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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속에서 행복사회를 실험하다

음악교사인 나는 수업을 통해 행복을 연구한다. 다른 교과와는 달리 다양한 실험이 가능한 교육과정이기에 가능할 수도 있다.

음악적 능력은 타고나는 경우가 많기에 의외로 실력 양극화가 심하다. 그 만큼 호불호도 분명하다. 국,영,수 같은 학과수업과는 달리 모두 다 즐거워할 줄만 알았던 음악수업에서 종종 수업 포기자가 발생하는 것을 보며 다양한 아이들이 만족하는 수업을 위해 수많은 실험을 하게 되었다. 결국 교육의 내용, 방법, 평가기준과 도구에 있어 더 많은 학생들의 선택이 보장될수록 의욕과 만족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 그대로 할 맛 나는 수업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삶에 적용된다면 살 맛 나는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

사회생활에서도 개인의 선택 범위가 넓을수록 삶의 만족도는 올라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직업에 따른 소득 격차를 해소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의 행복도는 급상승하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남녀간, 세대간, 계층 간의 다양한 갈등구조를 비롯하여 그로 인한 혐오문화 마저도 크게 해소될 것이라고 믿는다.

쉬운 일·어려운 일, 귀한 일·천한 일을 구분할 수 있는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때부터 공장 생산 라인에 앉아 학업과 알바를 병행했다. 처음 하게 된 일은 카오디오 시스템 중 일부를 조립하는 일이었는데, 같이 일 했던 친구는 꼼꼼하고 찬찬해서 나보다 2배, 3배 성과를 보였다. 똑같은 시급을 받으며 친구의 반도 못해내는 나로서는 늘 주임에게 눈치 보여 주눅 들어 있었다. 중간에 빵을 먹는 간식시간에도 쉬지 않고 해대곤 했지만 타고난 손재주가 다른지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었다.

좀 서두르다 보면 불량률이 높아져 "야, 너는 차라리 천천히 해"라는 더블 구박을 받아야했다. 그러나 구박 보다 더 힘든 것은 그 단순 반복을 하루 10시간 이상 계속 해내는 일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몇 몇 사람들은 욕지기를 내며 겨우겨우 해냈고 어떤 사람은 콧노래를 부르며 잔업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일 외에도 대학시절까지 봉투를 붙이는 단순작업부터 도서관 사서 도우미, 식당 주방보조, 객원 연주자, 음식점이나 술집 써빙, 호텔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주유소 내 판매원, 악기 교습, 과외, 학원 보조 강사, 기간제 교사 등 수많은 노동을 해야만 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노력해도 부족한 성과만 내는 일도 있고 조금 열심히 하면 남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내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성과는 있지만 도저히 내 적성에 맞지 않아 오래도록 지속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어떤 일은 체력이 부진해 고용되자마자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그 중 가장 뿌듯한 피드백을 얻었던 것이 가르치는 일이었기에 교사가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직업임을 확신하고 엉덩이에 못이 박히게 시험 준비에 돌입함으로써 공립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육체노동, 관계 노동, 지적 노동, 그 어떤 노동도 결코 만만한 직업은 없었다.

과연 절대적인 안정직이 존재하는가

내 적성에 맞아 선택한 교사라는 직업도 인생의 단계단계에 놓여진 상황에 따라 무척이나 고단할 때가 있었다. 아이들 기를 때는 파트 타임이라도 좋으니 잠 좀 제대로 잘 수 있는 직업으로 잠시 갈아타고도 싶었다. 어려서부터 나름 다양한 고생을 경험했지만 부족한 잠으로 꾸역꾸역 살아내야만 했던 워킹맘으로서의 그 시간들이 가장 힘든 기억으로 남는걸 보면 '세상 그 어떤 고문보다 잠 고문이 젤 독하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이런 얘기하면 흔히들 '그나마 여건이 좋으니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그래도 육아를 병행하기엔 제일 좋은 직업이니 불평하지 말라고 말한다. 대체로 일일이 반박하진 못했지만 그런 말을 듣기에는 상당히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남 몰래 흐르는 워킹맘의 눈물

잔병치레가 잦았던 큰 아이 영아기, '애가 왜 이렇게 자주 아프냐고 짜증내며 던지듯 아이를 건낸 베이비시터 집에서 돌아나오며 안스러운 아이를 부둥켜 안고 흘렸던 막막한 눈물, 고열로 밤새 보채는 아이를 안고 어르느라 사흘 밤을 못자고 출근했다가 차가운 복도에 쿵하고 쓰러졌던 일, 퉁퉁 불어터진 젖가슴 통증에 이를 악물며 수학여행 인솔하다 겹겹이 댄 거즈수건을 다 적시고도 새어 나온 젖에 겉옷까지 온통 젖어 휴게실 화장실에서 짜내고 뒤처리 하느라 혼줄 났던 일, 그 와중에도 엄마젖만 찾으며 젖병을 거부하곤 하던 아이 생각에 가슴 미어지던 일, 만삭의 무거운 몸에 세 살난 큰 아이를 업고 언덕길을 올라 우는 아이를 어린이 집에 떼어놓은 채 도망치듯 출근해야했던 날들, 열이 40도 까지 오른 어린아이를 두고 급한 일 처리 때문에 잠시라도 출근을 했어야만 했던 일, 수도 없이 남몰래 흘려야했던 눈물들...그 모든 걸 일일이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의 핀잔은 그저 야속하기만 하다.

"한다고 해봐야 아기 엄마는 민폐야"

가장 듣기 싫은 말이 '그나마 요새는 출산휴가에 휴직 제도라도 있지? 우리 때는 그런게 어딨었어? 배부른 줄 알아야해'하는 선배들의 핀잔이다. 물론 다른 직장에 비해 여건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극기의 순간들을 견뎌왔기에 육아와 직업을 병행하는게 가능했다. 둘째 아이 영아 때는 학교가 집에서 가까워 육아시간(1년간 1일 1시간)이라는 제도를 이용해 점심시간 모유수유를 했었다.

그때 점심시간 마다 자리를 비웠던 내가 못마땅했는지 당시 교장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 가는 나를 배웅하며 하신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자기는 아기도 어린데, 부장업무까지 하느라 고생 많았어. 그나저나 그 전 교장은 하필 젖 먹이 엄마에게 부장 자리를 줬대? 관리자들은 보통 아기 엄마들 싫어하는데 말야. 열심히 한다고들 해봐야 아무래도 배려해야할게 많으니 민폐야 민폐..." 평소 솔직하고 쿨한 성격이라 나름 사심 없이 한 송별사였다. 하지만 육아시간을 준다해서 업무의 양도 줄여주는 것은 아니기에 화장실 가는 시간 마저도 아껴 모유수유 한 일을 같은 여성에게도 지지 받지 못한 것은 가슴 속에 비수가 되어 오랫동안 사라지지가 않았다.

우리사회, 아직도 헝그리 정신만이 살 길 인가?

알게 모르게 많은 워킹맘들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징징거린다. 유세 떤다. 책임감이 부족하다. 애나 잘 키워라. 본인의 선택이다. 사실 과거보다는 오늘의 여성들이 더 존중받는 것도, 힘든 일에 더 민감한 것도, 일과 육아의 병행을 스스로 선택한 것도 대체로 사실이다. 그럼 그 모든 것을 예전의 기준에 맞춰 개인이 버텨나가야 할 몫으로 남겨놓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물론, '일이냐 결혼이냐', '무자녀냐 유자녀냐', '외동이냐 다자녀냐', '경력 단절이냐 경력 유지냐', '수입절벽이냐 수입유지냐' 이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하고 고행 길에 나선 것은 나 자신이다.

그래서 감당해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 과거를 기억하는 현재에서 다시 첫 출발 점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똑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통의 크기를 모르고 맞이하는 것보다 고통의 크기를 알고 다시 선택하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겐 고생에 잔뼈가 굵은 어린 시절의 헝그리 정신이 가장 큰 버팀목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은 그때만큼 헝그리 하지는 않기에 다시 선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크나큰 문제가 아닐까? '요즘 젊은 애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어' 하곤 하는 기성세대의 핀잔은 적절한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헝그리한 사회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냐고 되묻고 싶다. 과연 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다시 내 아이에게 그 길을 가라고 자신있게 권할 수 있을까? 부모는 극기와 고생이 습관화 되어 자녀에게도 권할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다행히도 과거 만큼은 헝그리 하지 않게 자란 우리 아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이 시대가 맞이한 인구절벽 현상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 아닐까?

누구나 언제든 다른 일을 선택할 수 있다면

교사생활 23년차인 요즘은 아이들도 제법 커서 육아의 어려움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인생은 단계단계 새로운 미션을 제시한다. 중년에 접어들고 나니 체력의 저하 때문인지 정서적 피로감에 취약한 상태를 종종 경험하곤 한다.

교사라는 직업은 동시에 많은 혈기왕성한 학생들을 상대하는 일인 만큼 무엇보다 관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편이다. 그래서 신경적으로 힘들어질 때는 이 일을 계속 해나가는데 큰 위기를 겪기도 한다. 게다가 학부모나 조직내 지지를 받기 어려운 상황까지 겹치면 버텨내기가 더더욱 힘이 든다. 그럴 땐 '잠시 관계 노동을 덜 해도 되는 다른 일로 갈아탔다가 그 일이 맞지 않을 경우 다시 이일, 또는 또 다른 일로 변화를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 나아가 실업수당, 재교육기회 등으로 누구나 언제든 안전하게 다른 분야의 일에 도전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묵묵히 앉아서 나사를 끼우거나 봉투를 붙였던 단순 노동이 그립다. 물론 내 적성에 맞지 않아 오래도록 지속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뻔히 안다. 그러나 과거의 나와 달리 관계에 의한 피로감에 민감해진 나로서는 만일 1년만 갈아탈 수 있다면 그토록 지겹고 성과도 낮았던 그 일에 다시 한 번 재도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모든 직업 종사자들이 10년에 한 번 쯤 유급휴직을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수입 절벽을 각오하지 않아도 된다면 말이다.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내 적성에 맞고 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사정이 생겨 지금 하는 일을 더는 못하게 된다 해도 먹고 사는 일에 큰 어려움이 발생하지 않는 다면 우리의 불안과 강박은 크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 한 명당 얼마의 육아지원금을 책정하고 어느 기간 동안 지급하느냐'라는 식의 일시적 출산 지원책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큰 효과를 거두기는 어렵다고 본다.

출산은 나 한 사람 뿐 아니라 내가 낳은 아이의 일생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도 언제든 필요에 의해 일을 중단하거나 갈아타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내 아이가 어떤 일을 하든 차별 받지 않고 적절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출산 장려책은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다양한 선택이 가능한 행복사회, 그 첫 관문은 최저 임금제

임금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은 현재의 수입이 평균 수준이거나 그 이상인 이에게도, 힘든 일을 해내고도 적은 수입으로 살아가는 이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무한 경쟁과 과열교육으로 피폐한 우리들의 2세를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세금을 몇 배로 많이 내게 된다 해도, 물가가 너무 비싸 지금보다 훨씬 더 절약해야만 한다 해도 기꺼이 감수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혼자서 감당해야했던 수많은 책임을 사회가 나누어 짊어지게 되니, 분명 많이 주어도 알맞게 남는 장사가 될 것이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나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도 잘 살 수 있는 사회, 그 일을 중단하고 다른 일을 찾아도 다시 잘 살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젖비린내 나는 눈물 젖은 빵으로 어려운 나날을 버텨온 한 워킹맘, 교사가 제시하는 행복사회의 1등 과제이다. 그 시작을 열어 줄 최저임금제의 원만한 합의를 온 마음으로 응원한다.


태그:#워킹맘, #최저임금제, #임금불균형, #출산장려, #행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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