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뜰보리수 터널
 뜰보리수 터널
ⓒ 고양생태공원

관련사진보기


고양생태공원에는 멋진 뜰보리수 터널이 있습니다. 뜰보리수 열매가 빨갛게 익을 무렵이면 이곳은 환상적인 공간으로 변화합니다.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풍경은 저절로 탄성을 터뜨리게 만듭니다. 우리 공원이 자랑하는 멋진 공간입니다. 이런 뜰보리수 터널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면 좋았겠지만, 고백하자면 일부러 만들었습니다.

뜰보리수 나무가 자연 상태에서 휘어져 터널을 만들 가능성은 절대로 없습니다. 뜰보리수는 가지가 뻣뻣하고 잘 휘어지지 않아 스스로 터널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일부러 가지들을 엮어 터널을 만든 것은 우리 공원에 운치가 깃든 오솔길이 하나쯤 있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공원에 식재한 뜰보리수가 재활용수였기에 가능했습니다. 고양생태공원 조성공사를 할 때 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뜰보리수를 베어낸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몇 십 그루나 되는 잘 자란 나무를 베는 것이 아깝고 안타까워 우리 공원으로 이식하기로 했습니다. 나무를 죽이지 않고 재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나무를 옮겨 심는 과정에서 뜰보리수 터널을 계획했고, 뜰보리수 오솔길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뜰보리수를 줄지어 심고 마주보는 나무들의 가지가 서로 이어지게 엮었습니다. 엮은 나뭇가지들이 아래도 축 늘어지는 것이 아닐지 염려스러웠는데, 다행히 멋진 아치형 터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오솔길 길이는 3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적당히 그늘이 드리워지는 멋진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뜰보리수 터널을 만들고 두 해쯤 지났을 때, 안전을 위해 철근 파이프로 나무를 받치게 하는 아치형 터널을 만들었습니다. 나무가 점점 굵어지고 나뭇잎이 무성해지면 아치형 나무 터널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어 그걸 보강하기 위함이었는데, 그게 터널을 더욱 안정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100미터에 이르는 터널에 뜰보리수, 머루, 다래, 인동, 으름 등 덩굴성 꽃과 열매가 피고 지는 멋진 명소가 되었습니다.

뜰보리수 오솔길 진가는 뜰보리수 열매가 익는 9월에 발휘됩니다. 다 자란 나무라 우리 공원이 개장한 첫 해부터 빨간 열매가 탐스럽게 열렸던 것입니다. 빨간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것 같습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저절로 감탄이 터집니다. 너무 예쁘다. 빨간 열매는 침샘을 자극해 입안에 군침이 가득 고이게 합니다.

깊은 단맛이 스민 뜰보리수 열매는 새들이 가장 좋아합니다. 직박구리들은 뜰보리수 터널을 떠나지 않고 그 주위를 맴돕니다. 너희들이 제일 좋아하는구나. 새들에게도 침샘이 있다면 아마도 침을 뚝뚝 흘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뜰보리수 터널 주변이 온통 새들의 침투성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뜰보리수 열매의 유혹은 치명적입니다.

뜰보리수 열매
 뜰보리수 열매
ⓒ 고양생태공원

관련사진보기


그 덕분에 뜰보리수 열매가 익는 계절에 뜰보리수 터널 바닥은 붉은 물이 듭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씨와 함께 농익은 열매가 터진 채 떨어져 뭉개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붉은 물감을 칠한 추상화 같습니다. 그 위를 꽃뱀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술이야, 예술. 우리 공원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입니다. 새들은 뜰보리수 열매를 먹고 씨를 여기저기에 뿌렸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죠? 새들이 남긴 흔적 덕분입니다. 공원 조성을 할 때 뜰보리수는 뜰보리수 터널과 유실수 군락에만 이식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공원 여기저기에서 뜰보리수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언제 여기에 뜰보리수를 심었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뜰보리수 열매를 떠올렸습니다.

씨에 발이 달리지 않았지만, 충분히 이동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새들이었습니다. 열매를 먹고 씨를 여기저기 흩뿌리고 다닌 것이죠. 그제야 나무 열매에도 번식 본능이 숨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면 빨간 색으로 새들을 유혹하자. 빨간 색에는 그런 의도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죠. 뜰보리수가 늘어나는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그만큼 새들이 우리 공원에 더 많이 모여들기 때문이죠. 그래서 공원 여기저기에 뜰보리수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느는 것을 반갑게 보고 있습니다.

뜰보리수 열매는 몇 백 개를 넘어 수천 개나 열립니다. 우리는 그걸 수확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둡니다.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열린 열매는 자연의 몫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새들이 먹으면서 자연의 순환이 이뤄지는 게 가장 바람직합니다. 우리 공원에 있는 다른 유실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실수 군락의 뜰보리수는 풍성하게 달린 열매 무게로 인해 나뭇가지가 땅바닥까지 늘어지는 진풍경을 보여줍니다.

그러다보니 생태공원에서 유일하게 맛을 볼 수 있게 하는 열매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무 때나 맛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절정으로 많이 열려서 땅까지 닿을 무렵에 일시적으로 생태체험활동에 활용합니다. 열매를 하나씩 따서 맛을 보고, 씨앗 멀리 뱉기 놀이도 합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합니다.

"선생님, 맛있어요. 또 먹어도 돼요?"

뜰보리수 열매
 뜰보리수 열매
ⓒ 고양생태공원

관련사진보기


새들처럼 입을 벌리면서 합창을 하는 아이들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녔습니다. 여러분이 다 먹으면 새들은 어떻게 할까요? 새들이 먹을 게 없겠죠? 새들에게 양보해야 할까요, 하지 말아야 할까요? 아이들은 대답은 늘 같습니다. "양보해야 돼요." 아이들의 우렁찬 목소리에 뜰보리수 열매를 먹으러 왔던 새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칩니다.

뜰보리수 열매가 익는 계절에는 일주일에 몇 번이나 뜰보리수 터널에 갑니다. 빨간 열매 전성기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야죠. 뜰보리수 꽃이 피고, 꽃이 지고, 연둣빛 열매가 달리고, 그것이 빨간 색으로 물들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 설렘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이때가 되면 저도 모르게 수다스러워집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뜰보리수 터널을 자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뜰보리수 터널에서 황당하기 그지없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하면서 어리둥절해한 사건이죠. 세상에는 별 일이 다 있습니다. 2014년 늦여름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그 날도 출근하자마자 뜰보리수 터널로 갔습니다. 빨간 열매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면서 새들을 유혹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주렁주렁 달려 있던 열매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이죠.

새들이 아무리 먹성이 좋아도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도 많은 열매를 모조리 먹어치울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 공원이 개장한 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밤새 안녕이라더니 그 말이 그 때처럼 꼭 맞아떨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사무실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자원봉사자들도 놀라서 뜰보리수 터널로 달려왔습니다. 주변을 살펴보고 또 살펴보고 내린 결론은 사람의 손길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깨끗하게 털어갈 갈 리가 없습니다. 마치 바닥 청소까지 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몽땅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추리, 들어갑니다.

뜰보리수
 뜰보리수
ⓒ 고양생태공원

관련사진보기


뜰보리수 열매가 가장 잘 익어 수확할 시기가 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일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면식범의 소행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그렇다면 내부자가 그랬을까요? 이 대목에서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상황은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럴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끼리 모여앉아 머리를 맞대고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를 했습니다. 다들 어이없어 하면서 범인을 잡아야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간 끝에 잠정적으로 외부자의 침입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 공원 개장 초기에는 직원들이 퇴근한 뒤에 담을 넘어 들어온 외부자의 흔적을 발견할 때가 아주 드물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을 잡기 위해 공원에 설치한 CCTV를 확인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범인을 잡으면 어떻게 할까요? 뜰보리수 열매 도둑이라고 경찰서에 신고할까요? 실은 그것도 난감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뜰보리수가 우리 공원의 보물은 분명하지만 그걸 훔쳤다고 범인을 잡아 법대로 처벌해달라고 하기가 망설여졌습니다. 아깝지만, 안타깝지만 그대로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뜰보리수 꽃
 뜰보리수 꽃
ⓒ 고양생태공원

관련사진보기


우리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2015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덕분에 뜰보리수 열매의 전성기가 너무 짧았습니다. 이번에도 한꺼번에 싹 털어갔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새들이 먹을 것도 남겨두지 않고 매정하게 한 알도 남기지 않고 싹 따 갔습니다.

저도 황당했지만 새들이 더 그랬을 것 같습니다. 맛있는 열매를 먹으러 가자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서 뜰보리수 터널을 찾아 왔을 텐데 하나도 없으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어쩌면 새들은 뜰보리수 열매를 훔쳐가는 현장을 목격했을 수도 있습니다.

열매를 도둑맞고 며칠 동안은 화가 잔뜩 났습니다. 작년에 열매를 훔쳐간 사람이 다시 훔쳐갔다고 짐작했습니다. 범행이 이어졌다는 것은 다음 해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CCTV를 확인해 범인을 잡아내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꾹꾹 눌렀습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뜰보리수 열매
 뜰보리수 열매
ⓒ 고양생태공원

관련사진보기


결국 CCTV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매년 뜰보리수 열매가 익을 때마다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이 훔쳐가게 놔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야간 불침번을 세울 수도 없습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한동안 그 고민을 하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양생태공원이 가진 의미를 두루 알리기로 한 것이죠.

우리 공원은 사람이 아닌 자연을 위한 공간이고, 이곳에서 결실을 맺는 열매들은 사람의 몫이 아니다. 새들이나 동물들의 생존을 위한 먹이다. 열매가 익어 땅에 떨어지면 땅속으로 스며들어 나무나 풀들의 자양분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고양생태공원에 있는 과실수는 전부 자연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부디 귀하게 여기고 아껴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고양생태공원이 생태공원의 역할을 다하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수 있다.

이런 내용을 생태탐방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마다 안내했고, 이런 내용을 담은 글을 지속적으로 우리 공원 홈페이지와 페이스북과 같은 SNS를 통해 올리기로 했습니다. 감성에 호소하는 것은 가장 소극적인 방법이지만,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전략이 적중했을까요?

뜰보리수 꽃
 뜰보리수 꽃
ⓒ 고양생태공원

관련사진보기


2016년에는 다행히 뜰보리수 열매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뜰보리수 열매가 전성기를 이룰 무렵,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퇴근하지 않고 나무 곁을 밤새도록 지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뜰보리수 터널 오솔길을 걸으면서 올해는 제발 무사하게 해달라고 기원했습니다. 그것 외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기원이 통했을까요? 그 해부터 뜰보리수 열매가 사라지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더 이상 뜰보리수 열매를 털어가지 않아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다시 마음 놓고 뜰보리수 열매가 있는 풍경을 즐기게 되었고, 새들 역시 뜰보리수 터널을 놀이터 삼아 신나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매년 뜰보리수 열매가 풍성하게 열린 덕분인지 우리 공원에는 뜰보리수 나무가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공원을 산책하다보면 여기저기서 숨은 뜰보리수 찾기를 하는 것처럼 뜰보리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보리수나무는 인도가 원산지지만 뜰보리수나무는 일본이 원산지입니다. 봄에 노란색 꽃이 피고, 열매는 7월경에 빨간색으로 익습니다. 올해도 뜰보리수꽃이 나무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빨간 열매 가득할 여름 풍경을 상상해봅니다.


태그:#고양생태공원, #뜰보리수, #유실수, #오솔길, #열매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