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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속에서 책 도둑을 가장 실감 나고 재미나게 그린 것은 아마도 고종석 선생이 쓴 <기자들>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화자는 선량한 동포 소비자를 착취해서 폭리를 취하는 문화 산업의 종사자(서점 주인)를 응징하기 위해서 책 도둑을 시작한다. 본인이 사려고 했던 포켓 판 프랑스어- 독일어 사전과 프랑스어-이탈리아어사전이 턱없이 비싼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스스로 의적이 되었다.

"'나는 <통사구조론>을 빼어들고 페이지를 뒤척이다가 되도록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그 책을 내 청바지 뒷주머니에 구겨넣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뒷날 내가 책 도둑질의 베테랑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은 사실이지만, <여름 장사>는 여간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얇은 옷에는 사실 훔친 책을 안치할 공간이 별로 없는 것이다. <통사구조론>은 내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가기에는 몸피가 컸고, 그래서 반으로 접힌 그 책은 내 주머니를 볼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책의 윗부분은 주머니 밖으로 삐져나왔다. 범한서적의 직원이 자기 직분에 조금만 충실했더라면, 나의 첫 의적질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 나의 화려한 경력은 초기 단계에서 낙태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점원은 그날 자신의 불성실을 통해 한 사람의 의적을 탄생시켰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웃는 표정으로 힘겹게 번역하며 천천히 매장을 빠져나왔다." <기자들>, 고종석 , 민음사 229쪽

고종석 선생은 유려하게 우리말을 구사하는 작가로 유명한데 이 구절은 유머러스함까지 더해져 글 자체를 훔치고 싶을 정도다. 날이 갈수록 책 훔치기 기술이 일취월장하게 된 소설 속 화자는 책 훔치기 기술을 공개한다.

첫째 여름은 불편하더라도 큰 주머니가 달린 헐렁한 옷을 입어야 한다. 둘째 손님들이 많을 때 본다는 오히려 한산한 아침 시간이 착취자의 기관들 감시가 소홀하니 이 시간대를 노려야 한다. 셋째 한국어 서적보다는 외국어 서적 판매대가, 소설보다는 진문 서적 코너가 일하기(훔치기) 편하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의적이 말하는 책 훔치기의 기술은 요즘 시대에는 별 쓸모가 없다. 구석구석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사람의 눈길을 피한다고 훔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키는 자가 진화를 하면 훔치려는 자도 진화를 한다. 요즘 책 도둑은 책 자체를 훔치기보다는 필요한 부분만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버린다.

책 도둑질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발달되었다. 책 자체를 훔치려는 사람을 발견하면 따끔하게 훈계를 하든가 경찰에 넘기기라도 하지 책 속에 나오는 필요한 부분만 사진을 찍는 사람을 딱히 제재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워낙 순식간에 '찰칵'해버리니까 발견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

문학작품 속에서 책 도둑을 가장 실감 나고 재미나게 그린 것은 아마도 고종석 선생이 쓴 <기자들>이다
 문학작품 속에서 책 도둑을 가장 실감 나고 재미나게 그린 것은 아마도 고종석 선생이 쓴 <기자들>이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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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에 나오는 책 도둑은 스스로 '의적'이라고 칭한 만큼 훔친 책을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심지어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한다. 그런데 오히려 도서관에 있는 책을 탐내서 훔치는 사람도 제법 많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반납을 하지 않고 액면가로만 변상하고 자기 것으로 소장하는 사람들이다.희귀본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 공공도서관은 보물창고다. 특히 역사가 오래된 대학도서관은 더욱 그렇다.

역사가 오래되었다면 분명 요즘에는 거의 구하기 힘든 희귀본이 많을 터이고 도서관 장서인 이 표지에는 없고 내지에만 찍혀 있는 예도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것으로 세탁하기가 수월하다. 공공도서관에서 자기가 구하고 싶은 희귀본을 발견하면 일단 대출을 했다가 분실했다며 반납을 하지 않는데 그에 대한 손해 배상보다는 그 희귀본을 소유하는 이익이 훨씬 더 큰 경우가 많다.

그 짓을 한 사람은 어찌 되었던 도서관 장서였다는 흔적을 지우려고 고심을 한다. 면봉에 곰팡이를 없애는 세제를 발라서 도서관 장서인 흔적을 문지르면 감쪽같이 장서인 흔적은 없어지는 요령을 인터넷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도서관이나 서점이 아니고 친구나 지인들이 소장하는 책을 도둑질하는 것은 경우는 어떨까? 이런 경우는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말이 실감이 된다. 다른 사람 집에서 다른 물건을 맘대로 집어가진 않지만, 책은 자연스럽게 들고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다시 반납하지도 않을 거면서 '이 책 좀 빌려 갈게'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나마 양반이다. 친구나 지인의 서재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책을 들고 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책을 빌려 가서 함부로 취급하는 사람도 많다. 원래 책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는 사람도 빌려 간 사람이 함부로 책을 사용한 흔적이 있으면 불쾌한 법이다. 하물며 책을 곱게 다루며 읽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책을 빌려주기 싫어한다.

빌려주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빌려달라고 고집을 피우면 거절의 기술이 필요하다. 우선 책을 빌려 가고 싶으면 띠지를 비롯해서 책에 절대로 손상이 가지 않아야 함은 물론 내지를 한번이라도 접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제시하라.

빌려 달라는 사람이 사는 동네 도서관에서 검색해서 '이 도서관에 이 책이 있으니까 여기에서 빌려'라고 말을 한다.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는 극약처방으로 '내 책을 빌려 가서읽으려면 모일 모시에 만나서 이 책에 관한 토론을 해야 해'라고 말하면 된다.

물론 본인이 그 책을 읽고 나서 느꼈던 감동이나 공감을 빌려 간 사람이 똑같이 느끼겠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끼고 나아가 그 사람이 더 나은 인생을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하면서 즐겁게 책을 빌려주는 천사도 있다. 또 책을 빌려주었는데 그 책을 읽은 소감을 말해주는 귀한 대출자도 있다.

사족> 책 도둑 이야기가 나오는 고종석 선생이 쓴 <기자들>은 1993년에 출간되었는데 절판이 되었고 책 수집가들이 노리는 표적이 되었다. 고종석 선생은 한국어를 현란하게 사용하는 분이고 <기자들>은 그가 가진 역량이 아낌없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자들>은 그 당시 유럽이 처한 정치 경제적인 이슈와 기자들끼리 주고받는 우정과 로맨스가 어우러진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2014년 <빠리의 기자들>이란 제목으로 재출간되어서 독자들을 기쁘게 했는데 어쩐 이유인지 이 글에서 인용한 '책 도둑'을 다룬 장이 통째로 빠졌다.


빠리의 기자들

고종석 지음, 새움(2014)


태그:#책도둑, #책훔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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