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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저녁,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혈압 높은 이에게 찬바람이 좋지 않다는 뉴스를 보셨기 때문이었다. 잔소리 비슷한 안부를 주고받은 뒤 어머니께서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지셨다.

"아들, 그래서 너는 지금 괜찮니?"

그래, 삼성 이재용이었다. 고혈압도 고혈압이었지만 어머니는 삼성 이재용의 집행유예 판결에 대한 나의 생각이 궁금하셨던 거다. 1년 전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었을 때도 내게 전화를 하셨던 어머니셨다.( <"빨갱이" 외치는 부모님과 명절 토론, 이렇게 해보자>)

"삼성 이재용이 풀려나왔잖아"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구속중이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구속중이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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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짓 모르는 척부터 했다. 아니, 현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시국이 하 수상하게 돌아갈 때마다 전화를 거는 어머니셨지만, 이번만큼은 별로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속상한 탓이었다.

"예? 뭐가요?"
"삼성 이재용이가 풀려나왔잖아."
"네, 그랬죠. 그런데 아직 몰라요. 대법원 올라가잖아요."
"내 주위에서는 다들 옳은 판단이라고, 법원이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고들 하던데."
"아니에요. 세상이 그만큼 안 바뀌었다는 뜻이죠. 청와대만 바뀐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계속 차근차근 세상을 바꿔야죠."
"그러게 말이다. 너희들이 사는 세상,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굴러가야 할 텐데. 나는 잘 모르겠다."
"예,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요. 다 잘 될 거예요. 이제 삼성도 예전 같지 않을 걸요? 사람들 무서운 줄 알고 눈치를 보겠죠."

그렇게 전화를 끊었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지만, 그동안 아들 말을 철썩 같이 믿어왔던 어머니가 주위 분들에게 얼마나 시달림을 당하실지는 눈에 선했다. 다들 그것 보라고, 결국 삼성이 최고라며, 박근혜 전 대통령도 무죄로 석방될 것이라고 말씀들 하시겠지.

보수언론들은 이제야 이재용이 정경유착 오명에서 풀려났다며, 그가 무려 353일 만에 풀려났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이번 판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봐줘도 어쨌든 뇌물 36억을 공여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집행유예가 될 수 있을까?

진짜 이러려고 우리가 작년 이맘때쯤 그 추위에도 불구하고 촛불을 들은 것인지 자괴감이 들었다. 결국 세상은 바뀌지 않는 것일까? 지난 6일자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의 손석희  말대로 삼성에 대한 반감과 공포만이 우리의 몫일까?

좌절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이재용의 집행유예로 인해 나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은 말 그대로 난리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에 차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좌절을 운운하며 이민까지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문해보자. 과연 이번 판결로 인해 우리가 느끼는 이 좌절감이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승리 때와 비교가 될까? 어르신들만 보면 적의를 느끼고 일흔 넘은 아버지와 말도 섞기 싫었던 그때만큼 비관적인가?

그럼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는 어떠한가. 당시는 이명박 정권이 기세등등하고, 그 다음 대통령은 박근혜가 100% 될 것 같았고, 야당인 민주당은 패배주의에 휩싸여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시기였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찾았다. 장례식장에서 끝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고 그 모든 무게를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그 증거다.

 3당합당 덕분에 우리는 정치인 노무현을 발굴했다
 3당합당 덕분에 우리는 정치인 노무현을 발굴했다
ⓒ 노무현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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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투사였던 YS가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며 역사를 배반했던 1990년 3당 합당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겨레>는 이재용 집행유예 이후 27년 전 3당 합당의 결과 대선에서 패배한 후 나왔던 사람들의 가슴이 뻥 뚫린 만평을 오마주했지만, 그때도 역시 역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덕분에 노무현이란 인물을 발굴하지 않았던가.

역사는 결코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나선형으로 아주 크게 원을 그리며 조금씩 나아간다. 2017년 촛불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만큼 오랜 인고의 시간을 버텼기 때문이며, 또한 좌절하지 않고 절박하고 간절하게 변화를 꿈꿔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판결에 우리가 좌절할 필요는 없다. 무릎 꿇을 필요도 없다. 역사의 전진이 있으면 반동도 있는 법. 딱 이만큼 사회가 나아진 것임을 인정하고 좌절을 딛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촛불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냈으며,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 적폐청산 중이지 않은가.

'삼성'을 떠들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악과 대면하여 이기기 위해서는 '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고 했다. 자신이 평생동안 추구했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가 MB정부 들어와 후퇴하자 그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그는 방관하는 것조차 결국은 악의 편이라고도 했다. 

DJ의 일갈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실마리를 던져준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번에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판결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다. 똑같은 뇌물 공여인데 누구는 실형을 살고, 삼성의 이재용은 그보다 훨씬 많은 액수인데도 불구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이 상황을 동네방네 크게 떠들어야 한다. 이 불공정한 사례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어야만 다시는 그와 같은 실수가 되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재판관이 궁극적으로 두려워하는 건 자신의 판단에 대한 일반 국민의 시선 아니겠는가.

 정형식 부장판사에 대한 '특별감사' 요청 청와대 청원이 8일 오전 0시 35분 경에 참여인원 20만 명을 넘어섰다.
 정형식 부장판사에 대한 '특별감사' 요청 청와대 청원이 8일 오전 0시 35분 경에 참여인원 20만 명을 넘어섰다.
ⓒ 청와대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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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국민 정서와 크게 다른 판결이 내려지면 그 판사 이름이 인터넷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혹자는 이를 삼권분립의 침해라고 우려하지만, 기우일 뿐이다. 그것은 결국 국민의 눈높이와 다른 판결을 내린 사법부가 자초한 것이며, 시민들이 더 이상 법관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만약 사법부가 국민의 법 감정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삼권분립의 나라에서 누군가가 사법부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재판관을 해코지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러나 그 판결이 정당한지 부당한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이재용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던 정형식 판사를 기억하고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따져 물어야 한다. 불가능해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을 남겨 여론을 알려야 한다. 그것이 이번 판결을 의아해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또한 우리는 정형식 재판관과 함께 삼성을, 이재용을 끊임없이 떠들어야 한다. 만인이 평등해야 할 법위에 군림하고 있는 삼성을 끊임없이 고발하여 삼성신화에 균열을 내야 한다. 결국 제품과 서비스를 팔아야 하는 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국민들의 입소문과 그로 인한 인식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삼성이 선망의 대상이요 동시에 공포의 이름이 되어버린 사회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소위 '돈과 빽'으로 거짓을 참으로 만들 수 있는 사회. 결국 지난해 겨울 우리가 촛불로 태우려했던 적폐가 바로 그런 껍데기 아니었던가. 현재 우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나 소위 '끝판왕'과 상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너무 빠른 분노와 좌절은 금물이다.

혹자의 말대로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록 곧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리지만,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사건에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떠든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처음 다스가 누구 거냐고 물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코웃음 치지 않았던가.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삼성은 그래서 부끄럽지 않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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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지금은 비록 회사에 몸이 묶여 있지만 언제가는 꼭 공부를 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