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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호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강명호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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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는 대구 '신암선열공원'이었는데 오늘부터 '국립 신암선열공원'이 되었다. 어제는 2018년 4월 30일이고, 오늘은 5월 1일이다. 대광역시 동구 신암동에 있는 신암선열공원이 5월 1일부터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는 말이다.

국립신암선열공원의 강명호 지사, 임용상 지사, 최동식 지사에 대해 안내하려 한다. 강명호 지사는 1924년 5월 19일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고, 1992년 5월 15일 타계했다.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던 지사는 1944년 4월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 제1지대 본부 요원으로 입대하였다. 당시 제1지대 본부는 중경(重慶)에 있었다.

지사는 지대 본부에서 대원들의 군량 수급 사무, 신입대원에 대한 교육 훈련과 연합군 측이 요청하는 인원의 파악, 그리고 적 점령 지구로 대원을 파견하여 초모 작전·정보 수집 및 연합군과의 합작 공작 등 임무를 수행하면서 각 구대(區隊)의 공작 활동을 지휘 감독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강명호 지사

임용상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임용상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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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호 지사의 묘소 동쪽에 있는 묘는 임용상 지사의 유택이다. 묘소 앞 표지석에는 '임용상(林龍相)', 비석에는 '義士(의사) 羅州(나주) 林公(임공) 中虎之墓(중호지묘)'라 새겨져 있다. 신암선열공원 입구 안내판에도 '임중호 (일명 임용상)'으로 안내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지사의 성함을 '임용상'으로 쓰려 한다. 대구 앞산 큰골에 세워져 있는 지사의 동상 제자(비석 등의 제목)가 '中虎林龍相義士之像(중호임용상의사지상)'인 것을 기준으로 한다. 동상의 제자는 '中虎(중호)'가 호(號)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임용상 지사는 1877년 5월 22일 경북 청송에서 출생했고, 1958년 1월 5일 타계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임용상 지사는 경북 영덕에서 김재서 등과 함께 의병 부대)을 조직했다. '동해(東海)창의대장'으로 추대된 지사는 포항 청하, 영덕 강구 등지에서 일본군의 주둔소를 습격하고 적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동해 창의대장이 되어 일본군을 무찌른 임용상 지사

1907년 4월 정용기의 산남의진이 결성되자 지사는 이에 합세하여 유격장 겸 도총장(都總將)으로 임명되어 청송, 영천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살하였다. 또한 1907년에도 의병 수백 명을 인솔하고 포항 흥해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전개했다.

1907년 12월 정용기 의병대장이 전사하자 그의 부친 정환직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고 총장(總將)이 되어 청송, 청하, 영덕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10년 봄 그 동안 해산 상태에 놓여있던 옛 산남의진을 다시 정비한 후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군자금을 조달하고 무기를 획득하여 청송, 의성 등지의 일본 수비대를 공격했다.

임용상 지사의 묘소
 임용상 지사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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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평 전투에서 마침내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10년 7월 25일 징역 10년형을 언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건국훈장의 등급


건국훈장은 나라를 세우거나 나라의 기반을 세우는 데 뚜렷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국가 차원의 포상으로, 1949년부터 수여되었다. 현재 건국훈장의 등급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건국훈장 대통령장, 건국훈장 독립장, 건국훈장 애국장, 건국훈장 애족장의 5등급이 있고, 그 아래로 포장과 대통령 표창이 있다.

임용상 지사가 받은 독립장은 지금까지 참배한 신암선열공원 내 다른 지사들이 대체로 애족장을 받은 데 비해 상당히 훈격이 높다. 이는 그만큼 임 지사의 독립운동이 치열했고, 성과도 뚜렷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죽창 항일 투쟁의 최동식 지사

임용상 지사의 묘소 동쪽은 최동식 지사의 묘소이다. 최동식 지사는 1927년 1월 27일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2005년 4월 29일 별세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최동식 지사에 대해 '1944년 7월 15일 최덕종 외 28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제의 징용·징병 제도를 결사 반대하기로 결의하고 경북 경산 대왕산에 입산·집결하여 죽창과 투석전으로 일경에게 항거하였다. 그러던 중 8월 10일 무렵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하산했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최동식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최동식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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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훈록은 또 '그해 10월 4일 소위 '보안법 및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광복으로 출소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라고 안내하고 있다. 공훈록의 내용이 간략한 편이므로 차남 최영근이 지은 묘소 앞 비문을 더 읽어본다.

"대왕산 죽창 의거 항일 운동은 1944년 7월 25일부터 8월 13일 체포 시까지 20여 일 이상 죽창으로 무장하고 일제의 총칼과 비행기에 대항하고자 대왕산 산정에 돌을 모아 성을 쌓고, 막사 3개를 지어 진지를 구축하고, 3개 소대 및 특공대와 정보연락대 등 결심대(決心隊)를 편성하여 세 차례에 걸친 격전을 치르던 중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하산했다가 의거 대원 24인이 전원 체포된 항일 운동이다.

일제의 단말마적인 발악이 극에 달하고, 앞날이 너무나 암담했던 시절에 징용과 징병을 거부한 항일 운동은 정의의 불꽃이었고, 민족의 투혼이었으며, 마지막 우리의 양심이었다. 체포되신 후 경산경찰서에서 50여 일 동안 전기 고문과 천장에 매달린 채 매를 맞는 등 온갖 고문을 당하신 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시어 '치안 유지법' 등 5개 법 위반으로 미결수로 수감 중 8.15 해방을 맞아 석방되셨다.

이 공훈으로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으셨다. 총칼로 무장된 일제 군경에게 죽창과 돌로 맞선다는 것은 무모한 희생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동한 비장한 항쟁 정신, 그 숭고한 의지, 그 기개는 결코 보통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높은 뜻으로 청사에 빛날 것이다."

대왕산 죽창 의거 기념비(경북 경산시 남산면)
 대왕산 죽창 의거 기념비(경북 경산시 남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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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은 비문의 끝 부분에 '이 비를 건립함에 다소 늦은 감을 죄스러이 여기며, 당신의 후손임을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자랑스러운 긍지를 가지고 저희 후손들에게도 길이 그 혼을 물려주고자 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고이 잠드소서'라고 새겨놓았다.

후손들이 '당신의 후손임을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최동식 지사는 '청사에 빛날 것'이라는 후손들의 찬사처럼 우리 역사에 남아 영원히 준거인물로 국민의 존경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태그:#강명호, #임용상, #최동식, #대왕산죽창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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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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