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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독재 타도 등의 구호가 적힌 선전물을 민정당 연수원 내부에 붙여놓고 농성중인 학생들.
 1985년 독재 타도 등의 구호가 적힌 선전물을 민정당 연수원 내부에 붙여놓고 농성중인 학생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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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6년 3월 24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법 합의10부 재판정. 폭력행위 등으로 구속기소된 대학생 6명에게 검찰의 구형이 내려졌다.

'주동자급'으로 지목된 김의겸(고려대 법학과 4학년)과 최창원(연세대 법학과 4학년), 이현철(성균관대 경영학과 4학년), 고명석(서울대 종교학과 4학년)에게는 징역 10년의 중형이 구형됐다.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과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죄를 적용한 결과였다. 나머지 임종운(동국대 산업공학과 4학년)과 백정호(동국대 임학과 4학년)에게도 각각 8년과 7년이 구형됐다.

서울지검 공안부 소속인 곽영철 검사는 논고문을 통해 "피고인들이 일체의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이 주장하는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라며 "구속된 이후에도 법정에서 재판부를 모욕하는 등 전혀 반성하는 빛이 없어 중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라고 중형 구형의 이유를 설명했다.

곽 검사가 '폭력적인 방법'이라고 언급한 것은 당시 학생운동조직이었던 삼민투가 주도한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농성'을 가리킨다. 검찰에서 주동자로 지목한 김의겸은 그로부터 약 32년이 흐른 뒤 <한겨레> 기자를 거쳐 문재인 정부의 두 번째 청와대 대변인에 발탁됐다. 이와 함께 그가 주도했던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농성 사건'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1985년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 가락동에서 일어나다

청와대 대변인으로 내정된 김의겸 전 <한겨레> 선임기자.
 청와대 대변인으로 내정된 김의겸 전 <한겨레> 선임기자.
ⓒ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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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29일 신임 대변인에 내정된 김의겸(56) 내정자의 프로필에 '전북 군산 출신'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김 내정자가 태어난 곳은 경북 칠곡 왜관읍이다. 경북 칠곡 왜관읍은 지난 1978년 미군이 고엽제를 대량 매립한 캠프 캐럴 기지가 있는 지역이다.

김 내정자는 경북 칠곡 왜관읍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전북 군산으로 옮겨 이곳에서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군산제일고를 졸업한 뒤 지난 1982년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법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법학과 4학년이던 지난 1985년 10월 고려대 삼민투 산하 '군부독재타도 및 민중민주민족통일 헌법 쟁취 투쟁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았다.

김 내정자가 고려대 삼민투 산하 조직을 맡은 1985년은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의미있는 해였다. 2월에는 민주화운동 지도자였던 김대중이 귀국했고, 이어 2.12 총선에서 신민당이 등장해 돌풍을 일으켰다. 이런 제도권 정치 상황과 별도로 학생운동진영 등에서도 중요한 움직임들이 진행됐다.  

4월에는 전국 대학생들의 대표조직인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이 출범했고, 전학련 산하에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이라는 '3민 이념'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도 만들어졌다. 상설 학생운동 투쟁조직인 삼민투가 결성된 대학은 전국 30여 개에 이르렀다.

삼민투가 만들어진 직후인 5월 23일 삼민투 산하 '광주학살원흉처단투쟁위원회' 소속 대학생 73명(서울대·고려대·서강대 등 5대 대학)이 서울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학살 진상 규명'과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72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은 반미운동이 대중화되는 계기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6월에는 구로공단에서 동맹파업이 벌어졌다. 11월 4일에는 서울시내 7개 대학 소속 학생들이 주한미상공회의소를 점거농성했다.

1985년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은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서 일어났다. 11월 18일 대학생 김의겸을 비롯한 서울시내 대학생 191명(여대생 56명)이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한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을 점거해 농성을 벌인 것이다. 1984년 11월 민정당사 점거농성과 1985년 5월 미문화원 점거농성 이후 최대 규모였다.

농성단에는 유서대필사건 재심 무죄로 '한국판 드레퓌스'로 널리 알려진 강기훈씨와 팟캐스트 '나꼼수'의 일원이었던 정봉주 전 의원, 지난 2012년 경기 화성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원욱 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독재 타도", "양키 고 홈" 등의 구호를 외치고, "군부 독재 타도하자", "파쇼 헌법 철폐" 등이 적힌 현수막과 "장기집권 획책하는 전두환 일단 처단하자", "장기집권 지원하는 미국 물러가라" 등이 적힌 글씨를 벽에 내걸었다. 하지만 점거농성 시작 6시간여 만에 전원 연행됐다.

당시 민정당 중앙연수원 정문에는 "이곳은 전두환 총재 각하의 구국의지와 평생 동지들의 애당심이 만나는 곳이다"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김의겸의 범죄 혐의는 화염병 제작과 반입이었다

1985년 12월 17일 <동아일보>에 실린 공소장 전문에 따르면, 김 내정자는 1985년 10월 30일 오후 8시께 명지대 앞 진진제과점에서 연세대 삼민투위원장인 최창원과 성균관대 삼민투위원장인 이현철을 만났다. 이들은 전학련 중앙집행위의 결의에 따라 11월과 12월을 '개헌투쟁 국면'으로 정하고 선도적인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이후 민정당 중앙연수원을 점거하기 전인 11월 17일까지 이들은 오수진 전학련 의장과 고명석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정종주 서울대 파쇼헌법철폐투쟁위원장, 전학련 동서남북지역 각 평의회 실무대표인 서울대 하기홍, 고려대 김봉환, 연세대 장경혜, 성균관대 이송지 등을 다방과 레스토랑, 자취방 등에서 만나 투쟁방향을 논의했다.

이들은 '주타격방향'을 집권당인 민정당으로 정하고, 서울시내 대학생들을 대거 동원해 상징성이 높은 건물을 점거한 뒤 농성하기로 하고, 그 '상징성이 높은 건물'로 민정당 중앙연수원으로 정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놓았다.

"점거투쟁의 성격은 종전에는 서울 미국문화원 난입점거사건과 같이 대화를 요구하며 점거 농성을 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으나 그동안 누적된 경향으로 보아 대화 목적이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고 민정당은 대화의 대상이 될 수도 없으므로 이번 점거 투쟁이 대화 목적이 아니라 타격 내지 공격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의견 일치를 보고, 점거대상은 민정당 중앙당사가 상징성은 높으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고, 경찰 경비 태세 또한 견고하여 건물점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그 대신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이 상징성은 다소 떨어지나 출입이 용이하고 경찰 경비도 허술하므로 동연수원을 공격대상으로 삼아 투쟁하기로 결정하고 (하략)"

250명의 대학생들을 동원한다는 목표 아래 주요 슬로건은 '군부 독재 타도'와 '파쇼 헌법 철폐'로 설정하고, 여기에다 미국 정부의 수입개방 강요 비판을 부차적인 슬로건으로 잡았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이들은 화형식에 필요한 석유와 솜, 천, 철사는 물론이고 화염병과 쇠파이프, 각목 등도 준비했다.

11월 18일 오전 7시 50분께 서울 동서남북 지역 평의회 소속 대학생들은 각각 가락동 현대아파트 앞 65번 버스정류장과 문정아파트 앞 노상, 중앙연수원 정문 앞 양쪽 도로변, 중앙연수원 옆 아파트 공사장에 집결했다. 서울대의 하기홍이 호루라기를 불고, 연세대의 장경혜가 "야! 우리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라고 외치는 것을 신호로 191명이 일제 '아' 함성을 지르며 중앙연수원으로 진입했다.     

이후 낮 12시 30분까지 중앙연수원 본관 건물 2층 양쪽 계단과 옥상 입구에 경찰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책상, 의자 등으로 장애물을 설치했다. 미국 정부 등을 상징하는 허수아비 2개를 만들어 불태우고, 참가자 전원이 '파쇼 헌법 철폐하자' 등의 구회를 외쳤다.

검찰이 공소장에 적시한 김 내정자의 범죄 혐의는 화염병 제작과 연수원 반입이었다. 검찰 공소장에는 화염병 제작과 연수원 반입 과정이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다. 

"연수원 건물을 점거하여 농성하면서 건물 내외곽에 인화력이 매우 강한 신나 등을 넣어서 만든 화염병에 불을 붙여 던지게 되면 위 건물에 인화되어 화재가 발생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점거농성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서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공격용 무기로서 화염병을 제작 반입하여 사용하기로 수차 공모하고 (중략)

화염병을 대학별로 20개 정도씩 반입하여 투척하기로 결정하고, 위 결정에 따라 동월 16일부터 동월 17일까지 서울대에서는 소주병 26개에, 고려대에서는 박카스병 28개에, 성균관대에서는 박카스병 16개에, 서강대에서는 사이다병 13개에, 각 신나와 석유를 1 대 2 정도의 비율로 섞어 채우고 석유를 적신 솜으로 심지구실을 할 마개를 막아 유니랩 등으로 감싸는 방법으로 각 화염병 도합 1백3개를 제작한 다음, 동월 18일 오전 7시 50분경 위 연수원 정문 앞까지 운반하게 함으로써 (하략)"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의 인사"

연수원에는 경찰 12개 중대 2100명과 소방차 8대가 동원됐다. 경찰은 세 차례 진입을 시도한 끝에 연수원 진입에 성공했고, 점거농성은 6시 30분 만에 진압됐다. 이후 점거농성 참가자 전원(191명)을 폭력·방화사범으로 몰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로 인해 공안부 인력으로 사건을 처리하기 어렵자 검찰은 일반 검사들까지 차출했다. 다만 이후 실제 구속자는 82명으로 줄었다. 일명 '건대 항쟁 사태'(1986년 10월)로 1200명의 대학생들이 구속되기 전까지만 해도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농성은 해방 이후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구속된 사건이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등은 "군사독재정권의 퇴진과 민주헌법제정은 온 국민의 뜻이다"라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은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 학생들의 주장은 정당하다, 전원 구속처리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라고 이들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냈다.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농성을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본 것이다.

검찰은 지난 1986년 3월 24일 김 내정자 등 '주동자급' 대학생들에게 징역 10년의 중형을 구형했다. 1주일 뒤에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도 김 내정자와 이현철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특히 김 내정자 등은 1심 재판 과정에서 인정신문을 응하지 않는 등 재판을 거부해 2차 공판이 열린 뒤 이들을 변호하던 김명윤 변호사가 스스로 사임하기도 했다. 김 내정자는 형이 확정된 이후 2년 반 옥살이를 하다 출소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29일 김 내정자의 대변인 발탁이 "문재인 대통령의 인사"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인사라는 얘기다.

사실 두 사람에겐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법대를 졸업했고,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됐고, 지난 1988년 <한겨레> 창간 사외위원 겸 부산지국장과 기자가 됐다. 이런 공통점이 이번 인사에 반영됐을지도 모른다. 법대 운동권-변호사 출신과 법대 운동권-기자 출신이 청와대에서 어떻게 호흡을 맞출지도 향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1월의 함성 - 민정당 연수원 점거 농성'(https://www.kdemo.or.kr/blog/location/post/1182)



태그:#김의겸,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농성사건, #삼민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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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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