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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1.5일 만의 샤워와 양치는 차라리 감동이었다. 정말이지 샤워기 아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서 영원히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수건으로 몸을 두르고 나오는데 개운함에 몸이 부르르 떨었다. 머리를 말리는 동안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사투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오메오메, 내일부터는 하루에 3번씩이라도 하것구마이."

그러고는 물론 말만 그랬다. 덜 마른 머리를 싸매고 다니의 침대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갔다. 다니가 키우는 개들의 털이 사방팔방이다. 은근 개냄새도 나는 것 같다. 단언컨대 나는 정말 '1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등을 누이고 잘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집에 있는 오리털 이불에 차가운 보리차가 아주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집 나가서 하는 개고생이 주업무인 배낭여행자 신분이다. 그리고 1달여간 호주 아웃백에서 캠핑을 했던 2차례의 호주 로드트립에 비하면 이 정도는 호텔 스위트룸이다.

지난해 11월, 호주 남단 여행 중 한번은 5일 연속 문명의 혜택(?)을 접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습했던 날씨와 오랜 여행 탓에 버스 안 모든 이의 냄새는 상상초월이었다(심지어 현실회피를 위해 벌건 대낮에 독한 술을 몇 모금 넘기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가 멈춘 곳은 허허벌판에 생뚱맞게 자리한 세차장. 그곳에서 친구들과 단체로 수영복 차림으로 초간단 샤워에 돌입했다. 1달러 동전 10개를 넣으니 열댓 명이 씻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스물 다섯 살 인생 최고의 샤워였다. 그리고 서로에게 물세례를 하고 밀대로 목욕을 도와주던 기억도 지금은 추억이 되었다.

이야기가 주제를 조금 벗어났다. 잠깐의 씨에스타(낮잠 시간) 후에 눈을 떠보니 발치에 이 집 개들이 사이좋게 웅크리고 있다. 녀석들의 전용 자리인듯싶다. 약간 놀랐지만 발과 종아리 언저리가 따뜻한 게 기분이 좋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두 털복숭이를 보며 참 낯가림도 없는 애들이네 싶었다.

크리스마스 시즌 바로 직전에 도착했던지라 거리 곳곳에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난다.
▲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나는 산티아고의 프로비덴시아(Providencia) 크리스마스 시즌 바로 직전에 도착했던지라 거리 곳곳에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난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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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오후 2시, 저녁은 오후 10시

밤이 깊어지자 올빼미처럼 눈이 더 말똥말똥하다. 시간이 늦어 까치발로 다니는데 다니의 어머니이신 지오바나가 "크리스티나야-" 하시며 내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신다. 크리스티나는 영어로는 Chritina, 스페인어로는 Cristina로, 스펠링만 조금 바꾸면 되는 카멜레온 같은 내 이름이다. 하지만 다니는 자기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작명 전이라면서 내 성인 '송'으로 계속 부르기를 고집한다.

"크리스티나, 꼬미다 레디!" (크리스티나,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
"께? 나우?" (네? 지금요?)
"씨, 씨." (그럼)


벽시계를 올려다보자 오후 10시 반이 다 되어 있다. 어리벙벙하게 있는 나를 보며 다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원래 저녁은 이 시간대에 먹어. 오후 9시나 10시대? 그게 바로 우리 몸매 유지 비결이지."

그러면서 자기의 귀여운 똥배를 통통 두드린다. 이게 바로 첫 번째 문화충격이라면 문화충격이었다. 저녁을 일찍 먹고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드는 게 우리에겐 건강한 생활을 위한 상식이 아닌가. 음료를 권하는 두 사람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설마, 점심 먹고 지금까지 굶어야 하는 거야?"
"오, 쏭! 너 진짜 귀엽다. 하하하. 아니야! 칠레 사람들도 얼마나 먹보인데. 점심은 보통 오후 2시나 3시경에 먹고 대여섯 시 경에 온세(Once)라고 간식 시간이 있어."

온세는 스페인어로 11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11시에 뭔가 먹는다거나 뭘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누구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칠레에서는 늦은 오후에 먹는 간식을 그렇게 부른다.

나는 고개를 꺄우뚱하며 자기 직전에 그렇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다니는 '칠레 사람들은 보통 전통적으로 저녁을 가볍게 먹고 점심에 만찬을 든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야 뭐. 칠레에 왔으니 로마법, 아니 칠레법을 따르겠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랬더니 지오바나의 얼굴에 큰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내 딸들은 모두 이렇게 말을 잘 들어서 예뻐, 하시며 내 어깨를 껴안으신다. 엉겁결에 이렇게 나는 엄마가 하나 더 생겼다. 나는 그녀의 주름진 손에 내 손을 얹어드렸다. 그런 우리를 보던 다니가 불쑥 말했다.

"엄마, 내가 호주에서 쏭의 엄마 노릇도 했었단 말이야. 그럼 족보가 이상해지는데? 우리는 이제 자매인가?"
"그럼! 하나님 앞에서 우린 다 자매야, 시스터."


우문현답인 그녀의 대답에 우리는 한바탕 크게 웃었고 개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식탁 주위를 맴돌았다.

지오바나는 이어 디저트를 두 손 무겁게 내왔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먹을 사람!" 하고 장난스럽게 외치셨다. 우리 둘 다 눈을 빛내며 손을 번쩍 들었다. 개들은 더 짖었고 칠레에서의 첫날밤이 그렇게 더 깊어갔다.


태그:#여행, #남미, #칠레, #여행기,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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