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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통영에서는 통영국제 음악제가 열리고 죽은 지 23 년 만에 윤이상(1917.9-1995.11) 의 유해가 고향 땅 통영에 다시 묻힌다고 합니다. 어쩌면 윤이상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현실을 몸으로 겪은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생전 윤이상의 모습.
 생전 윤이상의 모습.
ⓒ 윤이상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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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자랐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 유학을 한 적도 있습니다. 이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 교직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 파리와 독일에서 생활했습니다.

유럽에서 열리는 여러 현대 음악 대회에 출전하여 현대음악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어 유명해졌습니다. 이후 독일 동베르린 북한 대사관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여 음악제를 주관하거나 음악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유럽에서 동베르린에 있는 북한 대사관을 통해서 북한을 방문한 우리나라 사람 200여 명을 한국으로 강제 송환하여 간첩죄로 재판에 회부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처음 사형을 언도 받은 사람도 있었지만 거의 다 풀려났습니다. 이것이 동백림사건입니다.

윤이상은 1967년부터 동백림사건으로 2 년 동안 옥고를 치렸습니다. 이때 독일 정부를 비롯한 세계 음악계에서 그의 석방을 위해서 탄원서를 보내거나 여러 노력을 했습니다. 그 결과 1969년 독일로 돌아가 다시 더 이상 우리나라 땅을 밟지 못하고 1995년 11월 눈을 감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윤이상이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서 유학을 했고,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고 하여 그를 음악제에 초청하거나 그의 음악을 연주하거나 그의 작품을 모은 상품을 만들어 팔기도 했습니다.

윤이상 음악은 현대 음악입니다. 고전 음악이 지닌 아름다운 선율의 반복이나 리듬을 거부합니다.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것만 이어집니다. 윤이상 음악은 우리나라 고전음악이나 중국 음악이 추구하는 자연합일, 영원성을 바탕으로 그러한 사상을 서양 악기 편성으로 표현해 냈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나의 음악은
정의를 향한 절규에, 아름다움에의 호소에 더 가깝습니다.
거기에는 억압된 자들을 위한 위로와 외침이 있습니다.

음은 우주 속에 늘 흐르면서 존재합니다.
공간 전체가 음향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유럽 이론과 철학에서는
음이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단지 한정된 조건만을 마련해 줍니다.
이에 반해 동양에서는 사람이 혼자서 음악을 만들지 않으며
음향이 이미 그곳에 먼저 존재합니다.
동양의 음악가들은 우주의 음향을 받아들여서
그들의 특성과 재능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나는 이제 더욱 더 근본적인 것에 나 자신을 국한시키고 있는데
이는 더 많은 평화, 더 많은 아름다움, 더 많은 순수와 온정을
이 세상으로 지어나르기 위함입니다.
<윤이상, 나의 길 , 나의 이상, 나의 음악>에서
윤이상은 많은 작곡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 민주화 운동을 주제로 한 칸타타 작품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김남주, 백기완, 문익환  등 통일운동을 주도한 시인들의 시 작품을 노랫말로 활용하여 곡을 지었습니다.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광주여 영원히((My Land, My People!), Exemplum in memoriam Kwangju!) 입니다.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광주여 영원히는 1987년 평양에서 녹음되었고, 카메라타사에서 씨디로 만들었습니다.

윤이상은 독일에서 광주 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이 운동이 통일되지 못한 한반도의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고, 광주 민주화 운동이 우리 민족의 민주화와 더불어 영원히 같이 할 것이라는 다짐으로 이 곡을 지었다고 합니다.

 1988년 윤이상-루이제 린저 와의 대담집 출판에 맞추어 윤이상이 쓴 자필 편지와 고려대 교가 작곡가 윤이상(밑줄)입니다.
 1988년 윤이상-루이제 린저 와의 대담집 출판에 맞추어 윤이상이 쓴 자필 편지와 고려대 교가 작곡가 윤이상(밑줄)입니다.
ⓒ 윤이상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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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은 한반도 남쪽에서 태어나 나고 자랐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유학을 가기도 했습니다. 유학 뒤 우리나라에서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고려대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기고 했습니다. 지금도 고려대학교 교가에는 작곡 윤이상이라는 이름이 써 있습니다. 윤이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 고려대학교에서 늘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를 부르는 것은 우리 현실의 역설입니다.

윤이상은 이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북을 다녀왔다는 까닭으로 박정희 정부에서 간첩죄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기도 했습니다. 이후 독일로 돌아간 윤이상은 다시는 우리나라 땅을 밟을 수 없었습니다.

촛불 혁명의 영향으로 세상이 바뀌고 윤이상을 기념하는 음악제가 열리고, 그의 주검이 다시 고국땅에 돌아왔습니다. 윤이상은 고국땅을 밟고 싶어서 일본에서 배를 빌려타고 통영 땅을 배에서 바라보고 돌아간 적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늘 기억합니다. 윤이상은 늘 어려서 어르신들이 듣던 음악이나 환경이 자신의 작곡의 뿌리가 되었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윤이상은 세계적인 작곡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고국은 끝내 그의 귀향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윤이상은 주검으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북한 방문을 이유로 윤이상에게 간첩죄를 물었습니다. 이후 정부나 민주화 단체 등에서도 윤이상의 고국방문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남북한의 복잡한 한반도 사정과 이해 타산이 낳은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윤이상은 상처받은 용에서 태몽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태몽에 의하면 용이 상처를 받아서 끝내 하늘에 오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태몽 그대로 윤이상은 작곡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용이 하늘에 오르지 못한 것처럼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윤이상은 죽어서 주검으로 고국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통일되지 못한 한반도에서 사는 우리 모두의 비극, 아니면 슬픔이기도 합니다.       

 윤이상이 1988년5월 독일 연방 대공로훈장을 받을 때 모습입니다.
 윤이상이 1988년5월 독일 연방 대공로훈장을 받을 때 모습입니다.
ⓒ 윤이상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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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누리집> 윤이상 평화재단, http://www.isangyun.org/xe/index, 2018.3.4
카메레타 도쿄, 윤이상 전집, 1-9, 외, http://www.camerata.co.jp/search.php?category=all&keyword=%E5%B0%B9%E4%BC%8A%E6%A1%91&search=Search, 2018.3.4

참고 문헌> 윤이상 , 루이제 린저 지음, 윤이상 상처 입은 용 : 윤이상 탄생 100주년 기념, 알에이치코리아, 2017
윤이상 외 지금, 윤이상, 나의 길, 나의 사상, 나의 음악, 도서출판 HICE, 1994
최성만, 홍은미 편저, 윤이상의 음악세계, 한길사, 1991

덧붙이는 글 | 박현국 기자는 일본 류코쿠(Ryukoku, 龍谷)대학 국제학부에서 일본 학생들에게 주로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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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본에서 생활한지 20년이 되어갑니다. 이제 서서히 일본인의 문화와 삶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한국과 일본의 문화 이해와 상호 교류를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습니다. 한국의 발달되 인터넷망과 일본의 보존된 자연을 조화시켜 서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교류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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