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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르고 좁은 계단은 산동네로 끝없이 이어져 있다. 계단 양쪽을 따라 키 작은 집들이 산 위까지 다닥다닥 이어져 있다. 어두운 동네를 밝히는 것은 노랗게 불 밝혀진 창문들, 불 켜진 창문들은 마치 노란 은행잎처럼 집집마다 걸려 있다. 낮은 가로등 불빛이 어슴푸레 비추는 골목길로 막 들어서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그림자로만 보인다. 어두운 밤하늘 한 켠에는 희미하게 그믐달이 걸려 있다.
달동네-아버지의 퇴근길
 달동네-아버지의 퇴근길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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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이 더욱 인상적이었던 건 계단이 시작되는 집 담벼락에 그랜드 피아노를 놓고 연주하는 사람의 모습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면 동네 중간 골목쯤 담벼락에 기대 첼로를 켜는 사람도 있다.

달동네와는 도무지 어울리지는 않을 것 같지만 외려 그림 속에서 이들은 달동네와 묘하게 어우러진다. 마치 그림 속에서 실제 연주소리가 들릴 듯하면서 그림 속 달동네 풍경은 다소 몽환적으로 느껴지고 언뜻 샤갈의 느낌이 나기도 하는 이 작품은 엄경근의 <아버지의 퇴근길 2017>이다.

2018년 1월 26일부터 2월 2일까지 부산 민주공원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엄경근의 6번째 전시회 제목은 <달동네 여섯 번째 이야기>, 그는 첫 전시회부터 지금까지 줄곧 달동네를 그려오고 있다.

전시회에서 즉석 드로잉 하고 있는 화가 엄경근
 전시회에서 즉석 드로잉 하고 있는 화가 엄경근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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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 그래서 왠지 어둡고 우울할 것 같지만 엄경근 작가의 그림 속 달동네는 따듯하면서도 서정적이다. 눈 내린 달동네 집들 위로 산타가 루돌프 썰매를 끌고 찾아온다.

항구에 세워진 오징어 배 안에는 고기 대신 그믐달이 실려 있기도 하다. 이 세상 어디에나 고루 비추는 달빛처럼, 세상의 희망이나 사랑 같은 것이 달동네에도 도착하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읽힌다.

엄경근작 달동네-크리스마스
 엄경근작 달동네-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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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경근작 출항
 엄경근작 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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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그림이 온전히 서정적이고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포크레인이 달동네의 다닥다닥 붙은 집들을 밀고 있기도 하다.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사라져가는 달동네의 냉혹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포크레인이 민 저 집의 사람들은 내일은 어디에서 하루의 고단함을 쉴 수 있을까?

엄경근작 달동네-철거중인 포크레인
 엄경근작 달동네-철거중인 포크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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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경근 달동네 여섯번째 이야기 전시된 작품들
 엄경근 달동네 여섯번째 이야기 전시된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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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를 그린 엄경근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달이다. 때로는 그믐달이었다가 때로는 보름달이다. 그믐에서 보름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작가에게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작가의 고향은 부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부산의 산동네, 산복도로라 불리는 곳이다. 아버지는 오징어 배를 타는 어부였다. 어부들은 물 때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던 어린 화가에게, 아버지는 그믐이 되면 배를 타러 갔다가 보름달이 뜨면 집으로 돌아오는 달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믐달이 보름달이 될 때까지 그 시간은 작가에게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엄마도 일을 하러 나가고 아버지는 고기를 잡으러 나가면 학교에서 돌아온 어린 작가는 할 일이 없었다. 공부에 딱히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시간부터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케치북을 사는 것도 사치였던 시절, 그냥 벽지에다 장판에다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작가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찾은 가장 재미있는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집안의 장판이며 벽지가 그림으로 빽빽이 채워져도, 혹 그중에 뛰어난 그림이 있어도 가족들은 작가의 그림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달동네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삶의 무게가 부모님들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는 학교대표로 그림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아왔는데 엄마는 오히려 타박만 했다. 국어, 산수를 잘해야지 그깟 그림만 그려서 뭐할 거냐고...   

공부에는 별 취미가 없고 그림으로만 유일하게 실력을 인정받는데 집에서는 정작 인정을 안 해주니 중학교 무렵부터는 빗나가기 시작한다. 소위 문제아가 되어 오토바이를 타고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심지어 동네 경찰서를 너무 자주 드나들어 경찰관들이 작가의 이름을 알 정도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면 지나가던 순찰차가 마이크로 이름을 부를 정도였다.

"경근이, 경근이, 오토바이 세워 "

인생을 바꾼 미술 선생님과의 만남

경찰관이 부르는 소리를 피해 달아나던 문제아, 그런 문제아의 인생이 달라진 결정적인 계기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서 미술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선생님은 엄경근 작가의 그림을 처음으로 유심히 봐 준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작가가 열심히 그림을 그리면 대학을 보내주겠다는 말을 한다. 대학은 자신은 꿈도 꿀 수 없는 곳이라고 여겼던 작가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그림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매일 가장 먼저 등교해 미술실 문을 열고 그림을 그렸다. 수업을 마치고도 남아 그림을 그리다가 미술실 문을 잠그고 하교를 하는 생활을 했다. 고3이 되자 선생님은 자신의 돈으로 미술학원을 끊어 작가를 미술 입시학원을 보내준다. 결국 엄경근 작가는 그 실업고등학교 최초로 사범대 미술교육학과에 합격하는 기적을 얻게 된다.

그림이 자신이 평생 가야할 길이라는 생각을 하고 다양한 그림을 그리던 작가는 어느 날 정태춘의 <서울의 달>을 듣게 되고, 거기서 자신의 그림을 방향을 잡는다.

하루가 가고 더 좋은 날이 오겠지
집 떠나 바라본 서울 하늘에 무얼 보았니
오늘 밤 바라본 저 달이 너무 처량해

가난과 외로움과 설움을 묵묵히 견디며 고단한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비단 자신의 부모님과 달동네 이웃들뿐만은 아니라는 생각, 어쩌면 부모님의 세대가, 자신의 세대가 함께 겪은 시대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고 달동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설령 가난의 채찍질에 도시의 벼랑 끝으로 밀려났다 해도 가족과 자식을 위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달동네 사람들, 그들의 깊은 속내를 포착해 낸 엄경근 작가의 그림은, 지금도 다르지 않을 삶의 무게에 휘청이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 우리에게 달빛처럼 따스한 위로를 건넨다.
엄경근 작 달동네-퇴근길
 엄경근 작 달동네-퇴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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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는 마치 영화처럼 자신과 같은 문제아들이 모여 있는 대안학교에서 오랫동안 미술교사 생활을 한다. 자신과 비슷한 아이를 가장 잘 이해하는 교사였던 그는 자신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다리가 부러져 학교에 오는 아이들을 마음으로 이해했다.

전시회 오프닝 끝에 참가자들을 위해 작가의 그림 딱 2점을 경매를 했다. 5만원부터 시작했는데 치솟는 경쟁자들의 가격을 꺾고 그림을 구매하는 젊은 청년이 있었다.

결국 그림을 가진 청년에게 왜 그렇게 그 그림을 가지고 싶어 했냐고 물었더니, 오토바이만 타던 문제아였던 자신을 지금의 사람으로 만들어준 사람이 엄경근 선생이라고, 자신이 그 대안학교 출신인데 지금은 퀵서비스 배달업체 사장이 됐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히는 말,

"제가 졸업한 학교에 선생님 그림 기증할려구요~"
엄경근작 / 크리스마스
 엄경근작 /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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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아에서 문제적 작가가 된 화가 엄경근, 달동네에서 가난과 외로움을 견디며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낸 그의 인생 역정은 고스란히 그의 그림의 자양분이 됐다. 달동네를 그리는 그의 그림이, 달동네 위에도 어김없이 뜬 둥근 보름달 위를 달려 잊지 않고 달동네를 찾아오는 산타클로스처럼 따뜻하고 희망적이어서 더 좋다. 그림과 함께 성장한 화가 엄경근, 그의 성장스토리는 앞으로도 계속될 듯 보인다.


태그:#엄경근, #달동네화가, #부산자유학교, #달동네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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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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