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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선열공원 안내판과 멀리 보이는 단충사
 신암선열공원 안내판과 멀리 보이는 단충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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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신암선열공원이 다가오는 5월 1일부터 국내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로 승격된다. 언론들은 신암선열공원이 국립묘지로 재탄생하는 일을 두고 '신암선열공원이 일곱 번째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식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보훈처의 <국립묘지 안장 관리 시스템>에 공지되어 있는 '국립묘지 안장 대상'에는 국립 서울 현충원, 국립 대전 현충원, 국립 4·19 민주묘지, 국립 3·15 민주묘지, 국립 5·18 민주묘지, 국립 이천 호국원, 국립 영천 호국원, 국립 산청 호국원, 국립 임실 호국원의 아홉 곳이 올라 있다. 신암선열공원이 열 번째 국립묘지인 셈이다.

신암선열공원의 봄
 신암선열공원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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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은 이와 다른 분류를 보여준다. 동법 제 3조(국립묘지의 종류)는 국립묘지들을 '1. 국립 서울 현충원 / 2. 국립 대전 현충원 / 3. 국립 4ㆍ19 민주묘지 / 4. 국립 3ㆍ15 민주묘지 / 5. 국립 5ㆍ18 민주묘지 / 6. 국립 호국원 / 7. 국립 신암 선열공원'으로 나열하고 있다.

경기 이천, 경북 영천, 경남 산청, 전북 임실에 있는 네 곳 호국원을 합해서 하나의 국립묘지로 보고 있다. 그렇게 헤아리면 신암선열공원은 일곱 번째로 국립묘지 지정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일곱 번째로 국립 묘지가 되다

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어 있는 52분 독립지사들의 묘소는 본래 대명동 등지에 흩어져 있었다. 그 후 1955년 이래 이곳으로 이장되기 시작하여 1987년 신암선열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본격 조성되었다. 중심 건물은 단충사로, 52위의 위패와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신암선열공원 단충사
 신암선열공원 단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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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선열공원 답사의 핵심은 단충사 참배 이후 묘소들을 둘러보는 일이다. 묘역은 다섯 구역으로 나뉘어서 조성되어 있다. 공원 입구 안내판은 각 묘소에 번호를 매긴 지도를 게시해두어 참배자들의 편의를 도와준다.

훈격(勳格)


훈격은 나라의 발전에 뚜렷한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 정부가 주는 상의 등급을 말한다. 건국 또는 나라의 기반을 세우는 데 뚜렷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건국훈장은 1949년부터 수여되었는데, 현재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건국훈장 대통령장, 건국훈장 독립장, 건국훈장 애국장, 건국훈장 애족장의 5등급이 있다. 건국포장과 대통령 표창은 그 아래 등급이다.

52분 독립운동 선열들이 계시는 곳

단충사에서 나와 서쪽으로 접어들면 제1 묘역의 1번 묘소인 송서룡(宋瑞龍) 애국지사의 유택(幽宅)이 가장 낮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묘소 앞 표지석에는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 운동 계열 : 광복군, 평북 운산 / 광복군 제3 지대에서 정보 수집 활동. 중국군 첩보대와 함께 일본군 활동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과 광복군에 전달, 항일 독립 전쟁에 기여함'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1968년 11월 15일에 건립된 비석의 문장도 읽어본다. 검은 빗돌에 새겨진 비문들이 본래 읽기 어렵지만, 이곳도 한자까지 너무 많이 섞여 있어 웬만한 답사자는 읽을 엄두조차 내지 않을 것 같다. 그 점이 못내 안타깝다. 비문의 한자를 모두 한글 발음으로 옮긴 뒤, 주요 내용을 대략 뜻 중심으로 읽어본다.   

맨 앞에 송서룡 독립지사의 묘소가 보이는 신암선열공원 제1 묘역
 맨 앞에 송서룡 독립지사의 묘소가 보이는 신암선열공원 제1 묘역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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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송서룡 공은 항일 전선의 첨단을 누비며 싸운 광복군의 일원이다. 서산 송씨로,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소재 명문가에서 1916년 3월 8일 태어났다. 아버지 태환, 어머니는 이숙영이다.

15세에 북진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노골적인 차별 대우를 겪었다. 그래서 1932년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했을 때 독서회를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을 맹렬히 성토하면서 주변에 민족의식을 배양했다. 이 활동으로 체포되어 20여 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배일 사상은 더욱 굳어졌다. 


신암선열공원 송서룡 지사 묘소 앞 표지석
 신암선열공원 송서룡 지사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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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4월 취직해 있던 완풍광업소에서 민족운동 모임을 조직했다가 발각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풀려난 공은 대륙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구국 항쟁의 길로 들어섰다.

선우찬(鮮于燦) 동지와 손을 맞잡고 죽음의 맹세를 한 공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하남성 기북현과 하읍현 일대에서 활약을 하다가 1942년 봄 광복군에 입단했다. 공은 소정의 훈련 과정을 수료한 뒤 준양현으로 파견되어 지하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그 후 귀덕성 지역으로 이동하여 특파단 제 16대대 3중대 소속으로 임천과 주가구 등지에서 항쟁을 계속하던 중 독립을 맞았다.

1946년 5월 12일 고향 북진으로 귀국했고, 1948년 봄에 월남했다. 1968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달성군 성서(현재 달서구 성서)에서 낙농업을 경영하면서 역경의 동지들과 함께 살던 중 1969년 9월 9일 64세로 타계했다.

1번 송서룡 지사의 묘소 뒤에 자리를 잡고 있는 51번 무덤은 현영만(玄泳晩) 지사의 묘소이다. 1번 묘소 바로 뒤에 2번 묘소가 아니라 51번 묘소가 있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현영만 지사의 묘소가 51번째로 이곳 신암선열공원에 자리를 잡게 될 때에 1번과 2번 묘소 중간 자리를 적당한 묘터로 선정한 결과이다.

신암선열공원 현영만 지사 묘소
 신암선열공원 현영만 지사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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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선열공원의 독립지사 묘역에는 대부분의 묘소마다 비석이 있다. 답사자가 50기에 이르는 비문의 내용들을 모두 찾아서 읽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글자를 판독하는 자체도 어렵지만, 옛날에 쓰던 국한문 혼용체 비슷한 문장이라 한자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뜻을 알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현지 비석 대신 국가보훈처 공훈록 열람 권장

현영만 지사의 묘소부터는 빗돌의 글을 애써 판독하는 대신 국가보훈처 누리집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읽기로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첫째, 비문과 공훈록의 내용이 서로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둘째, 임진왜란 선열의 빗돌에 새겨진 글들은 대체로 해당 가문에서 작성한 것이지만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국가보훈처의 국가 공식 기록이라는 점에서 공신력의 차원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달리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국가가 일목요연하게 공식 평가를 남기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답사를 온 분들에게 읽을 수도 없는 비문을 해독하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신암선열공원 현영만 지사 표지석
 신암선열공원 현영만 지사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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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연도 : 1921.5.2.~1981.4.6. 

출신지 : 경북 경산
운동 계열 : 국내 항일 
훈격(연도) : 애족장(1990년)

공적 내용 : 대구 사범학교 재학 중인 1940년 12월 1일 동교생 조소영·김병욱 등과 함께 대구시 대봉동 소재 우전화정(창씨명)의 하숙방에 모여 항일 결사 '무우원(無憂園)'을 조직하였다.

무우원은 민족의식을 고양할 목적으로 조선문학의 연구를 통한 문화향상 및 경제적 성장에 힘을 쏟았는데 겉으로는 종교 단체 내지는 저축 장려 단체로 가장하였다. 조직의 구성은 집행장 아래 문예·종교·경제·총무부 등의 7부를 두었는데 그는 총무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동지 포섭에 노력하여 조직의 확대를 꾀하는 한편 〈무우원〉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고, 항일 내용을 담은 인쇄물도 발간하면서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무우원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던 그는 1941년에 동교를 졸업한 후 경산군의 진량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무우원의 사업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무우원의 활동이 발각됨으로써 1943년 6월 피체되었다.

피체 후 그는 1944년 6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신암선열공원 답사 순서를 매겨보다

신암선열공원 답사 순서도


단충각 참배
(제1 묘역) 1 묘소- 51- 2- 3- 4- 5- 8- 7- 6
(제 2묘역) 9- 10- 11- 14- 13- 12
(제3 묘역) 28- 27- 26- 25- 21- 22- 23- 24- 20- 19- 18- 17- 16- 15
(제5 묘역) 46- 47- 49- 50- 42- 43- 48- 44- 45
(제4 묘역) 41- 40- 39- 38- 37- 36- 32- 52- 35- 34- 33- 31- 29

51번 현영만 지사의 묘소 참배를 마치고 2번 신길우 지사의 묘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신암선열공원은 입구 안내판에 참배자를 위해 각 묘소에 번호를 붙이고, 지사의 성명을 밝혀두었다.

그러나 묘소 전체를 둘러보려면 1묘소부터 52묘소까지 번호 순서대로 참배해서는 안 된다. 묘소가 번호 순으로 직선 배치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암선열공원을 찾을 분들을 위해 1묘소부터 52묘소까지 참배 순서를 매겨본다. (오른쪽 순서도 참조) 오락가락하지 않고 정연하게 모든 묘소를 둘러볼 수 있는 길을 만들어두면 필자보다 뒤에 이곳을 찾아온 답사자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이다. 아직도 둘러볼 묘소가 50곳이나 남았다. (계속)

신암선열공원 입구
 신암선열공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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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대구 독립운동, #현영만, #송서룡, #국립묘지, #신암선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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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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