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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자신의 자택 인근에서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의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발표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자신의 자택 인근에서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의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발표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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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으로 온 나라가 충격에 싸여있다. 하지만 정작 전 대법원장 양승태씨는 재판 뒷거래 '말씀자료'가 '덕담'이라는 둥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더욱이 '말씀자료' 문건을 만든 당시 임종헌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양 전 대법원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난 다음 날인 2015년 8월 7일 행정처 차장으로 승진했다.

양씨는 자신이 이번 '사법농단'에 대해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특별조사단의 조사를 거부했고 오히려 기자들에게 "내가 (조사받으러) 가야 하나?"라며 되물었다. 자신이 정말 결백하다면 진실을 규명하는 사법부의 조사에 적극 협조하고 참여하여 자신의 결백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신성한 사법부'니 '사법부의 신뢰'를 목청껏 높이는 양씨가 정작 '신성한' 사법부의 조사는 거부하고 회피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평생을 법조인으로 살았다는 양씨가 최소한 논리적으로라도 앞뒤가 맞는 답변을 국민 앞에 보여주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한 조직의 수장은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합리적, 논리적, 상식적으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일반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박재순 박사는 전두환 정권 당시 '한울회 사건'으로 2년 반 넘게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이 한울회 사건의 1심 판사는 이인제씨였고 대법원 판사는 이회창씨였다. 지난 김대중 정부에서 박재순 박사는 한울회 사건 때문에 옥고를 치른 것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 2015년 박근혜 정권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박재순 박사는 한울회 사건으로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다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유죄판결에 대해 박재순 박사는 "양승태가 지배하는 사법부는 박근혜 정권과 함께 군사독재시절의 국가주의적 폭력과 만행을 정당화하고 옹호함으로써 역사의 시곗바늘을 군사독재의 국가폭력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고 평가한다. 한울회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고 '양승태 대법원'에서 또다시 유죄판결을 받은 박재순 박사와 지난 5월 30일부터 6월 4일까지 이메일과 전화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박재순 박사
 박재순 박사
ⓒ 박재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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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전심 묵시적으로 결의하여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

- 위키백과에서는 '한울회사건'을 "1979년 7월 충남 대덕군에서 기독교 청소년 33명이 모여 수양회를 열고 같은 해 12월 30일부터 3일간 서울에서 열린 2차 수양회에서 이규호가 '자본주의 사회는 구조적 모순으로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사회를 개혁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된 <현대의 공동체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에 대해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한 전두환 정부의 공안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한울회사건'에 대한 정의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나?
"검찰 공소장에 나온 문구인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기독교 예배 모임이었던 한울회는 전두환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비리와 모순을 비판하면서 신앙 생활공동체를 모색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군부정권에 비판적인 세력들을 잡아들일 때 아람회, 오송회 등과 비슷한 시기에 한울모임 사람들도 잡혀들어갔다. 한울모임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전두환 독재정권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주장은 한 적도, 들은 적도 없으며 결의한 적은 더욱 없다. 그래서 검사의 공소장에서도 '이심전심 묵시적으로 결의하여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고 기소하였다.

1차 대법원 판결(1982년 6월)에서 5인 법관 전원합의로 무죄 취지의 원심파기 환송 결정을 했다. 이때 대법원 판결문도 검찰심문조서, 경찰 조서, 진술서, 증인 진술 모두 살펴보아도 공산사회 건설을 위해 반국가단체를 결의한 사실이 없고 피고인들이 한결같이 부인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 판결문은 반국가단체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면서 반국가행위를 구체적으로 수행, 계획, 준비하지도 않았으며 실체적으로 국가사회에 대한 위협이 될 만한 단체를 구성하지도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파기환송심을 맡은 고등법원에서 새로운 증거나 증인 없이 또다시 유죄판결을 내리고 2차 대법원에서 다시 전원일치로 유죄판결(1983년 2월)을 내렸다. 지난 1997년 한울회·아람회·오송회사건 피해자들이 공동으로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를 출간하고 출판기념회를 했을 때 이석태 변호사가 서평을 통해 '1차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 개념규정까지 하면서 전원일치로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한 사건을 고등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내리고 2차 대법원에서 다시 전원일치로 유죄판결을 내린 것은 사법부 역사상 큰 오점과 흠결을 남긴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출판기념회, 박재순 박사 앞줄 우측에서 4번째
 출판기념회, 박재순 박사 앞줄 우측에서 4번째
ⓒ 박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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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 이상 가족도 변호사도 만나지 못했다"

- 지금은 회상조차 하고 싶지 않겠지만, 후진들을 위해서, 한울회사건을 겪으면서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들은 언제였는지?
"한울회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가 운영하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번역실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학문에만 전념하기로 작정했던 나는 나름대로 조심하며 살았기 때문에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잡혀갈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1981년 3월 말경에 서대전경찰서로부터 수사에 협조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서울에 사는 한울모임 사람들과 함께 대전으로 내려갔다.

서대전경찰서는 우리를 2층 강당에 온종일 대기시켜 놓고 밤늦게 한 사람씩 불렀다. 건장한 두 사람이 나를 불러서 따라갔더니,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검은 승용차를 경찰서 앞에 대기시켜 놓았다. 차 뒷좌석 가운데 앉히더니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한동안 차로 이동했다. 알 수 없는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가서 어떤 방에 가두어놓고는 고문과 수사를 시작했다. '북한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북한에서 무슨 지원을 받았느냐'고 다그쳐서 내가 그런 일 없다고 부정하자 욕하고 때리며 온갖 모욕을 주었다.

그리고 무릎 사이에 작은 병을 끼워놓고 오랫동안 꿇어앉아 있게 했다. 후에 알고 보니 내가 처음에 갇혀 있던 곳은 대전의 한 여관방이었다. 밥은 주다 말다 했고 8일 동안을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세수도 못 하고 머리도 감지 못하게 했다.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은 눈은 시뻘겋고 머리와 수염은 더부룩하여 참혹하게 보였다. 보름쯤 여관에 갇혀 있다가 도경 대공 분실 지하 감방으로 끌려가서 한 달쯤 조사를 받으며 시달렸다. 1심 재판을 받을 때까지 6개월 이상 가족도 변호사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한울회 사건과 관련해서 한 일이 있다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수양회 설교와 성경공부시간에 광주시민을 학살한 군인들과 전두환을 비판한 것밖에 없다.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오래 가두어 놓고 '이심전심으로 묵시적으로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기소한 검찰은 1심에서 나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하였다. 그래서 외국 유학의 큰 꿈을 꾸었던 나는 한 일도 없이 감옥에 갇혀서 학자로서의 길이 막히게 된 것이 가장 불안하고 괴로웠다. 몸이 약했던 나는 10월쯤 되니 감옥에 습기가 차고 냉기가 돌며 계속 기침을 하게 되어 오래 살 것 같지 않았다. 그 후 서울과 대전을 오르내리며 고등법원, 대법원, 다시 고등법원, 대법원을 거치며 지겹도록 오래 재판을 받아야 했다. 당시 악독한 검찰과 비겁하고 무기력한 판사들을 보면서 깊은 절망을 느꼈다.

터무니없이 날조된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2년 반 이상 옥고를 치렀지만, 진실을 바로 잡을 길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힘들고 괴로웠다. 경찰, 검사, 판사는 허위사실을 날조·조작하여 법과 권력으로 짓밟을 뿐 진실을 밝히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들도 사람인데 사람들에게서 진실과 양심, 이성과 정의를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 불의하고 비합리적이고 오직 폭력뿐인 공권력을 오랜 세월 지켜본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고문이었다.

김대중 정부 때 한울회 사건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 표창을 받았는데 2010년 이명박 정권 때 재심을 청구했더니 5년 이상 끌다가 박근혜 정권 때 일부 재심 허락을 받았다. 그 후 2015년 5월~2017년 1월 사이에 2년 가까이 재판을 했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배하는 법정에서 사법농락만 당하다가 결국 다시 반국가단체 유죄판결을 받았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고 기가 막혔다. 더욱이 촛불혁명이 한창 일어날 때 이런 판결을 받은 것이 더욱 아프고 괴롭게 여겨진다. 나는 사법부의 적폐를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내가 참으로 괴롭고 가슴 아프게 생각한 것은 한울모임과 관계했던 어린 학생들의 고통과 시련이었다. 내가 반년 이상 가족면회를 하지 못하고 한 달 이상 불법구금 상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른 것은 오히려 큰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당시 2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경찰, 검찰로부터 그리고 학부모와 학교로부터 협박과 고통을 당한 것이 내게는 괴롭고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심리적, 사회적으로 겪은 압박과 고통은 이들의 삶에 평생 무거운 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신앙과 진리, 인생과 역사를 가르치며 순수하고 진실하게 만났던 어린 학생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게 했다는 자책감이 오랫동안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1982년 일간지에 실린 한울회사건 관련 기사
 1982년 일간지에 실린 한울회사건 관련 기사
ⓒ 박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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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랜 세월 연락도 되지 않고 갇혀 있을 때 가족들, 특히 늙으신 어머니의 심적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가장 맘 졸이며 걱정했던 사람은 어머니였다. 한겨울이 되면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었던 어머니는 감옥에 있는 나를 생각하시며 추운 밤중에 부엌에 홀로 서 있어 보기도 하시고 온기 하나 없는 담벼락 아래 서 있어 보기도 하셨다. 어디에 서 있어 보아도 어머니는 추운 겨울밤을 견디어 낼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를 걱정하고 염려하던 어머니는 결국 입에서 피를 토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추운 감옥에서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나를 걱정하는 어머니가 아주 걱정스러웠고 안타까웠다."

"광주시민 학살한 군인들과 전두환을 비판한 것이 유죄"

- 지난 김대중 정부에서 선생님은 이 한울회 사건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이 사건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지 못했다. 대통령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표창한 사건을 어떻게 법원에서는 무죄판결을 받지 못하는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고 보나?
"만일 노무현 정부 이후에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유공자로 표창을 받았기 때문에 사법부에서 다시 유죄판결을 내릴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진실화해위원회에 한울회사건의 조사를 신청하는데 게을렀다. 같은 시기에 재판을 받았던 아람회, 오송회가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고 배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한울회도 재심 청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 시절인 지난 2010년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지난 201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믿기지 않았다.

더욱이 고등법원의 기각 사유가 황당하고 기이했다. 내가 재심을 청구한 가장 큰 이유는 한울회가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사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내가 한울회모임에서 한 발언으로 나는 김대중 정부에서 민주화운동유공자로 표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등법원 판사들은 반국가단체구성은 유죄이고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내가 한울회모임 때 발언한 것도 민주화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저희끼리 해 본 소리'라면서 유죄라고 판결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광주시민을 학살한 군인들과 전두환을 내가 비판한 것이 유죄라는 것은 사리나 법리에 전혀 맞지 않는 소리다. 이미 전두환·노태우는 국가변란을 일으킨 반역죄로 처벌을 받았고 이들이 저지른 광주시민 학살은 범죄이고 이들이 선포한 계엄령은 불법 무효라는 판결이 사법부에서 내려졌다. 그런데 광주시민을 학살한 군부정권과 군대를 비판한 것이 유죄라고 서울고등법원이 내린 재심 기각판결은 어이없고 터무니없는 사법적 만행이라고 생각된다. 담당 변호인들도 재심 기각 판결문을 받아보고 말이 되지 않는 판결이라고 상고하겠다고 하였다.

서울고등법원에서 이렇게 황당한 판결을 한 것은 내가 우리를 기소했던 정용식 검사를 통렬하게 비판했고 대법원을 두 차례 오가며 결국 유죄판결을 내린 사법부의 책임과 잘못을 강력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검찰과 사법부의 치명적인 잘못과 불의를 강력하게 고발하고 규탄했기 때문에 사법부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서 이런 무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짐작한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에 한울회 사건의 조사를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과 검찰의 불법과 한울회 사건의 진상을 드러내는 새로운 자료와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법원에서 새로 다룰 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것도 재심을 기각하게 하는 빌미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대법원에 상고한 결과 지난 2015년 초에 대법원은 반국가단체 부분은 유죄이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내가 발언한 것은 유죄라고 할 수 없으니 재심을 허락한다고 판결하였다. 유죄판결을 받았던 6인 가운데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발언을 했던 이규호 선생과 나만 재심이 허락되고 다른 4인은 재심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여간 2015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등법원 판사들은 대법원이 제시한 지침대로 반국가단체 부분은 유죄로 하고 광주민주화운동 발언만 심리하자고 주장하였다.

나와, 다른 피고인들과 변호인들은 강력하게 사건 전체를 재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그래서 나와 이규호 선생은 강력하게 무죄를 주장하며 34년 전에 우리를 재판한 검사와 판사들이 직권을 남용하여 불의와 불법을 저질렀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한울회 사건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아 사법부의 정의를 세울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법정에서 판사들은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검사들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2015년 5월에 재판이 시작되어 2017년 1월에 재판이 끝날 때까지 판사들이 세 차례 바뀌었다. 첫 번째 판사는 맡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이동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 부장판사는 변호사들을 압박하면서 형량을 감경해주겠다며 재판을 속히 끝내자고 하였다. 피고들의 말을 들어주는 듯이 하다가는 피고들의 주장일 뿐이라며 재판을 끝내려고 했다. 나는 몹시 화가 나서 크게 싸워보려고 하다가 변호인과 의논하여 판사들의 재판을 거부하기로 했다. 이규호와 함께 재판에 항의하는 글을 써 보내고 그 무렵 몸을 다쳤던 나는 법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두 번째 재판부도 인사이동을 하게 되어 재판부가 바뀌게 되었다. 새로 배당된 재판부는 부담을 느꼈는지 우리 재판을 다른 재판부로 넘겨버렸다. 네 번째 맡은 재판부는 우리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우리가 신청한 증인 4인의 증언을 듣기로 하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예아무개, 임아무개는 50 중년이 되어 증인으로서 35년 만에 법정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35년 전을 회상하며 눈물을 철철 흘렸고 당시 경찰, 검사, 학교의 압박과 회유로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겪었다고 호소하였고 그때 그들의 선생이었던 나와 이규호에 대해서 당시 제대로 증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사죄한다고 하였다. 당시 대학생이었고 현재 공주사범대학교 교수인 장수명도 눈물을 흘리며 한울모임이 얼마나 순수하고 진지했는지를 증언하였다. 당시 방위병으로서 군사재판을 받았던 김종생은 증언 당시 큰 교회 목회자였다. 김 목사도 눈물을 흘리며 한울모임이 순수하고 진지했던 신앙 생활공동체였음을 증언하고 당시 군 검찰의 고문과 압박, 모욕과 학대가 극심하여 화장실에서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고 하여 충격을 받았다. 이 자리에 다 쓰지 못하지만 네 사람의 증언은 진실하고 감동적이었다.

증인들이 그처럼 절절하고 감동적으로 진실을 말하고 피고인과 변호인이 아무리 간절하고 절실하게 양심과 법에 따라 재판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대법원의 지침대로 반국가단체 부분은 유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발언은 무죄로 보고 징역 2년 6개월을 집행유예로 판결하였다. 집행유예로 형량을 감경하면서 국가배상신청서를 주면서 배상신청을 하라고 하여 배상신청을 했으나 결국 그마저 배상 불가 판정을 받았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과 고등법원이 철저하게 한통속으로 움직였다"

- 한울회 사건으로 6명이 재판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2015년 재심 신청 결과 4인은 기각되고 선생님과 이규호 선생 두 분만 재심이 허락되어 재심 절차를 밟았다. 당시 고등법원과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을 받으면서 느낀 점은?
"한울회 사건의 재심과 관련하여 내가 느낀 것은 적어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는 대법원과 고등법원이 철저하게 한통속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검사동일체라는 말이 있듯이 법관동일체 원칙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한울회 재심 사건에 대해 대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은 헌법정신과 민주정신을 파괴하는 사법적 폭력이고 농단이라고 느꼈다. 양승태가 지배하는 사법부는 박근혜 정권과 함께 군사독재 시절의 국가주의적 폭력과 만행을 정당화하고 옹호함으로써 역사의 시곗바늘을 군사독재의 국가폭력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전두환 군사독재 시대의 사법부와 박근혜 정권과 코드를 맞춘 양승태 대법원의 차이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였다. 물론 차이가 없지는 않았다. 아니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35년 전 대전에서 1심판결을 받을 때는 법정에서 검사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고 판사들은 고양이 앞의 쥐보다도 더 무기력하고 위축되어 있었다. 판사들은 고개도 들지 못했고 검사가 완전히 법정을 지배했다.

그러나 2015~2016년 한울회 재심을 다루는 서울고등법원의 법정에서는 판사들의 권세와 위력이 검사와 변호인에 대하여 강력하고 위압적임을 느꼈다. 피고들이 과거의 검사를 심하게 규탄하고 책망하자 검사들은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떤 검사는 재판이 끝날 때마다 우리를 따라오면서 우리에게 사과하고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기도 했다. 불의하고 위선적인 사법부에 국민의 통제에서 벗어난 권력을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느꼈다." 

- 지난 2013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로 긴급조치를 포함한 수많은 과거 국가폭력사건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소송은 소멸시효 등 문제로 패소했다. 게다가 배상금을 삭감하는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국가가 희생자 유족을 상대로 '부당이득금'을 반환하라는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피해자와 유족들은 지금도 이중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 지금도 국가폭력 피해자보다는 가해자 입장에 서 있는 (대)법원과 '국가'에게 하고 싶은 말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 소송의 시효를 갑자기 엄격히 제한하고 시효가 소멸되었다는 핑계를 내세워 국가소송을 기각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국민의 권리를 부정하고 국민을 보호하고 보살필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국민을 국가의 노예나 자원으로 생각하는 군국주의, 국가주의의 낡은 국가관을 가지고 사법부가 재판해 온 것으로 판단된다.

국가는 국가가 저지른 불법과 범죄를 바로 잡을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다. 사법부가 법을 악용하고 조작하여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면제해 준 것은 사법부가 헌법정신과 민주정신을 짓밟는 국기문란을 일으킨 것이고 국민주권을 기본으로 하는 헌정질서를 파괴한 것이다. 사법부와 국가는 그동안 양승태가 지배한 사법부가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에게 저지른 사법적 농단과 만행을 바로 잡을 책임과 의무가 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국가로부터 불법적인 폭력을 당한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하는 것은 헌법정신과 민주정신을 지켜야 할 국가와 사법부의 마땅한 도리이고 책임이다.

국가가 불법 부당하게 국민에게 폭력을 저질렀다면 당연히 국가는 국민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배상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국가폭력 희생자들이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을 받도록 국가는 적극적으로 알리고 안내하고 권유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더 나아가 국가는 과거 자신의 잘못과 불법을 국가 스스로 바로잡아 가야 한다. 따라서 국가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위해서 배상신청의 시효를 없애고 피해자들이 배상신청을 하도록 협력할 뿐 아니라 국가가 피해자들을 대리해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을 받도록 법적, 행정적 절차를 밟아가야 한다."

 박재순 박사
 박재순 박사
ⓒ 박재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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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만은 홀로 군사독재를 체화한 낡은 시대의 유물로 남은 것인가!"

- 지난 2015년 '한울회 사건'과 관련하여 '34년 만에 법관들께 다시 보내는 탄원서'에서 "저는 지난 34년 동안 한울회 사건의 재판이 불의할 뿐 아니라 부적절하고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라고 했는데, 그 사유를 좀 더 풀어 밝히면?
"한울모임은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소박한 신앙인들이고 지식인들이었다. 내가 20대 후반에 어떤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신앙과 진리를 생각하며 따뜻한 정을 가지고 만났던 이들이다. 게다가 20여 명의 중고등학생들과 신앙과 진리를 말하면서 만남을 이어간 것은 참으로 순수하고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그 무렵 독재자 박정희가 갑자기 죽고 정치군인 몇이 국가변란을 일으켜서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광주의 사건에 대해서 전해 들은 소식도 있고 미국의 <뉴스위크> 잡지를 통해 자세한 내막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한울모임 수련회 때 성경공부를 하면서 시민을 학살한 군인들을 비판하는 말을 했던 것이다.

이런 한울회 사람들에게 국가보안법과 계엄법을 적용해서 반국가단체구성죄와 계엄법 위반죄로 기소하고 어린 고등학생들을 경찰, 검사, 학교에서 위협하고 괴롭힌 것은 지금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이심전심으로 묵시적으로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기로 결의했다'는 코미디 같은 검사의 공소장이 1심, 2심, 그리고 대법원판결을 두 차례나 거치고도 법적으로 유죄판결을 내리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런 공소장의 내용이 35년 후에도 다시 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의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사법부는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일까? 3·1혁명,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시민항쟁, 촛불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이 나라 사법부만은 홀로 박물관 골동품처럼 일제식민통치의 군국주의, 해방 후 군사독재를 체화한 낡은 시대의 유물로 남은 것인가! 나의 양심과 이성으로는 한국 사법부의 이런 행태를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한울모임은 정의감을 가진 이들이 있었지만 순수하고 소박한 신앙모임이었다. 1981년도에 불의하고 악독한 군부정권에 의해 옥고를 치렀지만, 이 사건의 진실이 이렇게 오래 묻혀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더욱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죄목으로 재판을 받은 다른 사건들 아람회, 오송회는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고 배상까지 받았는데 한울회만은 재심이 기각되었다가 부분적으로만 재심의 허락이 났고 다시 유죄판결을 받고 보니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이렇게 된 것은 오로지 노무현 정부 다음에 반민주적인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섰고 그 정권에 빌붙은 양승태 대법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35년 전에도 대법원을 두 차례나 오가면서 한심하고 어이없는 재판과정을 겪었는데 이번에 다시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사법 농단과 장난을 당하고 보니 더욱 한심하고 기가 막힌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를 위해서 그렇게 오랜 세월 시련과 고통을 겪으며 애를 써 왔는데 내가 관련된 한울회 사건은 1981년 전두환 정권 초기 사법적 폭력과 불의의 상황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판결을 받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한스럽다."   

* 박재순 박사는 1950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철학과를 마친 후 한신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함석헌 선생을 만나서 성경과 동양고전을 배우며 씨알사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으로 일했다.(1980~1985) 한신대와 성공회대에서 연구교수와 겸임교수로 1992년에서 2006년까지 가르쳤다. 씨알사상연구회 초대회장(2002~2007), 씨알재단 상임이사(2007~2014), 씨알사상연구소장(2007~)으로 평생 민주생활철학인 씨알사상을 연구하고 알리는 일에 힘써왔다. 안창호와 이승훈, 유영모와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을 연구하면서 한국근현대의 민주정신과 사상으로서 씨알사상을 정립하고 알리려 한다. 중요한 저서로는 <씨알사상>, <다석 유영모>,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생명의 길 사람의 길>,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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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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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