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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두 사람이 있다. 둘의 삶은 치열했으며 죽음의 무게 또한 가볍지 않았다. 한 사람은 1917년 용정에서 윤영석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해방을 몇 달 앞둔 어느날 27살의 나이로, 후쿠오카 축축한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다른 한 사람은 1935년 인천에서 정형진의 7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1년 16살의 나이에, 강원도 횡성 이름모를 들판에서 적의 총을 맞고 죽었다. 윤동주와 나의 형 정해용이 바로 그들이다.

2017년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다양한 행사와 출판물들, 강의와 답사가 넘쳐났다. 한 달에 한 번씩 원주에서 서울 공릉동으로 오가는 길은 가벼운 흥분으로 늘 즐거웠다. 짧은 생애, 그가 다니던 길들과 좋아했다는 책들, 어린아이 같은 감성, 전편에 흐르는 내면의 성찰. 그에 관한 강연은 언제나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러던 어느날 언뜻 죽은 형이 생각났다. 형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모습으로 죽었는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창피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무명전몰학도병인 형은,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고 그를 기억하는 동기, 동창도 몇 분 남아있지 않다. 정해용은 영원히 잊혀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커졌다.

윤동주가 몇십 편의 아름다운 시를 남긴 반면 정해용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16살에 무엇을 남기겠는가. 고작 공공기관의 증명서 몇 개가 전부다. 1949년도의 인천 숭의국민학교 학적부 1부, 1951년 3월의 전사통지서 1부, 화매장보고서 1부, 아버지 제적등본에 있는 출생과 사망을 알려주는 몇 줄의 흔적. 인천중학교 학적부는 전쟁통에 없어졌다고 한다.

어디 정해용 뿐이겠는가! 6.25 동란중에 전사한 한국군만 13만 3천 명이며 그들 대부분이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기억할 수도 없고 기억하지도 않는 짧은 삶을 마감한 것이다. 살아남은 수십 수백만의 참전 용사들의 삶도 전사자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를 추억하고 윤동주의 서시를 낭독할 것이다. 기억할 것이 없는 나는 가끔, 아주 가끔 정해용을 상상할 것이다. 인천 신흥동에서 동생들과 같이 놀던 아이의 모습에서부터, 한겨울에 인천서 부산까지 교복을 입고 걸어가면서 다졌을 중학생의 참전 결의와 신병으로 총을 들고 적과 대면해서 느꼈을 공포까지.

우리는 그떄의 장남들에게 빚지고 있다

정해용의 전사통지서. 전사일 51년 3월 11일이고 전사장소는 횡성 안흥지구이다. 전사한지 9일만인 1951년 3월 20일 날자로 발송되었다.
▲ 전사통지서 정해용의 전사통지서. 전사일 51년 3월 11일이고 전사장소는 횡성 안흥지구이다. 전사한지 9일만인 1951년 3월 20일 날자로 발송되었다.
ⓒ 정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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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상상하다 보면 그를 기록으로 남긴 서류들이 말을 건네는 듯도 하다.

"동생아! 나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어릴 때 공부도 열심히 했고, 전쟁나서 겁쟁이로 살지도 않았어. 총알 정도는 피할 줄 알았는데 운이 없었어. 이렇게 이름을 불러줘서 고마워."

피할 수도 있었을 학도병의 운명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인 바보 정해용. 그렇게 윤동주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고 정해용은 영원히 잊힐 것이다.

굳이 기억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겠다. 전사는 임무를 마치면 사라지는 법이다. 앞서간 사람들의 욕망과 피땀을 바탕으로 역사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시대가 안겨준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뒤에는 차남들의 삶이 있다.

윤동주와 정해용은 장남의 역할을 밑의 동생들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죽음을 마주하면서 부모님의 얼굴과 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을 것이다. 특히 자기를 대신할 바로 밑의 동생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차남 입장에서는 혈육의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안타까움은 잠시였을 것이다. 그리움과 고단함이 오가는 삶을 살아야했을 테니까.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평생을 형의 시를 알리는 사업을 했고, 정해용의 동생은 9남매의 맏이가 되어 희생하는 삶을 살았고 형의 제사를 지내며 영면을 기원했다. 원치 않는 삷이었겠지만 피할 수도 없는 인생이었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건축가로 유명하지만 시인으로도 꽤 알려져있다. 그는 전쟁 와중에 형을 그리워하는 시를 발표했다.
민들레 피리
- 윤일주 (1952)

(전략)
눈 감고 불어보는 민들레 피리
언니 얼굴 환하게 떠오릅니다.

날아간 꽃씨는
봄이면 넓은 들에
다시 피겠지.
언니여, 그때엔
우리도 만나겠지요.

장남은 미안했고, 장남 대신에 살아남은 차남은 그리움에 사무쳤다. 우리는 그 모든 장남과 차남에게 빚지고 있다.


태그:#6.25, #현충일, #인천학도병,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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