을 내어 꿀과 섞은 모습. 항아리에 담아 사흘동안 중탕을 했다
ⓒ 정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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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내내 불을 지펴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부족한 물도 계속 채워 넣어야 했다. 불을 피는 것은 아들 녀석과 함께 했다. 특히 밤에는 졸음이 쏟아져 야간 불 당번은 아들이 담당했다. 스물한 살 청년이 밤새 화덕 앞에서 불을 봐야 하는 건 참으로 지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걱정을 했지만 기우였다. 녀석은 노트북을 가지고 게임을 하며 짧은 밤을 새웠다.

"밤에 별이 참 맑아서 좋았어."
"밤새 게임하지 않았니?"
"게임도 했지만 하늘도 여러 차례 쳐다봤지."
"힘들지는 않고?"
"재밌네. 계속 화덕 앞에 앉아 있으니까 몸에 불 냄새가 밴 것 같아."

화덕에 밤낮으로 불을 지피니 길가는 동네 사람도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그냥 약을 달이는 것이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무슨 약인지는 몰라도 명약이 나오겠네."

이런 농담을 건네는 동네 사람도 있었다. 추석연휴 때 만든 경옥고는 지금까지 먹고 있다. 경옥고는 치료약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농축영양제 개념이다. 팔순 넘게 장수한 영조임금이 경옥고를 즐겨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화덕 앞에 앉았던 아들은 맛만 본 다음 한 번도 먹지 않았다. 입맛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청춘이 먹어야 할 영양제는 아니다.

경옥고를 만들때는 사흘 밤낮 불을 지펴야 한다, 원래 기록에는 나흘동안 중탕하라고 되어 있지만 일정을 단축했다
▲ 밤새 불 피우기 경옥고를 만들때는 사흘 밤낮 불을 지펴야 한다, 원래 기록에는 나흘동안 중탕하라고 되어 있지만 일정을 단축했다
ⓒ 정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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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옥고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이후에는 어떤 약재든 손쉬웠다. 몇 시간 동안 대추차를 끓이거나 겨울 초입에 쌍화탕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빠, 이러다가 건강원 차리는 거 아녀."

아들의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일까 생각을 했지만 그 만한 정성을 쏟기에는 체력 한계가 분명해 바로 포기했다.

따뜻한 인생의 화덕

몸이 따뜻해야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고 목욕가운 안에 팬티만 입고 화덕 앞에 앉은 적이 있다. 속옷만 입은 바바리맨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겨울밤 따뜻한 불 앞에서 가운을 열고 불을 맞고 있으니 뜨거운 기운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화덕을 자주 이용하다 보면 길가에 떨어진 나무토막도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 시골에서도 나무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 가지치기한 나무를 구하는 것 말고 따로 나무를 얻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남의 산에 올라가 무턱대고 벌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 나무토막 한두 개를 가져오는 건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한동안 승용차 트렁크에는 나무 조각들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화덕을 완공한 것은 지난해 6월 10일. 화덕 만든 날을 표시하기 위해 시멘트 미장 위에 날짜를 못으로 새겨놓은 덕분에 기억한다. 어느새 1년이 지났다. 여러 음식 냄새를 풍기고 약재를 달이는 동안 화덕에는 그을음이 더욱 짙어졌다. 재가 나오면 밭에 뿌려주었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나무를 보면서 쉘 실버스타인의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떠오르기도 했다.

지난 1년간 화덕을 사용하면서 나무와 불의 관계를 자주 돌아보았다. 수시로 따뜻함에 대해 생각했다. 화려한 인생을 꿈꾸다가 쓰러져 간 희미한 불꽃을 떠올렸다. 활활 타다가 수그러드는 불의 생명을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들춰보았다.

화덕 앞에 앉으면 따뜻한 밤풍경 사이로 많은 사연들이 스친다. 타는 장작을 보면서 소멸을 생각한다. 화덕은 흔적을 남기려는 욕망도 결국 한줌의 재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뿐이다.

새털처럼 가벼운 한 인간이 무엇을 구워 먹을까 생각하는 건, 늘 그렇듯 소주 한잔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6월에는 파를 까맣게 굽는 이탈리아 요리의 레시피를 자주 찾아볼 것 같다. 그러면서 최불암의 농담 같은 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파..."

덧붙이는 글 | 지역잡지 토마토에 송고한 내용을 수정보완했습니다



태그:#화덕구이, #화덕, #장작, #장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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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글쓰고 영상기획하고, 주로 대전 충남에서 지내고, 어쩌다 가끔 거시기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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