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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수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서달수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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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신암선열공원을 찾아 서달수(徐達洙) 지사의 묘소를 참배한다. 서달수 지사는 1920년 4월 17일 경북 월성(경주)에서 태어나 1992년 음력 1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그를 '운동 계열 : 일본 방면'으로 분류하고 있다.

서 지사는 19세인 1938년 3월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대학(日本大學) 정치과에 유학했다. 그는 재학 중 일본인의 한국 학생 차별과 재일교포에 대한 가혹한 처우를 보고 민족적 분개심을 느껴 항일의식을 길렀다. 그래서 같은 학교 학생인 김덕중·김홍구 등과 함께 항일결사 '비밀 동지회'를 조직했다. 이 회는 동경 재류 유학생의 단결을 통한 독립사상 고양에 목적을 둔 비밀결사였지만 겉으로는 학술·문예·체육부 등을 두어 학술연구 단체로 위장했다.

이들은 동지 포섭에 힘을 쏟는 한편 토론회 및 발표회를 개최하면서 항일 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고, 서달수 지사는 1941년 1월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되었다. 그 후 1941년 11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일본에서 대학 다니며 항일 활동을 펼친 서달수 지사

서달수 지사의 묘소 서쪽에는 정동석(鄭東錫) 지사의 묘소가 있다. 정동석 지사는 1885년 8월 4일 대구 달성에서 태어나 1968년 12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윤주(閏周)라는 다른 이름이 있었던 그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919년 9월 무렵 지금의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일대에는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위해 군자금 모집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정동석 지사는 (역시 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어 있는) 송두환으로부터 권총 2정과 실탄 10여 발을 보관해 달라는 의뢰를 받아 집에 숨겨두었다. 대구 신암동의 구장(요즘의 통장과 비슷)으로 재직 중이던 1920년 1월에도 다시 송두환으로부터 권총 3정과 실탄 300여 발을 받아 보관했다. 정동석 지사는 독립군을 지원하는 배후 활동가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중국 동삼성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던 최윤동·이수영·노기용 등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정동석 지사도 1923년 11월 27일 피체되었다. 지사는 투옥된 지 약 1년 만인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입구의 안내판과 멀리 사당 단충사가 보이는 신암선열공원 전경
 입구의 안내판과 멀리 사당 단충사가 보이는 신암선열공원 전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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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해(金湧海) 지사의 묘소를 찾는다. 김용해 지사는 1895년 7월 26일 대구 남산동 537번지에서 태어났고, 1919년 3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국가보훈처 누리집의 '독립운동가 공훈록'에 따르면 김용해 지사는 1919년 3월 8일의 대구 서문 장날을 이용하여 김태련(김용해 지사의 아버지)·권의윤·이만집·김영서 등이 주동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계성중학교 학생이던 그는 이날 오후 3시경부터 계성중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성경학교 학생들과 일반주민 등 1000여 군중과 함께 연합 시위를 일으켰다. 그러나 시위 군중이 경찰서(대구경찰서로, 현재의 중부경찰서 자리) 앞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청(현재의 대구백화점 자리) 앞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6대의 기관총으로 무장하여 대기 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어 부득이 행진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 헌병과 경찰은 닥치는 대로 군중을 구타하며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용해 지사는 서문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해 온 아버지(김태련)가 일본 군경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일본 군경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경들이 그를 하수구에 처박고 잔인하게 짓밟아 빈사 상태가 되었으며, 결국 체포되어 수감당했다.

학생모를 쓴 모습이 애처로운 김용해 지사의 모습이 묘소 앞 표지석에 각화되어 있다.
 학생모를 쓴 모습이 애처로운 김용해 지사의 모습이 묘소 앞 표지석에 각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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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가출옥, 3월 29일 순국

김용해 지사는 유치장에 수감된 후 혹독하고 잔인한 고문을 받고 3월 28일 가출옥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이튿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용해 지사의 묘소 뒤에 그의 아버지 김태련 지사의 묘소가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의 김태련 지사 관련 내용을 읽는다.

"생몰년도 : 1879.1.25.~1943.8.19.
출신지 : 대구
운동 계열 : 3.1운동
훈격(연도) : 애족장(1990)

공적 내용 :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권의윤·김영서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에서는 1919년 2월 24일 경상도 독립만세운동의 연락 책임자였던 (탑골 공원 대한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이 대구에 내려와서, 제일교회에서 기독교계의 유지 이만집·이상백·백남채 등과 만나 국내외 정세를 설명하고,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을 통하여 2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부터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만집·김영서·이상백·백남채·권의윤·정재순·정광순·최상원·최경학 등과 함께 만나 서문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각자가 주민과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는데, 그는 기독교 신도들의 규합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대구 시내의 계성중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신명여학교·성경학교 학생들에게도 연합 시위를 일으키기로 연락하여 제휴하기로 하였다.

3월 6일에는 이갑성이 이만집에게 보낸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이를 집에서 다시 등사하고, '대한독립기'라고 쓴 큰 깃발과 크고 작은 태극기 40여 매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거사에 앞서 3월 3일 홍주일이, 3월 7일에는 백남채가 일경에게 예비 검속되어 주동인물들을 긴장시켰으나, 거사 계획은 변함없이 추진되었다.

김태련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김태련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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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아침 일찍부터 도청(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자리) 정문 등 요소에 태극기와 격문이 살포되었으며, 오후 3시경 그는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서문외 장터에 나아가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기 위하여 각지에 몰려온 학생·일반주민 등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감격에 벅차 울먹이는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 그는 시위 군중들의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그가 시위 군중과 함께 경찰서 앞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청 앞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6대의 기관총으로 무장하여 대기 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어 부득이 행진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일본 헌병과 경찰은 시위 대열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군중을 구타하며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도 체포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일본 군경에게 대항하던 그의 아들 김용해는 끌려간 이후 일제의 무자비하고 잔인한 고문을 받고 빈사 상태가 되어 가출옥하였다가 3월 29일 끝내 순국하였다.

그는 이 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9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용해 지사의 묘소와 그 뒤로 보이는 아버지 김태련 지사의 묘소
 김용해 지사의 묘소와 그 뒤로 보이는 아버지 김태련 지사의 묘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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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련 지사의 묘소 뒤에 서서 잠시 그의 아들 김용해 지사의 묘소까지 함께 바라본다. 아버지의 묘소 바로 아래에 아들의 묘소가 놓여 있다. 마치 일본 군경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고 있는 아들 용해를 지켜보는 김태련 지사의 마음이 된 듯한 아픔이 밀려온다.

아들 용해는 남산교회 신도들이 묘소 앞에 세워둔 묘비의 표현에 따르면 '3월 8일 (중략) 시위를 주도하는 부친의 신변을 살피면서 그 뒤를 따랐다. 시위 행렬이 대구 시가를 누비며 동성로 3가에 이르자 일본 군경들의 철퇴에 맞아 부친이 쓰러지자 성난 사자처럼 단신으로 뛰어들어 일대혈투를 벌인 끝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아 사경에 이르러서야 내쳐져서' 이내 죽음을 맞이하였다.

아버지 김태련은 감옥에 감힌 상태에서 아들의 죽음을 알았고, 투옥된 지 2년 6개월이나 지나서야 출옥하여 아들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아들의 무덤 앞에서 "너의 죽음은 장하되 처절했던 최후는 잊을 수가 없구나!" 하며 오열했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아버지의 울음소리

마침 신암선열공원 동편 아래를 흐르는 금호강 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조용한 봄바람이지만 필자의 귀에는 마치 울음이 섞여있는 듯이 비장한 소리로 들린다. 방금 김태련, 김용해 부자의 가슴아픈 사연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는 5월 1일이면 이곳 신암선열공원이 국립묘지로 승격된다. 그렇게 되면 신암선열공원은 나라 안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라는 위상을 갖게 된다. 그 조치가 독립운동 선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친일 청산, 민주화 완성, 통일 달성 등의 과업을 완수함으로써 선열들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할 일이 남았다. (계속)

덧붙이는 글 | 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운동가 공훈록', 현지 비문 참조



태그:#김태련, #김용해, #서달수, #신암선열공원, #정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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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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