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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가려고 하면 왠지 모르게 위축된다. 여름이면 샌들 밖으로 자유분방하게 튀어나온 발가락이 신경 쓰이고, 겨울이면 순전히 보온성만을 고려해 입고 다니는 빵빵한 패딩 점퍼가 신경이 쓰인다.

이런 처지니 미술관 방문을 많이 한 편은 아니다. 많지 않은 경험이지만, 관람을 하고 돌아오는 길엔 늘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니 더 자주 가고 싶은 생각만은 굴뚝같은데, 어쩐지 영화관과는 다른 긴장감이 느껴지니 이를 어떡하면 좋을까. 반갑게도, 미술관을 향한 마음의 문턱을 조금은 낮춰줄 수 있는 책을 만났다. 다카하시 아키야의 <미술관의 뒷모습>이다.

<미술관의 뒷모습> 책표지
 <미술관의 뒷모습> 책표지
ⓒ 재승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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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1980년 일본 국립 서양 미술관 학예원으로 시작해 파리 오르셰 미술관의 객원연구원으로 근무한 바 있고, 도쿄의 미쓰비시 이치고칸 미술관 초대 관장을 지냈다. 한 분야에서 일한 지 35년이 넘었으니, 이 분야의 으뜸 전문가라고 할 수 있겠다.

"미술품을 전시하고 시각을 통해 인간의 감성을 깨우는 것이 목표인 미술관의 일은 얼핏 보면 조용하고 아름답게만 보일지 모르지만,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연기하는 선수가 수면 아래에서 필사적으로 발길질하는 것처럼 미술관의 뒤편에는 치열한 모습이 존재한다." (p285)


저자의 시선과 경험을 통해 바라보는 미술관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미술관의 기원이나 큐레이터의 업무 내용은 물론, 전시회 개최 비용이나 작품을 관람하는 팁까지, 실로 많은 내용이 담겼다.

"아름다움의 전당이 되어야 할 미술관도 반드시 아름다운 이야기만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금전적 또는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는 등 미술관을 운영하고 전시회를 개최하는 이면에는 상상 그 이상의 다양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p9, 프롤로그)


프롤로그부터 흥미가 동한다. 그 드라마 같은 내용을 몇 가지만 들여다보면 이렇다. 그 이름도 유명한 반 고흐의 <아를의 침실>이라는 작품이 있다. 고흐는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하고, <아를의 침실> 역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그 작품의 주인이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세계대전 중에 벌어들인 군수이익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마쓰카타 고지로. 그는 유럽 각지에서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등의 그림에서부터 로댕, 부르델의 조각 컬렉션은 물론, 공예품, 풍속화에 이르기까지 무려 1만점이 넘는 미술품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 최초의 서양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으나, 1927년 금융공황으로 많은 작품들을 은행에 매각할 만큼 경제적 위기를 겪는다. 이때, 유럽에서 사들였으나 미처 일본에 가져가지 못한 작품들이 있었는데, 고흐의 명화 역시 파리의 창고에 보관 중이던 수많은 작품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2차 세계대전 후 전쟁 상대국의 재산으로 간주되어 프랑스 정부의 소관이 되었고, 일본 측의 끈질긴 반환 요청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에서는 '기증품'이라며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작품에 얽힌 비화라면, 미술관의 실질적인 업무를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해 흥미로웠다. 미술관 역시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보니 관점이 달라지기도 했고, 특히 학예원(학예사)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이 많은 참고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저자는 오랜 세월 미술관 업무에 몸 담아 온 사람으로서, 일본의 미술관이 대형 신문사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걱정하기도 한다. 미술관이 보다 능력 있는 인재를 기용하고, 확실히 독자적으로 자립할 수 있기 위해, 학예원의 매니지먼트 능력을 강조하기도 한다.

종종, 미디어를 통해 미술품의 위작 논란을 접한다. 이 책을 통해 작품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데 강력한 근거자료가 된다는 '카탈로그 레존네Catalogue Raisonné(작품의 총목록)'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는 특정 미술가가 제작한 모든 작품의 목록을 지칭하는 것으로, 각 작품의 도판, 타이틀, 제작연도, 소재, 기법, 전시회 내력, 문헌 기록 등 구체적 정보가 실려 있다고 한다.

서양 미술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지침이 되는 중요한 자료지만, 특이하게도 일본 작가에 대한 카탈로그 레존네는 거의 작성되지 않는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은 미술품의 진위 여부에 대해 명료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저자는 이것을 미술품의 자산 가치 때문에 생긴 폐해로 보고, 향후 개혁이 필요하다고 짚고 있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다. 영화의 소재로만 생각했던 미술품 도난 사건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은 적잖이 놀라웠다. 유네스코의 도난품 목록에 오르는 것만 해도 연간 수천 점이 넘는다고. 다만 이것이 미술관의 신용 및 이미지 추락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명품이나 간판 작품이 아니면 도난 사건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미술관의 세력 판도를 흔드는 것은 서구의 미술관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영향력을 가진 것은 중국이라는 점도 놀라웠다. 저자는 이것이 중국이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그에 맞게 축적된 수많은 미술품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술품이 정치적 외교의 술책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조심스럽게 의견을 밝히고 있다.

옮기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책이다. "미술관과 전시회를 위한 작은 안내자가 될 수 있기를"(p287) 바란 책의 목적은 소기의 성과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미술관을 보다 가까이 하고 싶은 욕망이 한껏 자극받았다. 더 보고, 더 느끼고, 더 알고 싶어졌다.

"미술 감상, 말하자면 미술을 즐긴다는 것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가치관과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가슴 속에 있는 감수성을 발견하거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pp281-282)

오는 주말엔 미술관에 가봐야겠다. 샌들도, 패딩도 없는 봄날, 미술관에 가기 딱 좋다.


미술관의 뒷모습 - 전시회 개최부터 미술품을 둘러싼 사건, 큐레이터의 업무까지

다카하시 아키야 지음, 박유미 옮김, 재승출판(2018)


태그:#미술관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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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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