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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언어적 폭력으로 부터 자유로운 멜버른 학생들
 물리적/언어적 폭력으로 부터 자유로운 멜버른 학생들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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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인 한 페친님의 담벼락에서 <학교 문화와 언어>에 대한 교사들의 집단 연구 계획을 보았다. 현 대한민국 교실 현장에서 시급한 문제라 여기기에 열렬히 환영한다.

호주로 이민 오기 전에 중고등학교에서 근무했던 경험에 비춰보면, 체벌이나 물리적 폭력 못지않게 나를 괴롭힌 것은 교사들의 언어였다. 어쩌면 더 오랫동안/ 은밀하게 지속 된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요인이기도 하다.
- 머리가 장식이니?
- 그럴 거면 뭐하러 무겁게 달고 다녀?
- 니네 엄마아빠가 그렇게 교육 시켰니?
- 눈깔 내리 깔어.
- 그런 똥 씹은 표정은 왜 짓는데?
- 니 하는 짓 보니 네가 뭐가 될지 걱정이다.



지난 겨울 방학에 멜버른에 놀러 왔던 중학생 조카가 들려준 학교 안의 언어들이다. 조카는 말한다.

"차라리 한두대 때리고 말았으면 좋겠어요. 한번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어차피 나의 입장을 말하면 말대꾸한다고 더 심한 말을 하니 그냥 참는 거죠."

참담하다. 내가 근무를 할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점이 별로 없는 2018년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다. 수년이 흘렀건만 학교는 수많은 학생들의 분노와 체념에 응답을 하지 않고 있다.

재직시절,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퍼붓는 비난과 힐난, 조롱, 경멸, 모욕에 가까운 말들에 하루 종일 노출되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리곤 했다.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 앉아있기도 거북할 지경이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지각했다고, 숙제 안해왔다고, 복장이 불량하다고, 야자 시간에 허락 없이 갔다고, 버릇없다고….

학생들은 하루 종일 교무실로 불려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구고, 정지 버튼이 고장 난 오디오에서 무한 재생되는 화풀이 또는 저주에 가까운 인성 지도를 듣곤 했다. 가끔 학생들에게 눈물이라도 쏙 빼게 하는 교사는 '지도 잘하는' 선배 교사로 둔갑해 신입 교사들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제로에 가까운 '언어 감수성'으로 교사생활을 시작하다

문제는 나를 비롯해 많은 교사들이 '언어의 감수성'에 대한 제로에 가까운 교육과 인식을 갖고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교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들도 결국은 도긴개긴 한 대한민국의 교육문화를 통과한 사람들이다. 한 존재의 인격을 부정하는 폭력에 가까운 언어들을 사용하는 주변교사들 틈에서 지내다 보면 문제의식에 눈뜨기 어려운 구조다. 

관리자인 교감이나 교장도 마찬가지여서 학부모에게서 항의가 들어올 때나 임기응변식 처리에 골몰할 뿐, 수시로 교사들에게 신고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눈치껏 '학생 장악력'을 키울 것을 주문했다. 학생들만 입을 다물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알면서 모르면서 이어지는 침묵의 카르텔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불편함을 내색하면 동료들과 끊임없이 불화해야 했다. 

2014년, 3년 휴직 끝에 갔던 학교에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비해서 물리적 체벌이 감소한 만큼 언어폭력이 상상외로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교육 현장에 존재하는 유일한 교육방법은 마치 폭력 밖에 없는 듯했다. 언어적 또는 물리적으로 가하는.

그해에는 해당 교사와 직접 마찰을 빚는 대신 부장에게 시정을 요청했다.

"관리자에게 작은 방 하나 따로 마련해달라고 해주세요. 더이상 교무실에서 교사가 학생들을 무릎 꿇리는 모습도, 인격을 모독하는 언어들도 듣고 싶지 않아요."

앳된 중학생들이 분노와 원망 때로는 슬픔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장면을 보는 것은 많이 아팠다. 오랫동안 갈고 닦은 현란한 조롱잔치에서 익사 당하는 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어린이집에 보내 놓은 내 아이가 떠올라 주책맞게 눈물이 났다.

'내 아이도 몇 년 지나면 이런 나쁜 교육을 받고 있겠지.'

멸시와 조롱의 언어로 길러진 아이들... 다음 세대 또한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멸시와 조롱의 언어로 길러진 아이들... 다음 세대 또한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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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고, 내 아이만 부랴부랴 멜버른으로 건져왔다. 더 머물다가는 내가 미치거나 괴물이 될 듯한 조바심에 남편을 조르고 졸랐다. 호주 교육에 대단한 기대를 품은 것은 아니다. 어차피 한국에서 살았다면 시골 어딘가에 자리 잡은 대안학교에 보냈을 아이였으니, 아이들에게 다정한 교육문화 였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만 품었다.

멜버른에서 학부모로 사는 경험은, '모든 아이들이 그들의 잘못이나 실수에 무관하게 교사로부터 언어적/신체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믿음을 갖는 일이다. 대한민국 학교에서 남발되던 일상의 언어가 멜버른 학교안에서는 상상도할 수 없다는 점, 혹시 말하는 교사가 있다면 그는 교사직을 내려놓아야 할 위기에 처할 것이란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가끔은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교실 현장을 녹화해서 한국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어처구니 없는 상상을 해본다. 이곳에서도 순종하지 않고, 규율을 어기고,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들은 존재하고 교사로 사는 일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사회는 학생들의 방종이라는 근거로 교사들의 무절제한 폭력에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수업활동에서 잠깐 떨어져 있기, 점심 놀이 시간에 교사와 함께 있기, 교장실에 가서 면담하기, 부모님 소환하기 등이 그들이사용하는 방법이다.

"중고등학교 학칙의 92%가 사생활 침해"(경향신문) 이란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국가 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중고등학교 학교 규칙 중 학생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규정이 포함된 학교가 전체 136개 학교의 92.6% 라고 보고했다.(2016년 '학교생활에서의 학생 인권보장 실태조사')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배경내)라고 했던가? 오래전에 읽은 책의 제목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수시로 학생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위의 기사가 사실이라면, 대한민국의 교사들은 '학교규칙 지도'란 명분아래 일상적으로 학생들에 대한 무리한 지도를 강요받으며 산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교사들도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학교 규정을 정하는 일에 초대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오로지 억압의 고삐를 바짝 쥐는 '악역 대리인'으로 자리매김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10여년 넘는 교직생활 중 약간만 과장하면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곳'이 대한민국의 학교였다. 교사와 학생 간, 또는 교사와 학부모 간의 빈번한 다툼과 반목은 무리한 학교 규정을 준수하려는 교사와 현실성 없는 조항들의 온당치 못함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려는 학생/학부모 사이에서 일어나곤 했다.

한국 교육 현장도 이곳처럼 시스템이 교사와 학생간의 직접적인 마찰을 줄일 수 있도록 정비되면 좋겠다. 근본적으로는 학생들의 사생활을 극도로 침해하는 규정 자체를 현실에 맞게 민주적으로 고치고 교사들의 전문성과 권위를 교수학습활동에서 발생하는 전인적인 방식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됐으면 좋겠다. 또한 호주처럼 불필요한 행정 업무를 과감히 최소화하고, 축소된 업무는 교장이나 교감 또는 행정실에 담당자를 두면 어떨까.

멸시와 조롱의 언어로 길러진 아이들이 이끌 다음 세대 또한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깨달음, 교육의 경외감을 멜버른에 와서야 온몸으로 체험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태그:#호주, #멜버른, #멜번의 교육, #언어의 감수성, #호주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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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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