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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 남미 상사병을 오랜 세월 앓던 기자, 마침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그 대륙에 두 발로 딛고 선다. 그리고 그 대망의 첫번째 행선지는 남아메리카의 허리 격인 칠레의 산티아고. 현지인 친구 다니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초대도 염치없이 넙죽 받았겠다, 적어도 여행 초반은 순탄해 보였다. 그것도 잠시, 크리스마스 연휴기간 동안의 범죄 발생률 증가로 시내 관광을 미루게 된다. 그래도 어느새 시간은 가고 나를 '자유롭게할' 그날, 크리스마스가 다음날로 성큼 다가왔다.

크리스마스를 몇 시간 앞두고 다니의 노할머니댁 현관문을 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말소리에 파묻혀 있던 칠레의 옛 가요가 선명하게 내 귓속을 파고들 정도다.

다니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올해는 한국에서 온 친구, 크리스티나를 데려왔다고 말하며 간단히 내 소개를 한다.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얼굴에 띤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얼추 눈대중으로 세어도 어른만 백명은 넘어보인다.

가운데에서 미소를 머금고 계신 노할머니를 필두로 몇번에 나누어 대가족의 가족사진을 찍었다.
▲ 몇번에 나누어 찍은 대가족의 단체사진 가운데에서 미소를 머금고 계신 노할머니를 필두로 몇번에 나누어 대가족의 가족사진을 찍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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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의 가족은 부모님, 다니, 막내 카타의 서열 순서대로 노할머니께 다가가 볼뽀뽀를 드렸다. 귀가 안 좋으신지 다니가 할머니 귀 바로 옆에 입을 대고 안부를 묻는다. 나도 어색했지만 할머니께 다가가 양 뺨에 입을 맞춰 드렸다. 그녀는 100세가 거의 가까운 고령의 나이에도 내 손을 한번 꽉 쥐며 잘왔다, 하신다.

뒤이어 우리는 마당으로 나가 자리를 잡았다. 식탁 위에는 올리브, 여러 종류의 치즈, 메추리알, 견과류, 과일, 과자와 온갖 음료 등이 차려져 있다. 우리나라 남도만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는 줄 알았더니 칠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윽고 내 팬미팅(?)이 시작되었다. 내 곁을 빙 둘러싼 다니의 일가 친척들은 어디서 왔느냐, 진짜 이름은 뭐냐부터 시작해서 음식은 입에 맞느냐 이 전통술은 시음해봤냐며 우윳빛 술이 담긴 동이들을 내 앞으로 들이미신다. 너무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만 따라 혀를 적시니 모두가 좋아하신다.

아직 꼬마인 아이들은 내 근처에서 부끄러운듯 쭈뼛거렸고 머리가 더 굵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지 내게 이것저것 영어로 묻기 시작한다. 한 아이는 아이돌 그룹 엑소의 팬이라며 그들의 사진을 내민다. 그러자 다른 아이가 질투가 났는지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무작위로 늘어놓기 시작한다. 나는 맞장구를 쳐주며 아이의 더벅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다니는 내게 작게 속삭였다.

"내가 장담하는데, 너한테 오늘 밤은 정말 길 거야."

성탄절 가족행사, '숨은 산타 찾기'

늦장을 부린 탓에 승리를 선두로 나선 팀에 내어주고 말았다. 아이들은 입이 뾰로통하게 나왔지만 우리 팀은 다같이 동네를 한바퀴 걸으며 나름 잊지못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대를 이어 내려온 가족행사, < 숨은 산타 찾기 > 중 늦장을 부린 탓에 승리를 선두로 나선 팀에 내어주고 말았다. 아이들은 입이 뾰로통하게 나왔지만 우리 팀은 다같이 동네를 한바퀴 걸으며 나름 잊지못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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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자한 분위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의자 위로 올라선 누군가가 티스푼으로 샴페인 잔을 몇 번 두드린다. 뎅뎅- 하는 맑은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자 그는 '숨은 산타 찾기' 개회를 알렸다.

얼마나 대단한 가족행사인지 꼬맹이들은 자기들끼리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백여명이 참석하는 가족행사라고 별거는 없지만 모든 세대가 이 이벤트에 대해 다 같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진행되는 방식은 간단하다. 집근처 동네 어귀에 숨겨진 산타인형을 찾아오면 장땡이다. 그동안 집에 남은 사람들은 트리 밑에 모두가 가져온 선물들을 넣는다. 그리고 모두가 집에 돌아오면 그동안 산타가 다녀갔다는 '귀여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백여명이 다함께 길을 나서면 무슨 시위라도 하는 줄 알테니 몇몇 그룹으로 나뉘어서 가잖다. 나는 냉큼 다니를 따라 나섰다.

벌써 첫 번째 팀이 산타 인형을 찾았다는 소리가 들린다. 뾰로통하게 입이 나온 우리팀 꼬마들을 달래어 그래도 동네 한바퀴를 돌고 왔다. 오는 길에 노래도 부르고 셀카도 찍으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사진 속의 발갛게 상기된 모두의 얼굴이 도드라져 보인다. 왜 이 시간이 세대를 아우르는 추억이 되는지 알겠다 싶었다. 산타를 찾는 데에는 애도 어른도 없었다.

선물들이 산더미같이 둘러싸인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서 친구와 사진 한장을 남겼다. 이 친구는 나를 칠레로, 자기가 자란 집으로 그리고 이 특별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해 주었다.
▲ 현지인 친구 다니와 함께 선물들이 산더미같이 둘러싸인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서 친구와 사진 한장을 남겼다. 이 친구는 나를 칠레로, 자기가 자란 집으로 그리고 이 특별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해 주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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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노할머니 댁으로 돌아오니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탄성이 들린다. 예상은 했지만 트리 밑의 선물 더미 규모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트리 밑이라기보다는 그 주위로 큰 트리 높이의 절반에 육박하는 산이 생겼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선물 속으로 뛰어들어 선물의 주인을 찾아주느라 바쁘다.

말소리와 음악소리 거기다 선물 주인 호명하는 소리가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 집은 아주 정신이 없다. 모두들 두 손 가득히 받은 선물을 풀어보며 또다시 웃음꽃이 활짝 피어난다. 음식이 더 나왔고 모두의 잔은 빌 줄 몰랐다. 그렇게 밤은 더 깊어 갔고 나는 이 사람들의 매력적인 잔치에 푹 녹아들었다.

마당에 나온 사람들은 가끔 하늘을 가리키며 별똥별을 봤다고 환호했다. 그때마다 나도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인데도 그날 산티아고의 별의 밝기는 남달랐다.

취기가 올라서 그렇게 느낀 것만은 아닐테다. 갑자기 저 달과 별들은 아마 한국의 우리집 쪽에서 오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고향의 가족들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몇 달 뒤 다시 딸없는 설을 보낼 엄마와 아빠를 잠깐 생각했고 누나가 4대륙을 다니는 동안 한번도 나라 밖을 나서본 적이 없는 남동생도 떠올렸다. 다니 사촌 중 하나가 내게 춤신청을 하지 않았다면 뿌얘지는 눈앞을 막을 도리는 없었을 테다. 서툴게 춤을 추는 동안 하늘이 돌았고 눈앞도 돌았다.

오늘은 다시 집을 나선 지 7일째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 당일,
다니네 할머니댁에서


태그:#여행, #남미, #칠레, #크리스마스, #가족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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