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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이면 우리나라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로 승격되는 대구 신암선열공원
 5월 1일이면 우리나라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로 승격되는 대구 신암선열공원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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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이 되면 국내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로 승격되는 대구 신암선열공원을 찾는다. 그 중 이승주, 백기만, 김교훈 세 분 지사에 대해 안내문을 쓰려 한다. 세 분의 묘소는 이 곳에 안장되어 있는 총 52기의 유택 중 일부이다. 온 김에 52기 모두를 둘러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쉰두 분의 독립지사를 한 기사에 모두 소개하는 것은 지면상 불가능하다.

임시정부 요원을 경호한 이승주 지사

먼저 이승주(李承柱) 지사의 묘소부터 참배한다. 이승주 지사는 192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했고 1990년에 타계했다. 지사는 중국 중경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소속되어 임시정부 요인들의 경호 임무를 수행했는데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기 이전인 1963년에는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이승주 지사 묘소
 이승주 지사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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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지사의 묘소 동쪽에 백기만(白基萬) 지사의 묘소가 있다. 신암선열공원 안에는 소설가인 최고(崔杲) 지사의 유택도 있는데 이번에 찾는 백기만 지사는 시인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국가보훈처 누리집의 '국가유공자 공훈록'에서 백기만을 찾으면 '등록된 공훈록이 없습니다.'라는 내용만 보게 된다.

윤장근의 《대구문단인물사》에 따르면, 백기만은 1902년 음력 5월 2일 대구 중구 남산동 284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 전신) 3학년이던 백기만은 학생 만세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가 복심법원에서 3년 집행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백기만 지사가 시인으로 등단한 <개벽>지의 표지(대구 중구 상화고택 옆 예가 전시품을 재촬영한 사진임)
 백기만 지사가 시인으로 등단한 <개벽>지의 표지(대구 중구 상화고택 옆 예가 전시품을 재촬영한 사진임)
ⓒ 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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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에 1919년 대구 학생 만세운동을 주도

백기만 지사는 1920년 일본 와세다(早稲田)대학 영문과에 유학을 가고, 1923년 3월 《개벽》지에 시 3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 같은 해 11월에는 양주동 등과 함께 《금성》 동인지를 발간한다. 이때 그는 학비가 없어서 대학을 중퇴한 상태였다. 이듬해인 1924년 5월 백기만은 《금성》에 새로운 동인으로 이장희(李章熙, 1900∼1929)를 추천했는데, 이장희는 유명한 <봄은 고양이로다> 등을 발표했다.

독립 이후 백기만은 1949년 1월 5일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 조사위원 활동, 이상화와 이장희의 유고를 모아 《상화와 고월》을 1951년에 발간함으로써 두 시인이 남긴 작품들의 멸실을 막고 후세인들의 연구와 감상을 가능하게 한 일, 언론인 및 사회단체 활동으로 세상에 기여했다.

1960년 군사 쿠테타, 독립운동가를 탄압

하지만 1961년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군인들은 백기만을 혁신계라는 이유로 검거했고, 그 와중에 지사는 뇌졸중을 일으켰다. 지사는 8년이란 긴 세월 동안 병고에 시달리다가 1969년 8월 7일 남산동 719번지 자택에서 향년 68세로 타계하고 말았다. 다음은 백기만 작사, 유재덕 작곡 '대구 시민의 노래' 가사 전문이다.

팔공산 줄기마다 힘이 맺히고
낙동강 굽이돌아 보담아주는
질펀한 백리벌은 이름난 복지
그 복판 터를 열어 이룩한 도읍
우리는 명예로운 대구의 시민
들어라 드높으게 희망의 불꽃

지세도 아름답고 역사도 길어
인심이 순후하고 물화도 많다
끝없이 뻗어나간 양양한 모습
삼남의 제일 웅도 나라의 심장
우리는 명예로운 대구의 시민
돌려라 우렁차게 건설의 바퀴

세계에 자랑하던 신라의 문화
온전히 이어받은 우리의 향토
그 문화 새로 한 번 빛이 날 때에
정녕코 온 누리가 찬란하리라
우리는 명예로운 대구의 시민
솟아라 치솟아라 이상의 날개

백기만 지사 묘소
 백기만 지사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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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만 시인의 묘소 아래에 김교훈(金敎勳) 지사의 묘소가 있다. 김교훈 지사는 1896년 12월 2일 경북 금릉(현 김천시 아포면 송천리 120번지)에서 아버지 김치주(金致珠)와 어머니 권송림(權松林)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1973년 5월 31일 타계했다. 정부는 그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김 지사의 '운동 계열'을 '문화 운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암선열공원에서 문화 운동을 한 독립투사로는 김 지사가 유일하다. 소설가 최고와 시인 백기만도 문화운동가로 분류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김 지사가 문화를 통한 독립운동가로 정의되는지 궁금하다.

김교훈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사진이 특이하다.
 김교훈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사진이 특이하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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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사는 1919년 8월 김천에서 예수교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김남수(金南洙)와 함께 독립운동 거사를 협의했다. <혁신신보(革新新報)>와 <신한별보(新韓別報)> 등을 입수해서 기사를 발췌, 등사, 배포함으로써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했다. 

'문화운동가'로 평가받는 김교훈 지사

김 지사가 문화운동가로 인식된 것은 교회와 언론을 활용하여 독립운동을 펼쳤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정도 내용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여러 관련 자료를 더 찾아서 알아본다.

김교훈은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 계성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퇴를 하고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김 지사는 그해 3월 26일 구미 장날에 궐기한 김천 일원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 이후에도 인근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에 앞장섰고, 모은 자금은 모두 최재화에게 전달했다.

김교훈 지사의 묘소. 바로 뒤가 백기만 지사의 묘소이다.
 김교훈 지사의 묘소. 바로 뒤가 백기만 지사의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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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할 만한 일은 김교훈이 아포면 제석리에서 김남수를 만난 일이다. 이 마을 274번지에서 1900년에 태어난 김남수는 지하(地下)신문을 함께 만들어서 함께 배포한 동지로, 재당숙 김성숙으로부터 1,400원이란 거금을 얻어 김교훈에게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하였다.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만주로 간 김교훈은 군관 학교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애쓰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921년 경찰에 검거되어 그해 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김남수도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지하신문 배포하고, 군자금 만주로 보내고

1922년 출옥한 김 지사는 곳곳에 청년들의 민족 교육을 위해 서당을 세웠다. 김천 대둔서림(大屯書林), 선산 죽림서림(竹林書林), 상주 갑장서림(甲長書林) 등이 그들이다. 민족학교를 여러 곳에 세워 운영한 일과 지하신문을 만들어 배포한 일이 그를 문화운동을 통한 독립운동가로 자리매김한 근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김 지사는 1949년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문불출로 지냈다.

김구 선생이 타계하던 당시 김교훈 지사는 우리 나이로 54세였다. 그로부터 78세로 이승을 떠날 때까지 무려 24년 동안 지사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아마도 지사께서는 '목숨과 피와 땀을 바쳐 일제 군국주의와 싸웠는데, 해방 되고 나서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청춘을 독립운동에 보내고, 해방된 뒤의 노년은 허탈 속에서 고독하게 생애를 보낸 애국지사의 묘소 앞에서 필자는 문득 말을 잊는다. (계속)


태그:#신암선열공원, #백기만, #이승주, #김교훈, #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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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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