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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사촌 언니 두 명이 놀러왔다. 이종 사촌은 종종 왔었는데, 고종 사촌은 처음이었다. 고모네 딸들을 대접하고 싶었던 엄마는 단골 과일 가게에서 수박을 사왔다.

10분 거리에 은행이 불을 끄면 문을 여는 과일 노점에서 가장 큰 수박을 사온 엄마는 팔이 아프다고 투덜댔다. 수박을 가르며 맛없으면 바꾸러 갈 거라고도 했다. 빨간 속살을 내보이며 쩍 소리와 함께 갈라진 수박은 맛있어 보였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만족하며 먹기 좋게 수박을 잘라내는 엄마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수박 조각 중 커다란 놈을 골라 한입 베어 물었다. 엄마가 수박을 가지고 다시 가게로 가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TV에서 보니까 수박씨에 영양이 많다더라. 씨 뱉지 말고 씹어서 먹어."

쌉쌀하고 거친 씨를 수박 속살과 같이 씹으면 맛이 없다. 건강과 영양을 모르는 초등학교 1학년인 나는 씨를 뱉고 먹었다. 엄마는 씨를 먹지 않으면 수박을 안 줄 거라고 말하고, 실천에 옮겼다. 한 조각만 먹고 수박을 못 먹게 된 나는 화가 났다. 어떻게 내 걸 남기지 않고 엄마가 사촌 언니들이랑 수박을 다 먹을 수 있냐는 생각에 억울해서 집을 나갔다.

그 당시 나는 화가 나면 무작정 집을 나갔다. 가출이 뭔지, 집을 나가는 게 뭔지도 모르고 뛰쳐나갔다. 해가 질 때까지 동네를 돌아다니다 집 앞에 서 있으면 엄마가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들어가 씻고 잤다.

<엄마가 미운 밤>
 <엄마가 미운 밤>
ⓒ 천개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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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없이 집 나가던 내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림책이 있다. 다카노도 호코가 글을 쓰고 오카모토 준이 그림을 그린 그림책 <엄마가 미운 밤>은 엄마에게 야단맞은 세 아이 이야기다.

어두운 밤에 아기 곰, 아기 너구리, 아기 염소가 공원에 모여 투덜대고 있다. 누나니까 참으라고 해서, 꼬마 아이 머리 쓰다듬은 건데 장난치지 말라고 해서, 손을 안 씻었더니 간식을 안 줘서 엄마에게 화가 난 아이들.

툭하면 화내는 엄마가 미워서 힘껏 막대기도 내리치고, 안전 고깔도 던져보고, 깡통도 발로 차 본다. 이때 날아간 빈 깡통이 아이 동상 위에 올라갔다. 아기 곰이 안전 고깔을 엄마 동상에 올려 놓는다. 화가 나서 씩씩 거리던 아이들은 신나게 꺄르르 웃었다.

세 아이는 공원에서 나와 동네를 누빈다. "엄마는 필요 없어"라고 소리치며 재주도 넘고 담벼락을 긁으며 연주도 한다. 동네 아저씨에게 "시끄럽다"고 혼나고 도망가면서도 깔깔 댄다. 하얀 벽에 탁탁 손자국을 내고 '낙서금지'라고 써진 벽보는 염소가 먹어 버린다. 불조심 벽보, 광고 벽보 모두 뜯어 먹으면서 어른들이 하는 잔소리를 씹어 먹는 쾌감을 느낀다.

한껏 들뜬 세 아이들은 으스대며 걸어가다 노랫소리를 듣게 된다. 자장가가 들려오는 창가 아래 도착한 세 아이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 모습을 까치발까지 하고 올려 본다. 불 꺼진 집 계단에 앉아 처연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보는 아이들에게 달님이 말한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렴."

왔던 길을 되돌아 세 아이는 집으로 향한다. 엄마 품에 안겨 행복해 하는 아기 염소, 아기 너구리, 아기 곰 모습을 끝으로 그림책은 끝난다.

밤에 펼쳐지는 이야기인 <엄마가 미운 밤>은 흑백으로 처리된 배경 속에 세 아이들이 입고 있는 빨강, 파랑, 보라색 옷만 도드라진다. 아이들 행동과 표정에 집중할 수 있는 색표현은 어두운 무채색 세계에서 하얀 배경에 둥글고 커다란 노란 달님이 화면을 채우는 마지막 부분에 절정에 다다른다. 세 아이의 천진난만한 행동에 웃음 짓다 달님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가슴이 환해진다.

<엄마가 미운 밤>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당황했다. 엄마를 미워하다니... 우리 아들도 나를 미워할까? 책 제목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파격적인 제목에 호기심이 생겨 책장을 넘겼다.

책을 다 보고 나니 그 속에 있는 불쑥 화내는 엄마도 나고, 집을 나가 동네를 방황하는 아이도 나였다. 소심한 내가 어릴 때 대범하게 집나가는 아이였다는 게 신기했는데, 이 책을 보고 나서 많은 아이들이 홧김에 집을 나가거나 나가고 싶어한다는 걸 알게 됐다. 집에서 벗어나 화나고 미운 감정을 밖에서 마음껏 풀어내고 난 뒤 엄마 품으로 돌아오는 일은 아이들 성장에 꼭 필요하다.

올해 6살이 되는 아들 동글이는 괴물놀이하다 내가 뽀뽀 공격을 하자 "괜찮아, 어차피 사랑하니까"라며 엄마에 대한 굳건한 사랑을 표현했다. 지금은 말로만 "엄마 나빠, 엄마 미워"라고 하지만 동글이도 집을 뛰쳐나가 돌아다닐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우리 아이가 엄마 사랑을 확신하며 돌아올 수 있길 바란다.

"동글아, 마음껏 나가렴. 어차피 우린 사랑하니까~!"


태그:#엄마가 미운 밤, #방황, #가출, #엄마, #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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