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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인 1988년 6월 4일, 숭실대학교에 다니던 박래전 열사는 ‘광주 학살원흉의 처단’을 외치며 분신했고, 6월 6일 사망했습니다. 어느 덧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30주기를 맞아서 박래전 열사의 뜻과 시를 알리려고 합니다. 뒷전에 밀어두었던 유품들을 정리하고 작은 추모관도 만들려고 합니다. 이번 스토리 연재에는 박래군 소장(인권재단 사람)과 김응교 시인(문화평론가, 숙명여대 교수)이 같이 글을 쓰고 <오마이뉴스>가 함께 합니다. 좋은기사원고료를 3만원 이상 후원해주시는 분들께는 박래전 열사를 알리는 책 <1988 박래전>을 드립니다. 주소를 남겨주세요. 7회 동안 연재되는 박래전 열사의 이야기와 그의 시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의 이름을 추모관에 적어두겠습니다. [편집자말]
사랑하는 동생 래전에게.

너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답장을 받지 못할 편지를 너에게 쓰는 지금은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38년이 되는 날 아침이다. 이 아침에 참으로 오랜만에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아픈 다리로 농사일을 하시던 아버지 아픈 다리로 농사일을 하시던 아버지
▲ 아픈 다리로 농사일을 하시던 아버지 아픈 다리로 농사일을 하시던 아버지
ⓒ 박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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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유서에서 "썩어 들어가는 다리도 고치셔야죠." 하고 당부했던 아버님은 네가 떠난 지 3년 뒤에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너를 잃은 슬픔을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방식으로 잊으려 했던 아버님이시다. 수술이 잘못 돼서 목발을 짚으면서도 농사일을 놓지 않으셨던 아버님은 4년 전 겨울 크리스마스 날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서 아버님은 만나보았을까? 너는 어머님께 "제가 원했던 세상을 보기까지 절대 눈감지" 말고 강하게 사시라고 했지.

 막내 아들의 추모식에 참석한 어머니 
막내 아들의 추모식에 참석한 어머니
▲ 막내 아들의 추모식에 참석한 어머니 막내 아들의 추모식에 참석한 어머니
ⓒ 박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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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은 이제 여든 일곱이신데, 연세가 많으시니 예전만큼 일은 못하시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움직이신다. 가는귀를 먹고 눈이 침침해서 힘들어하시지만, 매일 밤이면 전화를 해서 집에 잘 들어갔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물으신다. 어머님은 네가 저 세상으로 떠난 뒤에 천주교 신자가 되셨고, 지금도 일요일이면 성당에 꼬박꼬박 다니시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달고 사신다.

시골 농사는 형님이 안산에 있으면서 오고가면서 짓고 있다. 형도 많이 늙었지. 허리 아파서 일 못하겠다고 하면서도 포도밭을 더 늘리는 걸 보면 아버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네가 그리도 좋아했던 조카 준열이와 진주는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고 있지. 나는 네 학교 후배와 결혼해서 딸 둘을 낳았다. 네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했을까? 그 딸들이 벌써 네 나이만큼이나 커 버렸다. 그만큼 세월은 많이 흘렀다. 30년, 예전 사람들은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말했지만, 그 정도의 변화 정도가 아니다. 하늘만 그대로 있고, 산도 논밭도 바다도 모두 변해 버렸다. 고향도 옛날의 고향이 아니고, 동네마다 공장들이 들어찬 마을이 되어 버렸다.

30년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유서, 네가 세상을 향해 마지막으로 남긴 글에서 유난히 "마지막 죽음"을 강조했다.

"이제 나는 이 세계를 버리려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는 안 되기에. 나의 죽음이 마지막 죽음이길 바란다. 나의 투쟁이 이 땅의 백만 학도에게 불을 당기는 투쟁이 되길 바란다."

"나의 죽음을, 선배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나의 죽음이 마지막 죽음이길 바란다."

"어머님, 아버님. 저는 두 분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아니면 더 많은 어머님, 아버님들의 가슴을 에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불을 지르거나 몸을 던지면서 죽어갔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저의, 사랑스러운 두 분의 아들의 목숨을 민주의 성단에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네 죽음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생존권을 위해, 통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그런 죽음들을 막아달라고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런 죽음의 행렬들이 끊이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30년은 더 이상 사람들이 죽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극단적인 방법으로 호소하며 죽음을 결단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세월이었던 듯도 싶다. 네가 떠난 뒤에 유가협에 들어가서 억울하게 죽어간 아들딸을 둔 부모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참으로 많은 죽음들을 봤다.

서른 살 전후의 나이에 나는 분신, 투신, 의문사 현장들을 찾아가야 했고, 그들의 장례식을 치르는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게는 '재야의 장의사'라는 별칭까지 생겼다. 그때 안타까운 마음에 그런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유가족들과 말했던 건 "죽을 용기가 있으면 살아서 싸우자"는 것이었다. 죽음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고, 그런 결단이 쉽게 잊히는 세상에서 오히려 살아남아서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다른 죽음들이 눈에 들어왔단다. 결단을 하고 투쟁을 촉발하려는 그런 죽음들에 가려졌던 죽음들이 있었다. 세상은 많이 험해져서 형식적으로 민주주의가 되었다고 하지만 더욱 힘든 세상에서 사람들은 소리 없이 조용히 죽어갔고 있었다. 매년 자살자만 1만5천 명이 넘고, 거기에는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까지 전 계층이 해당하고 있지.

용산참사에서는 공권력이 불로 국민을 죽이고, 백남기 농민도 물대포로 죽이고, 세월호에서는 수학여행 가던 고등학생을 비롯한 승객 304명을 죽게 하고…시험에 비관해서 죽게 하고, 현장실습 나갔던 고등학생이 죽어나가고, 비정규직이 기계에 말려서 죽고, 여성들은 밤길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고, 데이트폭력으로 죽고, 성소수자들은 세상의 혐오에 시달려 죽고, 노인들은 먹고 살 일이 막막해서 죽고. 이 세상 어느 곳 하나 성한 데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 참 우울해진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뭘 했던 거지, 이런 자괴감도 밀려온다.

박래전 열사 고향 생가.  고향 생가. 집은 그대로이지만 주변 환경은 너무 많이 바뀌었다
▲ 박래전 열사 고향 생가. 고향 생가. 집은 그대로이지만 주변 환경은 너무 많이 바뀌었다
ⓒ 박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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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전아. 나는 30년 동안 너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그런 강박, 떨쳐 버리고 싶었던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았지. 유가족이라고 꼭 힘든 현장, 죽음들을 지키며 살아야 하냐고. 그렇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어. 미치도록 힘든 상황에 부닥칠 때는, 너무 힘들 때는 도망치고 싶었어. 나도 사람인데, 나부터 살고 싶은 그런 생각이 왜 안 들었겠니? 울고불고 매달리는 그런 사람들, 당장 내가 뭘 할 수도 없는데 그 현장에 같이 있어야 한다는 그런 거.

그런데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었고, 그들의 곁을 지키는 일이었던 것 같아. 내가 뭘 한 게 아니라 그들 옆에 있어주었던 거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런 오기가 생겼던 거야. 난 유가족이다. 내 동생은 분신해서 끔찍한 고통 중에 죽었다, 겁날 게 없다. 잡아가려면 잡아가라, 때리려면 때려라, 감옥 두렵지 않다 그런 마음이 생겼던 거야. 그러다 보니깐 소심하고 용기 없던 나는 어느새 대열의 앞자리에 있었고, 나는 모든 정권에서 표적이 되어 버렸고, 그때마다 연행되어서 감옥살이를 여러 번 했어.

"네 몫까지 싸울게"라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나름대로 쉬지 않고 노력해 왔는데 민주화된 세상은 아직도 멀었어.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결단·결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어야 민주주의일 텐데, 아직은 지옥 같은 세상이야.

박래전 열사 추모비 박래전 열사 분신 현장 맞은 편에 세워진 추모비
▲ 박래전 열사 추모비 박래전 열사 분신 현장 맞은 편에 세워진 추모비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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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전아. 요즘 5.18 광주에 대해서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어. 못된 권력자 박근혜를 촛불로 쫓아내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에 생긴 일이지. 광주 때 헬기 소총사격이 있었고, 공군이 광주시민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출동 준비를 하고 있었고, 군인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있었고, 암매장을 했다는 얘기들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어. 아직도 많은 일들이 묻혀 있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진실이 밝혀지려고 하고 있어. 새삼 너와 같은 이들의 희생이 있어서 지금이라도 광주의 진실이 밝혀지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박관현 선배와 표정두, 조성만과 함께 네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불린 너의 이름. 울컥했어. 세월호 유가족들만 아니었으면 울고 말았을 거야. 네 이름을 억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인권활동 열심히 해온 게 이런 날을 보게 하지 않았을까 싶어. 

하지만 어찌 내 동생 박래전뿐이겠니. 광주를 위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생존권을 위해서, 통일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걸 던졌던 사람들을 기억해주어야 하는데 아직은 그렇지를 못한다. 유일하게 냉전의 섬으로 남아 있던 한반도에 종전을 넘어, 평화협정으로, 통일로 가는 길이 열리고 있어. 네가 기뻐할 것 같다. 거기서 조성만이 가장 기뻐할까?

래전아, 솔직히 30년 동안 너와 관련된 일들을 잘 못했어. 그러다가 이번에 30주기를 맞아서 네 유품들을 꺼내 보았어. 분신할 때 입었던 옷가지들은 조각조각 나 있고, 네가 신었던 구두는 밑창이 가루가 되어 버렸지. 바지 뒷주머니의 손수건과 양말만 온전했다. 그리고 옷가지들 사이에 남아 있던 라이터. 네가 몸에 시너를 붓고 불을 당길 때 썼던 그 라이터가 있더구나. 유리상자에서 이런 것들을 꺼내어 놓고는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너의 마지막은 이렇게 조각조각 나버렸고, 부스러기가 되어서 사라져 가는 것인가. 다행히 바쁜 시간들 쪼개서 너의 마지막 유품들을 복원해주고, 보전 처리해주는 분들이 계셔서 작업을 맡겼어. 오는 6월 5일에는 내가 근무하는 인권재단 사람의 건물 방 한 칸에 네 추모관을 만들기로 했다. 이름하여 <冬花 박래전 추모관>. 이를 위해서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구나, 이제야 너를 기억하기 위한 사업을 한단다, 이 못난 형이.

박래전 열사 추모관 이번에 인권재단 사람에 만드는 박래전 열사 추모관
▲ 박래전 열사 추모관 이번에 인권재단 사람에 만드는 박래전 열사 추모관
ⓒ 박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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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관 만들면 나는 거기서 너와 생전에 못다 한 얘기를 나눌 것 같다. 너한테 정말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 30년 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네가 열정적으로 헌신했던 운동에 대해서, 그리고 네가 사랑했던 민중에 대해서, 그리고 어머님과 우리 식구들과 네 친구들과 후배들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겠지. 사람들이 찾아와,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하고 느끼고 가면 좋을 것 같다.

래전아, 추모관에는 너의 시도 적어 붙여 놓을 거다. 누구보다 순수한 열정을 갖고 세상을 살다간 너의 시를 보면서, 너의 시집을 보면서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너를 생각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오랜만에 쓰는 편지라서인지 길어졌네. 나는 아직 너를 잊지 못한다. 너는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나는 너와 함께 살고 있다. 다음에 또 얘기하자. 오늘은 이만 줄일게. 38년 전 광주에서 돌아가신 광주민주영령들을 생각하며 묵념의 시간을 갖고 싶다. 너도 그런 마음이겠지.

오늘은 이제 그만, 안녕. 내 사랑하는 동생, 래전아.

2018년 5월 18일 아침에.
둘째 형 래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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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